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이하 픽사베이.
출처=이하 픽사베이.

[미디어파인=정지윤의 청춘 넋두리] 학교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영어 학원, 수학 학원 차에 바쁘게 오르는 동안 나는 동네 슈퍼마켓 옆 작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간다. 신발을 벗고 조금은 투박한 문을 드르륵 열자 마자 먹 냄새와 뭔지 모를 풀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들어온다. 익숙하게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학원 안으로 들어가자 화초가 눈에 들어온다.

원장 선생님이 애지중지 키우는 큰 화초는 오늘도 변함없이 약간의 물을 머금고선 싱그럽게 뻗어 있다. 나는 늘 첫 번째로 그래 왔듯이 그 화초와 눈 맞춤을 하고 방에 들어와 사자소학(四字小學) 책을 꺼낸다. 오늘 할 부분을 공부하고 있으니 원장 선생님이 들어와 내 옆에 앉아 가르쳐 주신다.

선생님은 항상 적갈색 생활 한복을 입으셨다. 얼굴에 핀 주름과 약간 까만 피부 때문에 한복을 입으신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나무 같기도 하였다. 아니, 실제로 선생님은 나무였다. 한자와 부수를 쓰고 익히는 시간을 마치면 사자소학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필체가 묻어 나는 사자소학 책을 보면서 따라 읽고 같이 해석하였다.

한 자, 한 자 붓으로 섬세하게 그린 한자들은 당시 어린 내가 보았을 때도 일반 한자 책에 인쇄된 것과는 무언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님은 한자를 외우는 것만큼이나 쓰는 법에 대해 유독 엄격하셨다. 한자 학원에서의 수업은 항상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고전 시를 배울 때든, 고사성어를 배울 때든 선생님은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들, 고전 시에 얽힌 이야기들, 두보와 이백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듣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끝나 있었다. 유독 말이 없는 아이였던 나는 잠자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선생님은 머리맡에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나보다 더 즐거워하시며 얘기를 들려주셨다.

한자 학원에서 나는 특유의 먹 냄새와 화초 냄새가 더해져 그 이야기는 더욱 감칠맛이 났다. 어린 시절 나는 몽롱하게 이야기에 취해 고목나무 같은 원장 선생님의 그늘 아래 오후를 보냈다. 학생이 별로 없었기에 가끔 서예도 배웠다. 그때 처음 먹을 갈아 보았는데 선생님이 틈 날 때마다 먹을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기서 풍겨 오는 냄새와 소리가 좋았다.

가끔 떠들썩한 애들이랑 같이 배운 적도 있는데 그때는 딱 말썽꾸러기 애들이 모여 있는 서당 같았다. 선생님은 화를 잘 안 내시던 분이었지만 가끔 도가 지나치면 매를 들었다. 매로 금세 조용해지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3년을 한자 학원에 매일 가다시피 하다가 자격증을 다 따고 한그만두었다.

중학생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종합 학원에 등록하였지만 2달도 채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수학 학원도 다녀 보았지만 역시 두 달 이상을 가지 못했다. 내가 다닌 한자 학원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와 압박감에 나는 적응을 못 하였다. 철저하게 성적 등급을 나눈 반들과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부하는 또래들에게 나는 괴리감을 느꼈다.

그저께도 나는 어김없이 중국어 수업을 듣기 위해 306호 강의실에 갔다. 처참한 전공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학점 복구의 수단으로 선택한 이중 전공이다. 늘 그래 왔듯 피곤한 기분으로 교수님이 컴퓨터로 빠르게 입력하는 중국어를 그대로 받아 적는다. 스크린 속 깜빡이는 한자가 너무 딱딱하게 느껴진다.

고전 시를 배우는 차례가 오고 교수님은 빠르게 해석하고 문법적으로 짚어 준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나는 해석을 받아 적지 못하고 교수님을 쳐다보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당황한 나는 고전 시를 다시 살펴본다. 어딘가 익숙하다. 8년 전 한자 학원에서 배웠던 시 같다. 족히 몇십 분은 걸려서 들었던 복잡한 사연이 있었던 시 같은데 5분 만에 해석은 끝난다.

원장 선생님이었다면 또 즐겁게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겠지. 문득 선생님이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진다. 아직도 먹을 가시면서 몇 안 되는 애들을 가르치고 계실까? 아니면 학원을 안 하신 지 오래 되었을까? 여전히 아이들에게 길고 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상상을 하니 그립다.

한자 학원에 가고 싶어졌다. 문을 열자 마자 풍겨왔던 향긋한 먹 냄새와 선생님이 키우시던 큰 화초, 나른한 오후 햇살을 입고 들려 오는 고전 이야기. A를 받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한자가 좋아 시를 해석하던 어린 시절의 나. 그때를 회상하다 보니 그 곳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더듬더듬 시를 읽는 소리와 옆에서 조용히 선생님이 먹을 가는 소리가 들리던 그곳.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