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tbsTV 화면 캡처

재벌기업회장의 이상한 방문

1963년 9월,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등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고조될 무렵 김희덕 장군은 최고회의 외무, 국방위원장에서 재경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모기업 회장이 인사차 찾아왔다. 당시 재경위원장의 위치면 국내 재벌은 물론 경제계를 주무르다시피 했다.

김 장군이 모회장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모회장은 인사를 건네는 자리에서 “위원장님, 위원장님은 저희와 사돈지간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어째서 사돈이오?”
“제 부인이 위원장님과 동성동본입니다.”
김 장군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사돈이 재벌이니 든든하구만요.”

둘 사이에는 재계의 돌아가는 분위기 등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 그러던 중 모회장이 또 하나의 질문을 불쑥 던졌다. 자신의 그룹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김 장군은 “맞아요 한 사람이 있지요. 이모대령이오.”라고 말했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부정축재자 재산몰수와 환수 등으로 거둬들인 돈 약 10억원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돈을 관리하고 있다고 김 장군은 말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의장의 지시로 울산 지역에 대규모 제철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박 의장은 당초 경북 포항이 아닌 울산에 제철공장을 세우려고 했다. 모그룹은 맡은 그 돈의 이자를 유용할 수 있고 최고회의측에서는 10억원의 돈관리를 감독하기 위해 군 고위장교를 모그룹에 파견했다.

이 날 둘의 만남은 그쯤해서 끝났다. 그런데 며칠 뒤 이모 대령이 김 장군을 찾아왔다. 김 장군과 만났던 모회장이 정치자금 3천만원을 꼭 김 장군을 통해서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김 장군은 일단 거절했다. 자금지원을 하고 싶으면 공화당 사무총장이나 누굴 만나서 모회장이 직접 내면 될 것이지 왜 자신을 통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됐다. 그 다음 날에도 이모 대령이 다시 찾아와 모회장의 뜻을 간곡히 전했다. 할 수 없이 김 장군은 박 의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의장 각하, 모회장이 정치자금 3천만원을 내고 싶어하는데 돈이 좀 필요합니까?”
“거 잘 됐소. 출장도 다녀야 하는데 돈도 없고 말이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 장군은 이모 대령을 돌려보내면서 정치자금 3천만원을 기꺼이 받겠다고 말했다. 그 대신 장경순(張坰淳) 공화당 사무총장한테 직접 갖다주라고 일렀다. 김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박 의장 비서실장한테도 귀띔해주었다. 그런데 선거날짜가 임박해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답답한 김 장군이 모회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 사진=EBS 화면 캡처

박 의장 정치자금 약속 어긴 기업에 진노

1963년 10월15일 민정이양을 위해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 의장은 상대 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 되었고 3일 뒤 김 장군은 장래 정국 구도를 전망하며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재경위원장 집무실은 박 의장 집무실 바로 옆에 있었으며 전화통화 내용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박 의장 집무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정치자금은 김 위원장을 거쳐서 내라고 했기 때문에 안냈습니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도 정치자금을 내놓으면 7할은 중간에서 착복되곤 했습니다.”

분명 모회장의 목소리였다. 엿듣고 있던 김 의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옆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김 장군은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다. 김 장군의 얼굴은 노기로 가득차서 특유의 큰 목소리를 내뱉으며 모회장을 죄인 다루듯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두고 여우라고 하지. 언제 내가 3천만원 내라고 했소. 찾아올 때는 언제요? 이제 가만 보니까 재경위원장인 나에게 낚시밥을 던졌구만. 나는 말야 단 한푼도 떼먹는 성격이 못돼. 생각 잘못했어. 우리나라 재벌들은 말야 95%가 공무원을 매수해놓고 살살 돈이나 벌려는 아주 악질 여우들이야. 내가 본때를 보여주지.”

김 장군은 허리에 찾던 권총을 꺼내들면서 “나쁜 짓하는 사람은 이 방법밖에 없어.”하고 총구를 겨눴다. 그러자 모회장은 몸을 벌벌 떨며 굳은 듯 꼼짝없이 섰다. 그 자세에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너같은 놈 죽이고 내가 굳이 형무소에 갈 필요없지.”하면서 헌병을 불러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 직후 김 장군은 곧 박 의장 집무실로 들어가 자초지종 보고했다. 박 의장은 사전에 알고 있는 터였다. 결국 모회장의 술수를 알게 된 박 의장은 진노하면서 “김 장군이 알아서 압박을 하시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럴 즈음 김 장군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모그룹의 뒤를 봐주게 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됐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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