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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과 익숙함의 사잇길을 걷다…예술의 전당부터 고속터미널까지 [문화지평 답사기]

기사승인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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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멀다는 생각이 강렬해서일까. 다소 이른 아침임에도 절로 눈이 떠졌다. 지각을 하는 것보단 일찌감치 도착해 있는 편이 낫다며 집을 나섰는데, 약속시각을 무려 한 시간이나 앞둔 시점에서 남부터미널역에 닿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유를 간단히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며 보냈다. 이후 생각보다 많이 걸었는데, 미리 이것저것 먹어 둔 덕을 톡톡히 보았다. 나름 많이 걷는 편이라고 자부했기에, 다리가 아파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초반에 대성사를 오르며 걸었던 길이 부담이었던걸까. 사랑의교회를 향해 뻗은 반포대포의 길이가 다소 길었던 걸까. 굳이 이유는 따지지 않으련다.

종종 전시를 관람하러 들르곤 했던 예술의 전당 앞에 다른 이유로 서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음악과 관련된 무어가 있는 건지 곱게 의상을 차려 입은 이들 몇몇이 황급히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팩 하나 질끈 등에 매달은 나의 복장은 그들에 비하면 매우 불량했다. 그 길로 예술의 전당 뒤편의 서울둘레길을 걸어도 하등 어색하지 않지 싶었다.

첫 장소인 대성사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우면산을 정확히 관통하는 서울둘레길을 걸으며 대성사를 한 차례 접했다. 당시에만 해도 나에겐 너무도 먼 서초구였기에 언제 내가 여길 다시 오겠냐며 사찰 구경에 나섰다.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내 눈에 들어온 건 달랑 두 동 즈음에 불과한 건물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왜 그리 고색창연해 보였던지. 최근에 지은 사찰인 모양이라며 불과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돌아서 나왔다. 몰라도 너무 몰라서, 장소로부터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게 그저 그런 공간에 불과했던 대성사가 답사 코스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고대 국가의 성립에 불교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게 된다. 이전까지의 부족, 씨족 중심의 사회가 불교라는 지도이념을 축으로 재편되면서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탄생이 가능했다. 물론 기존의 모든 것을 불교로 대체하기란 어려웠다. 다른 나라의 불교를 접해본 바 없으므로 비교는 힘들지만, 전통적인 구복 신앙적 측면이 오늘날 불교에도 곳곳에 깃들어 있음은 잘 안다.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던 건 대륙과 가까운 고구려였다. 고구려보다 2년 가량 늦은 374년 백제 또한 불교를 수용했다. 고구려의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데 반해 백제는 남방계통이라 할 수 있는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지금도 영광 불갑사에 가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사찰과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백제하면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건 공주와 부여다. 허나 백제의 첫 수도는 한성이었다. 난개발의 결과인지, 서울에는 백제와 관련된 흔적이 얼마 안 남아 있다. 한성 백제를 두고는 그래서 말이 많다. 사찰만 해도 그러하다. 공주 대통사, 부여 정림사, 왕흥사 등 백제는 수도의 경우 성과 함께 사찰을 건립했으나 한성 지역에선 다른 지역과 달리 사찰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아직 발견되지 않기도 했다. 풍납, 몽촌토성의 위치를 감안한다면 사찰의 위치는 여기 아닌 다른 곳이어야 마땅하다. 지금의 암사정수장 근처에 암사라는 절터가 유력하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다. 남아 있는 게 없으므로 마냥 추측하는 게 전부다.

그래도 대성사는 한성 시기의 불교에 대한 추측이 가능한 장소다. 안내 표지판에도 이를 의식한 듯 ‘전통사찰 백제불교성지’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침류왕 시절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마라난타가 풍토병으로 고생하던 와중에 우면산에 대성초당이라 하는 암자를 짓고 물을 마셔 병을 치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문제는 기록이 딱 거기서 그친다는 거다. 대성사에 대한 다음 기록은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와야 만날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셨던 용성 스님이 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1940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지성화에 힘을 쏟았다. 광산업에 참여하는 등 민족경제 자립을 위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하니, 이 인물을 오로지 ‘불교’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았다가는 많은 걸 놓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오른 길을 수월하게 내려왔다. 살짝 훑으며 지나간 예술의 전당으로 회귀했다. 모든 건 정치적이라더니 예술의 전당 건립 또한 그랬다. 아시안게임(1986), 올림픽(1988) 개최 결정이 결정된 1982년 예술의 전당 건립 또한 결정됐다. 1988년 음악당과 서예관을 시작으로 1993년 오페라 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건물이 들어와 지금의 위용을 갖추게 됐다. 나름 지하철 역에서도 멀지 않고 하니 나쁜 위치는 아니다. 그렇지만 강남이 허허벌판이던 시절을 떠올리면 예술의 전당의 위치는 외져도 너무 외진 곳이었다.

