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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성공회·구세군 서울 첫 둥지 정동 일대 답사 [문화지평 아카이브]

기사승인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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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20. 6. 6.(토) 10:00~13:00
■ 장소 :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코스 : 서울도시건축전시관-대한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정동제일교회-덕수궁 중명전-손탁호텔 터-구 러시아공사관-구세군중앙회관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 2회차 답사가 지난 6월 6일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중구 정동지역에 몰려 있는 성공회, 개신교, 구세군 종교 건축물과 근대건축물, 대한제국과 근현대 역사를 아울러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문화지평 답사팀은 6일 오전 10시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앞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 참석했으나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준수하면서 정동 일대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이날 답사는 해설 포인트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감성이 묻어 있는 답사기로 나눠 기록했다.

성공회란?

1054년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기준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뉜다. 서방교회는 중세를 거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다시 큰 분열을 겪는다, 이때 서방교회는 천주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으로 분열된다.

성공회는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한다. 성공회 측은 “우리는 이 분열의 이유와 역사를 잘 알고 그 분열의 창조적인 의미와 더불어 그 아픔과 한계를 늘 인정하고 되새기는 교회”라고 했다. 가톨릭 계열 단일 교단으로써 세계성공회는 천주교와 러시아 정교회 다음으로 교세가 크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과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C.S.루이스, 미국의 유명 배우 로빈 윌리암스가 성공회 신자이며 데스몬드 투투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는 인종분리정책 반대운동을 주도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의 성공회는 1889년 11월1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조선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고요한 주교 일행은 이듬해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후 11월에 정동 현 위치에 교회용 한옥과 부지를 매입했다. 당시 부지에는 왕족과 명문가 자제들 교육기관인 수학원이 있었다.

12월에는 기존 한옥건물을 ‘장림성당’으로 명명하고 첫 성탄절 감사성찬례 봉헌했다. 1891년 11월 1일 정기적인 주일 감사성찬례를 시작했는데 이를 교회설립 기념일로 삼고 있다. 1892년 11월 27일 전통 한식 교회건물 신축하고 ‘장림성당’으로 축성식을 했는데 후일 주교좌성당의 전신이 됐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주교가 된 것은 해방된 지 20년이 흐른 후였다. 1965년 이천환 주교가 서품을 받고 조선교구는 서울교구와 대전교구로 발전적 분할을 하면서 관구로 독립했다. 다시 1974년에 대전교구는 대전교구와 부산교구로 분할, 대한성공회는 현재의 3교구 체제다. 3개 교구는 각각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발전과 사회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전국에 100여개 교회, 약 5만명의 신자가 있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한국적 요소 가미는 ‘근거 부족’

▲ 서울시청 본관 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2015년 남대문세무서 별관이 철거되면서 대로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됐다. 철거된 자리에는 서울도시건축전시장이 지하로 들어섰다.

이 건물은 긴 십자형 평면으로 한국 로마네스크양식 교회건축을 대표하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성당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 교회 건축물은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서울주교좌성당은 크게 두 번의 공사에 걸쳐 완성된다. 1910년에 건축을 결의한 후 1922년에 착공했고 1926년 5월2일에 축성했다. 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의 10년간 구상과 모금에 힘입은 그의 마지막 산물이다. 설계자는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아더 딕슨, 감독자는 레슬리 브룩스였다.

원 설계도에는 하나의 성가대석, 7개 주간의 신도석과 통로, 양 날개부로 설계됐다. 그러나 20년대 준공 당시는 3개 주간의 신도석과 통로부, 양 날개부 일부, 지하 현실(玄室)만 건립됐다. 전체적으로 원 설계도의 50% 정도였다.

1991년 성공회 성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을 증축하고자 했으나 설계도가 없었다. 1993년 한 영국 관광객이 그가 근무하는 렉싱톤도서관에 보관된 아더 딕슨의 원 설계도를 극적으로 찾아냈다. 원 설계도에 따라서 두 번째 공사(1994~1996년)는 광장건축의 건축가 김원이 실시설계를 했고 대우건설이 시공했다.

