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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대장이 아닌 미국인 여인을 쏜 황포탄 사건 [김문 작가]

기사승인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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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일본군 대장이 아닌 미국인 여인을 쏜 황포탄 사건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1922년 3월28일 나는 부두가 잘 보이는 둔덕길에 서상락, 강세우 동지와 함께 자전거를 하나씩 끌고 나갔습니다. 거사에 세 동지가 위급해지만 자전거를 넘겨주려고 했습니다. 배가 들어오고 황포탄 부두에 접안했습니다. 이윽고 다나카가 사다리로 내려왔습니다. 이를 보던 오성륜이 다가가 권총을 쏘았습니다. 세발의 총성이 울렸는데 그 순간 금발의 여자가 갑자기 조준선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나카의 모자가 해풍에 날리자 잡으려고 한 것 같았습니다. 총알은 금발의 여자가슴을 관통했습니다. 실패한 것이지요. 그러자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두발을 쏘았는데 불행하게도 그의 모자를 꿰뚫었습니다. 다나카는 자동차 안으로 뒤어들었고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나가 차량을 향해 포탄을 던졌으나 불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곳에 서 있던 미군 해병이 이를 발길질로 바다로 차버린 것이었습니다. 거사에 가담했던 세 동지 중 이종암만 부상했고 나머지 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종암 입고 있던 외투를 재빨리 벗어던지고 군중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고 달아나던 두 동지는 포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둘은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인도되어 왜적의 심문을 받았고 이때 김익상이 총독부 폭파사건의 진범인임이 드러났습니다. 김익상은 사형을 언도받은 뒤 20년 형으로 감형되어 긴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지만 한 형사가 찾아와 그를 데리고 간 뒤 김익상의 소식은 영영 끊어졌습니다. 아무래도 김익상은 악독한 놈들 손에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오성륜은 어떻게 됐나요.

“황포탄 사건 이후 신문들은 약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비밀결사 의열단 멤버들이며 다나카 대신 총을 맞은 여인은 미국에서 신혼여행을 온 스나이더 부인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의열단원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한달 후 상하이로 갔을 때 오성륜이 탈옥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탈옥 열흘이 지난 그는 의열단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군 장교의 복장을 하고 천진을 거쳐 봉천으로 갔습니다, 6개월이 지나 길림에서 오성륜을 만나 자초지종 듣게 됐습니다. 그때 오성륜은 다나카 놈에게 명중시킨 것으로 알았다며 죽은 미국 여인의 남편이 유치장으로 면회온 얘기를 했습니다. 아내에게 실수로 총을 쏜 사람은 조선의 독립투사임을 알고 면회 와서 조국 독립을 위해 총을 쐈으니 미워하지 않는다며 기회가 오면 조선의 해방운동을 돕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오성륜은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습니다.”

헝가리 사람 폭탄 제조자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암살과 파괴계획이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지만 결국 의열단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겠네요. 특히 일제 관헌은 단장 약산을 붙잡으려고 더욱 혈안이 됐겠습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에도 ‘단원의 한계가 심히 명료하지 않다. 보기에 따라서 재중국 한인 독립운동자들은 거의 의열단원인 것 같이 고찰되나 또 일면으로 보면 김원봉 1인의 의열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열단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단장 김원봉뿐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황포탄 계획도 그렇고 실패한 원인 중에는 폭탄 제조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좀더 성능이 좋은 포탄이었다면 위력이 더 컸을 것이고 세밀하게 제조했더라면 불발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열단이 사용한 폭탄이나 권총은 의열단 창단 이전부터 스스로 배우고 익힌 것들입니다. 그러던 중 1921년 6월부터 영국인 코브럴로부터 폭탄제조 밥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1922년 봄에는 외몽골의 이태준을 통해 헝가리인 마쟐을 초빙해 상하이와 프랑스 조계내에 폭탄 제조소를 설치했습니다. 상하이에는 12군데 비밀 제조소를 만들어놓았습니다.”

-헝가리인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됐습니까.

“내가 다음 계획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폭탄 제조기술을 향상시켜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뜻하지 않게 이태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경성에서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사람인데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김규식, 유동열과 함께 외몽고 고륜(庫倫)으로 가서 개업을 했고 나중에 왕궁에 출입하는 주치의가 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지사 활동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고륜에 들어가 있으면서 동지들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는 자금 수송도 맡았습니다. 그런 그가 북경에 왔을 때 아는 지인의 소개로 그를 요정에서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태준에게 의열단의 목표와 활동을 설명했지요. 그는 즉석에서 의열단 가입을 희망했습니다. 그때 폭탄 제조를 위해 우수한 기술자를 찾고 있다고 하자 그는 헝가리인 마쟐을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마쟐을 데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이태준은 외몽고에 가서 마쟐을 데리고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태준은 오는 도중 소련 혁명군에 속에 끼여 있던 일본인에 의해 희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태준과 함께 북경으로 오던 마쟐은 어렵게 북경으로 와서 나를 만나게 됐지요. 그는 우수한 기술자일 뿐 아니라 열렬한 혁명사상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며칠 후 마쟐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 적당한 곳을 정했습니다. 폭탄은 순조롭게 제조되는 것을 보고 나는 북경으로 갔습니다. 다음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지요.”

-단재 신채호를 만난 것이 이때였습니까.

“북경길에 가장 큰 기쁨은 단재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단재는 누구나 다 아는 사학계의 태두로 왜적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을 떳떳하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단재가 임시정부에 몸담고 있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단재는 이승만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끊고 북경에 머물면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단재의 숙소인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으로 찾아가자 단재는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나는 암살과 파괴만이 능사가 아니라 선전이 뒤를 뒤를 따르지 않을 때 일반 민중은 행동에 나타난 폭력만 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생각에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해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단재를 찾았습니다. 며칠 뒤 나는 단재를 상하이로 초청했습니다. 왜적을 무찌를 폭탄을 제조하는 보여준 뒤 ‘의열단선언’을 써달라고 부탁했지요. 흔쾌히 승낙한 단재는 상하이에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돌아본 뒤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의 불후의 명작인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집필했습니다. 단재의 민족혼과 의열정신이 담겨진 내용에 의열단원들은 감격했습니다. 나는 이후 의열투쟁에 ‘의열단선언’을 살포하라고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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