오늘날처럼 강남이 번영할 줄 알고 위치를 정하진 않았을 터. 상공부(오늘날 산업통상자원부) 입주를 계획하고 매입했으나 정책의 변경으로 뜻대로 되지 않아 이루어진 일이라는데, 상대적으로 도심에서 떨어진 지역이라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시설의 입점이 가능했으리란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잠시 지나가는 이야기,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는 건축가들이 꼽는 최악의 건물 순위에 늘 오르내리고 있다. 서울시청 신청사가 워낙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어 이를 넘보진 못하는 듯. 요즘 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다.

예술의 전당을 벗어나 반포대로를 따라 걸었다. 드넓은 도로에 가득 들어찬 차량을 보니 8차선 이상의 도로에 붙는다는 ‘대로’라는 명칭이 실감이 났다. 이 길을 따라 열심히 올라가다 보면 경복궁까지도 이를 수 있다던데, 날이 워낙 덥다 보니 상상만으로도 지치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제법 걷다가 횡단보도를 앞두고 멈춰섰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십자가 달린 교회 첨탑이 보여 ‘사랑의 교회’인 줄 알았다. 그보다 훨씬 앞에 놓인 통유리 건물까지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교회 건물의 모양새가 일단 아니었고, 교회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커도 너무 컸기에 차마 교회일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사랑의 교회의 본래 위치는 강남역 근처였다. 명칭 또한 사랑의 교회 아닌 강남은평교회였던 것이 1981년 지금과 같아졌다. 교회 이름이 ‘~의’와 같은 조사가 들어간 건 당대 처음이라고. 사실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도 드문 형태의 교회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도수가 급증함에 따라 새성전의 건립은 불가피했을 터. 오래 전 언론에 일었던 잡음이 떠올랐다. 시세 610억이던 땅을 무려 1136억에 매입했다는 소리가 있었다. 도로 불법 점용 문제는 아마 그보다 더 컸지 싶다. 지상으로 드러난 건물만 해도 규모가 상당하건만, 지하에는 6천 5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강당이 존재한다고. 강당 부분이 도로 영역을 침범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닌 집단이라서 그런지 불법 여부를 다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가 꼬리를 내리는 형국이란다. 종교집단들이 몸집 키우기에 그토록 매달리는 게 그래서만은 물론 아닐 것이다. 충현교회, 광림교회, 소망교회 등 대규모 교회들이 겪은 문제들에 대해 잠시 생각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수령이 900년 이상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향나무 한 그루(일명 ‘천년향’)를 지나치기도 했다. 대로가 뚫리면서 도로 한가운데 홀로 고립되고야 만 나무의 운명이 다소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공간들은 권력의 중심가라 부를 법했다. 대법원과 대검찰청 주변은 워낙 많은 목소리가 결집해 혼란스러웠다. 한 나라의 수장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현수막 메시지를 모조리 이행하다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릴 듯했다.

원래 이 땅은 서울시청을 짓고자 서울시가 계획했던 곳이었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위치와 교환 계약 체결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그 시절엔 전형적인 서울 변두리 지역 마냥 대규모 화훼단지 등이 즐비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남 지역이 오늘날처럼 급부상할 줄 알았더라면 서울시가 왠지 다른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잠깐 들어가 본 골목 안쪽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마도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렸던 영포빌딩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일만의 영, 포항의 포, 두 글자로부터 건물명을 부여받은 이 곳은 이명박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곳이다. 이명박 소유의 이 건물 5층에는 그가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세운 청계재단 사무실이 있기도 하다.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있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등과 함께 묶어 ‘적과의 동침’이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지금은 빼곡하게 사무용 건물이 들어찼지만, 이 일대는 해주정씨 일가가 거주했던 공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은 정역 신도비가 하나 놓여 있었다.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기도 했던 인물이라 했지만 이름 자체가 낯설었다. 원래는 묘도 함께 있었다고 하나 여주로 이장하고 지금은 비만 남아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건물은 해주정씨 소유라 하니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 등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날이 더운데 제법 많이 걸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다리가 조금씩 쑤셔오기 시작했다. 인근에 편의점이 있으면 들러 시원한 생수 한 병 구입하고 싶었건만 골목은 그리 친절하지가 않았다. 한 편으로는 슬슬 끝이 보이는 듯도 해 아쉬움이 들었다.