주교좌성당에 대한 해설사들의 해설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한국적 건축미’의 가미다. 기와지붕과 처마장식, 창살, 심지어 스테인드글라스 오방색까지 끌어 온다. 김정신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건축양식과 그리스도교 빛의 미학’에서 서울주교좌성당의 처마장식, 창살문양, 기와지붕,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방색 등이 한국 전통건축 요소를 섞어 쓴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 ‘영국인 트롤로프 신부와 성공회 건축’에서 3대 주교 트롤로프와 성공회 건축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소개하면서 정통적인 서양건축양식의 소개와 교회 건축의 토착화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성공회 신학자 이정구는 ‘한국 성공회 교회건축과 그 신학’ 논문에서 한국 성공회 교회 건축 변천의 특징을 고찰하면서 ‘한양 절충 양식을 교회 건축 토착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은데, 한국 성공회 교회 건축에서는 한양 절충식의 단계 없이 서양식 교회 건축 양식이 도입되었고, 가톨릭이나 개신교와는 달리 교회 건축의 토착화 단계가 상실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성공회 선교 초기의 교회 건축물은 서양의 예전(禮典)을 토속건물에 담아 사용하는 한옥 건축물일 뿐 토착화된 건물이라고 볼 수 없고 강화성당도 당시의 보편적 건축 재료를 사용한 것이지 절충 양식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정구는 후속 연구인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에서 ‘이 건축물은 영국 미술공예운동의 한 줄기가 한국에 유입된 경로와 산물이며 서울주교좌성당 건립의 결과로 한국 성공회는 토착화의 기회를 상당 기간 놓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한국적 건축미가 가미된 것이 아니고 아더 딕슨의 미술공예운동 영향 때문이란 주장이다. 실제로 아더 딕슨이 1911년 지은 성 바실교회와 주교좌성당 외관은 닮은 구석이 많다. 한국식이었다는 지붕기와 사용, 처마장식 등이 이미 성 바실교회 건축에서 보여준 것과 흡사하다.

지난해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때 주교좌성당에 대해 문화지평 기록한 ‘한옥 건축 양식인 처마 서까래 형태와 기와를 사용해 한국인들에게 친근감을 준 게 특징이다’도 수정을 가해야할 상황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아더 딕슨 입장에서 굳이 한국 건축을 부분으로 채택할 동기가 없어 보인다. 발주자 역시 별 의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정동제일교회, 착한 교회건축의 표본

▲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답사팀이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1897년 완공한 서울의 개신교 첫 교회 건축물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7년 9월 현재의 정동자리에 있는 초가집을 구입해 베델이라 이름 짓고 교회를 세운 게 시작이다. 10년 후인 1895년 8월 같은 자리에 새 교회를 착공, 1897년 완공했다. 건물은 길이 23m, 폭 12m, 높이 7.5m이고 종탑은 15m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고딕양식을 따랐다. 정동제일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의 정원주택 형식의 간결하고 소박한 외양을 견지했다. 고풍스런 적벽돌을 사용한 본당은 1926년에 일부 증축한 것이다.

개항기, 열강들은 수교 후 가장 먼저 공사나 영사를 들여보냈고 뒤이어 종교, 학교, 의료 등이 앞다퉈 들어오거나 아예 세트로 들어왔다. 이유는 종교만으로는 척박한 조선의 포교 환경을 헤쳐 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시혜성이 강한 의료와 교육을 적절히 앞세웠다. 감리교는 정동의 랜드마크 같은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스크랜턴 부인은 이화학당을 만들어 근대교육의 불을 지폈다.

아들 스크랜턴은 감리교 의료선교 담당자로 시병원과 최초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다. 스크랜튼의 한국이름은 시란돈(施蘭敦)이라서 고종은 시병원으로 병원이름을 하사했다. 보구여관은 여성병원의 명성을 이어받아 이대의료원의 모체가 됐다. 그 사이 장로교는 포교활동에 집중해 감리교와 비교가 되지 않는 교세를 일궜다.

우리나라 개신교 중 일부 교회는 대형건축을 통해 교세를 자랑한다. 낮은 데로 임해야 하는데 자꾸 바벨탑을 쌓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동제일교회 근처 새문안교회가 최근 지은 대형교회이고 서초역 사랑의교회는 위법적인 부분이 있다고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에 반해 정동교회는 새로 신축한 건물도 기존 낮게 지은 본당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비슷한 색깔의 적벽돌을 사용하고 키도 맞췄다. 1979년 선교100주년기념 예배당, 1990년 선교100주년기념 사회교육관 등을 신축하면서 어느 건물이 나중에 지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한 건축방식을 택했다. 정동교회는 ‘착한 교회건축’의 방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정동제일교회에는 국내 최초 파이프오르이 있다.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미국 유학생이면서 학사학위를 받은 교육자가 기부한 것이다. 김란사는 인천별감 하상기의 후처가 된 후 신교육을 받기 위해 이화학당을 찾았다. 기혼이란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지만 집념을 가지고 학교 측을 설득해 끝내 입학 했다.

김란사는 이화학당 시절 란사(낸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년간 일본 동경의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후 선교사들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시 소재의 웨슬리언 대학에 입학해 1906년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한 김란사는 1911년 이화학당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임용된 신여성이다.

중명전, 을사늑약의 공간 역사교육장 탈바꿈

▲ 중명전은 덕수궁의 왕립도서관인 수옥헌이었다. 중명전은 1905년 친일파가 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등이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다.