묵직해진 다리를 이끌고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건물이 여러 동 있는 게 얼핏 보아도 규모가 상당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전형적인 관공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걸 도서관 측도 알아서일까. 건물의 상단에는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글자를 부착해 자신의 정체성이 도서관임을 만천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 향하니 고요한 가운데 담배를 피우던 이들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살핀다. 이토록 많은 인원이, 그것도 주말에 등장했던 게 의아해서였을 것이다. 코로나19 탓에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다지만 굳이 뒤편까지 들어온 까닭은 단 하나, 이곳에 29만원으로 평생을 버티고 있는 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어서다. 원래의 위치는 건물 전면이었으나 역사가 재평가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이를 드러내면 우리는 엄연한 역사의 일부를 잃고야 만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무척이나 북한을 의식하던 시절, 평양에 인민대학습당이라는 대규모 도서관이 건립되자 우리도 이에 버금가는 규모의 도서관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자리는 너무도 접근성이 떨어진다. 몸집을 키우는 쪽으로 치중하다 보니 도서관이 지어진 후에 대해서까지는 충분히 고려치 못했던 모양이다.

서울의 프랑스, 서래마을을 거쳐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이동했다. 서래마을이라 하면 몇 해 전 접한 엽기적인 영아살해사건이 생각난다. 프랑스인 부부는 왜 자신의 자녀를 살해해 냉동실에 넣었던 걸까. 당시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도 서래마을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 서래마을에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1000여명 중 절반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이날 잠깐 머문 공원은 프랑스와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곳곳에 프랑스 국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프랑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조각상 등이 설치돼 있기도 했다. 짙은 프랑스 향기를 느끼기에는 머묾이 너무나 짧았다. 몇몇 이들은 다가오는 점심 식사 시간을 의식한 듯 서래마을 쪽에서 밥을 먹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어느덧 마지막 장소에 도달했다. 지하철을 타고 지나다녀 버릇만 했던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 그것도 옥상을 처음으로 밟았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높이를 자랑하는 아파트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새로이 짓고 있는 아파트가 있어 조금은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집이 널려 있건만 왜 나를 위한 집은 없는 건지. 거주 아닌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한 대한민국의 부동산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옥상은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음식점이 몇몇 보였고, 그 옆으로는 성당도 하나 있었다. 미사가 진행중이어서 경건한 분위기가 살짝 묻어났다. 미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마지막 설명을 들었다. 그야말로 강남은 허허벌판이었고, 여타 시설과 마찬가지로 고속버스터미널의 이전은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소산시키기 위한 방안의 일원으로 행해졌다. 당시에 터미널은 고속버스 회사의 소유였던 듯하다.

서울 시내에만도 7개의 터미널이 존재했다는데, 과연 그만큼의 버스 탑승 수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마당이므로 현 위치는 버스 터미널로 각광 받을 법했다. 그러나 이미 특정 장소에 어느 정도 터를 닦은 버스 회사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가며 터미널 이전에 협조할 리는 없었다. 결국 1977년 행정명령이 발동함에 따라 울며겨자먹기로 터미널의 강남 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터미널 근처에 존재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보니, 1985년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민원이 빗발치는 결과만을 낳았다. 또한 상대적으로 전라도 방면으로 가는 노선이 부재함에 따른 갈등도 치솟았다. 많은 부분이 그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러나 지역 갈등은 여전하며, 이는 좁디좁은 서울 안에서도 극심하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세월이 생각보다 긴 듯했다.

가뜩이나 비상함과는 거리가 먼 머리가 체력에 부담이 더해지니 회전을 멈추었다. 고로 나름 애썼음에도 들은 내용의 일부는 망각의 늪으로 이미 사라졌다. 지금은 내가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잊었는지 분간조차도 힘든 형국이다. 지식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가 잊은 게 무언지를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이 고맙다.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던 건 나의 강남, 정확히는 서초 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오래 전엔 사람 하나 살지 않는 허허벌판에 불과했으나 나날이 팽창하는 서울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필요에서 개발된 곳 즈음이라고 생각해 온 게 전부였다. 그들이 지닌 부유함이 부러웠고,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경쟁이 부담스러웠다. 동시에 내가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도 서초를 비롯한 강남 지역에 진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는 데서 비롯되는 소외감도 상당했다. 지금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 서초의 옛 마을 명칭이자 현재 서초구가 매년 개최하는 축제의 이름이기도 한 '서리풀'은 국일천 물이 풀과 맞닿아 맺히는 서리를 의미한다. 유유히 한강을 향하다가 잠시 풀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물방울을 떠올리니 이유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서초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서초 또한 사람 사는 고장이었다.

전수정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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