정동(貞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인 정릉이 있었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와 사이에 방번, 방석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방석은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로 책봉됐다. 첫째 부인 한 씨의 다섯 번째 아들인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숙적 정도전은 물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을 모두 제거했다.

신덕왕후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396년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돼 병을 얻어 죽었다. 처음엔 현 주한영국대사관 또는 러시아공사관 부근에 능역이 조성됐으나 도성에 왕릉을 쓸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1409년 도성 밖 자리인 성북구 정릉으로 옮겼다. 신덕왕후와 대립했던 방원(태종)의 명분 있는 복수였다.

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능은 묘로 격하시켰다. 정릉 일부 석조물은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 기반석 등으로 갖다 썼다. 신덕왕후는 200년이 지난 후에야 송시열의 상소로 복위됐다. 이후은 잊혀진 공간이었다가 15세기 말 월산대군이 사저를 지어 살았고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을 했던 선조가 돌아왔으나 법궁이 불타 없어진 관계로 이곳을 행궁으로 삼으면서 왕의 공간이 됐다.

정동지역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도심 내 외국인 거주를 허락하면서부터다. 고종은 1880년 초까지 외국인들이 4대문 안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빗장을 열자 외국 공관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공사관이 1883년 생겼다.

188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으로 설정했다. 조선과 접촉하기를 원하는 서구의 압력으로 외국 사절단 수가 증가하자 고종황제는 제한을 완화해 정동지역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도록 했다.

중명전, 정관헌, 구성헌 등 양관들이 궁안에 건설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었다. 그리고 1900년에는 본격적인 격식을 갖춘 양식건물인 석조전 공사가 시작됐다. 궁궐 내에 여러 채 양관들이 세워진 것은 대한제국이 근대적인 국가임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덕수궁은 세 번에 걸쳐 불이 났다. 치명적 피해를 입은 것은 1904년 일본인들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다. 이때 덕수궁 내전은 거의 불에 탔다. 피해를 피한 것은 양관인 돈덕전과 구성헌이었다. 고종 황제는 화재가 나자 거처를 중명전으로 옮긴다. 중명전은 1905년 친일파가 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등이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다. 중명전 내부에는 당시 강제 늑약 장면을 담은 정밀한 밀랍인형이 전시돼 있다.

손탁호텔 터, 고종이 하사한 땅에 들어선 호텔

▲ 옛 손탁호텔 모습. 이화여고는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소실됐다.

이화박물관 앞 주차장 입구에는 손탁호텔의 표지석이 있다. 러시아 공사관 수석통역관이었던 앙뚜아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이 지은 호텔이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출생지인 알자스로렌이 독일로 병합되면서 독일인이 됐다.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입국했다. 경복궁의 양식요리사로도 일하고 명성황후와도 친분이 있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덕수궁 근처 황실 소유 가옥과 부지를 하사 받았고 1902년 2층 25개 객실 규모의 호텔을 지어 지배인이 된다. 주변에 구미 공관들이 즐비하던 시절, 손탁호텔은 또 하나의 외교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명전 맞은편에 위치한 터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기다렸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고종이 하사한 땅에서 이토가 나라를 빼앗기 위해 기다리는 부조리와 아이러니의 장소, 구한말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은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묵은 적이 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말경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 종군기자로 특파된 처칠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만주로 취재를 가는 도중 하루를 손탁호텔서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손탁호텔은 손탁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화여고에서 사들였다.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소실됐다.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 가장 좋은 전망에 위치

▲ 답사일에는 구 러시아공사관이 망루 보수공사 중이라서 외부에 천막이 쳐 있었다. 문화재인 관계로 한식목공, 한식미장고 등 수리기능자가 일을 하고 보수기술자가 현장을 감독한다.

민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득세로 신변이 불안했던 고종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과 측근 세력은 정동 외국공관으로의 이어(移御)를 구상했다.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1월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친미, 친러 세력인 ‘정동파’ 관료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도피시키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춘생문사건이 실패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 스페이어와 접촉해 1896년 2월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다. 이완용 등이 도왔다. 이완용은 친미파였다가 아관파천 당시는 친러파로 말을 갈아탔고 나중에는 친일파가 되는 처세의 달인이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각지 광산채굴권 등을 헐값에 넘겨받았다. 다른 열강들까지 은근한 압력을 가하자면 경인선,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을 싸게 불하받았다. 구한말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공사관은 정동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에 자리 잡은 크고 웅장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고종이 안전을 도모하기 좋은 장소였다. 탑의 동북쪽 지하실은 경운궁과 연결되어 있어 고종이 유사시 러시아에 의지하기 위한 도피 경로로 만들어 놓았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세워진 것은 여러 설이 있지만 1890년으로 정리된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이 정리한 ‘외교사연표’에는 ‘현 러시아공사관의 정초석을 놓은 것은 1890년 8월 30일’이라고 적고 있다.

1년여간의 러시아공관 생활 후 고종은 경운궁을 새 거처로 선택해 환궁했다.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은 개항 이후 1880년대부터 일관되게 개화정책을 추진해 왔고 광무 연간을 전후로 ‘광무개혁’을 펼쳤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새로 조성된 고종의 길로 들어서면 구세군중앙회관에 바로 다다를 수 있다. 중간에는 조선저축은행 중역이 살던 집과 정원 터, 대문 기둥이 남아있다. 대문 기둥에는 흰돌로 된 문패가 걸려 있었으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구세군중앙회관, 신고전주의 충실 좌우대칭 조화

▲ 구세군중앙회관은 벽돌조의 지상 2층으로 1928년 건립 당시부터 1989년까지 구세군의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됐다. 이후 구세군 대한본영 사무실 일부가 입주하면서부터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정동1928아트센터’가 됐다.

구세군중앙회관은 벽돌조의 지상 2층으로 1928년에 완공됐다. 한국 구세군의 본관으로 사용되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 구세군의 중흥기인 근대화 과정까지 한국 구세군의 혼과 정신이 뿌리 깊게 배어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정동1928아트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건립 당시부터 1989년까지 구세군의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됐다. 1959년 1·2층 일부를 증축하고 강당 천장을 높이는 공사가 시행된 후 구세군 대한본영 사무실 일부가 입주하면서부터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불리게 됐다.

그래서 지난 2006 2월 지정명칭을 ‘구세군본관’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건물의 공식적 이름이 되어온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변경했다. 건립연대도 건물 신축 검토가 시작되는 1926년이 아니라 실제 준공연대인 1928년으로 변경했다.

좌우대칭으로 된 안정된 외관과 현관 앞에 배치된 거대한 기둥, 구세군사관학교가 명시되어 있는 정면 중앙 상부의 박공, 목조의 짜임 등 건물의 세밀한 부분이 조화를 이룬다. 벽돌조의 외관과 중앙 현관의 4개의 기둥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충실히 반영돼 있다는 평가다. 세부적으로 개조된 부분이 있고 건물 뒷면은 증축되었지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관의 4개의 기둥과 지붕이 당당한 인상을 주는 건물로, 현관 쪽의 바닥은 물갈기 슬래브이나 복도 및 계단 난간은 목조로 되어 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집회·예배당이 있었고 목조 트러스가 이색적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이 건물 건립은 당초에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 대장의 아들이자 구세군 만국본영 제2대 사령관인 브람웰 부스 대장(1856~1929)의 칠순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국구세군 대표단은 1925년 12월부터 6개월간에 걸쳐 캐나다와 미국 등지를 순회하면서 기금을 모은 결과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졌고, 7만원을 들여 지었다. 구세군중앙회관 중앙현관 좌우벽에 부착되어 있는 대리석 돌판에서 적혀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차 건물(此 建物)은 주강생 일천구백이십육년(主降生 一千九百二十六年) 대장(大將) 뿌람왤 뿌드 씨(氏)의 만칠순 생신기념(滿七旬 生辰紀念)으로 재미국구세군사관병사급친우(在米國救世軍士官兵士及親友)의 의연금(義捐金)으로 건축(建築)한 바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며 여러 영혼(靈魂)의 구원(救援)을 위(爲)하야 봉헌(奉獻)함.’

한편 한국 구세군은 허가두가 1908년 10월 한국 땅에 들어와서 개척했다. 그의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안착돼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구세군 정신은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1829~1912)의 정신이다. 그는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인류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왔다.

창립자 부스 옆에는 그의 신앙 성숙을 위해 도움을 주었던 존재가 있는데 그가 바로 웨슬리(1703~1791)이다. 구세군 신앙의 도움은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부스는 어린 시절 영국 노팅엄 있는 감리교회에서 회개했고 그 후 감리교 목사가 됐기 때문에 신학적 뿌리는 대부분 감리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참고문헌>
-대한성공회홈페이지, 대한성공회 진천교회(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세군중앙회관(두산백과)
-‘20세기 초 성공회의 강화성당과 서울주교좌성당의 설계와 건립에 관한 연구 :성공회 사제 M. N. 트롤로프의 건축 활동을 중심으로’, 강영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2017
-‘성공회 서울 대성당’, 김정신, <월간 건축문화>(월간 건축문화사, 1984), 제41호, 65쪽, 72쪽
-‘한국 성공회 교회건축과 그 신하, 이정구, 「성공회대학논총」 (성공희대학교, 1999), 제13호, 127 140쪽.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이정구, 「교회사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제16호, 166-167쪽, 180쪽.
-‘도심 속의 섬 정동의 열림을 통한 소통의 제안’, 전현주,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2002
-러시아공사관(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 구세군의 사회구원활동 및 신학 : 일제 시대를 중심으로’, 양윤석. 계명대학교 대학원, 2016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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