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벌새’(김보라 감독, 2019)는 국내외 유력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을 알린, 독립영화계의 샛별 같은 감독의 탄생을 포고한 작품이다. 1994년. 은희(박지후)는 곧 대학에 진학하는 대훈, 여고생 수희, 그리고 부모와 함께 서울 변두리 허름한 아파트에서 사는 감수성 강하면서 평범한 여중 2년생.

부모는 떡집을 운영하며 바쁘게 산다. 아빠는 착하지만 다소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면이 있다. 엄마는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많이 배우지 못했다. 부모의 관심은 장남에게 편재돼있고, 그런 오빠는 무시로 은희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만 은희는 속절없이 그걸 감내할 뿐 저항할 엄두를 못 낸다.

은희의 단짝은 한문 학원에서 만난 타교생 지숙. 동급생 남자 지완과의 사이도 좋았지만 지완은 어느 날부터인가 호출해도 연락을 안 하더니 다른 소녀와 만난다. 1학년 유리가 은희를 짝사랑한다며 다가오고, 그렇게 그녀와 묘한 관계를 지속한다. 서울대 휴학생 영지(김새벽)가 새 한문 선생이 된다.

은희는 지숙과 콜라텍과 노래방을 다니고 담배도 피워 본다. 아무 생각 없이 문구점에서 절도를 했다가 들키자 점주가 아빠에게 이를 알림으로써 지숙과의 사이가 멀어진다. 어느 날 귀 뒤에 혹이 생겨 안면 마비의 위험을 무릅쓰고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한다. 영지가 지숙과의 화해를 주선해 준다.

이제 은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영지다. 그러나 한문 학원의 선생이 교체된다. 원장에게 영지의 무선호출기 번호를 묻지만 그런 것 없다고 한다. 은희는 영지가 짐 싸러 온다는 시각을 잘못 알려 줘 그녀를 만날 기회를 무산시킨 원장을 원망하지만 소용없다. 영지 명의의 소포가 온다.

은희의 일상은 잔잔한 편. 큰 사건은 없지만 자잘한 사건과 사고들이 주변을 감싼다. 제목처럼 그녀는 살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벌새처럼 부단히 날갯짓을 해댄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다. 감독은 노골적으로 헤르멘 헤세의 ‘크눌프, 그 삶의 세 이야기’와 스탕달의 ‘적과 흑’으로 은희를 그린다.

14살에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상처받은 크눌프의 삶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이나 친구의 우정은 영원한 게 아니므로 결국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내용과 은희의 14살은 매우 닮았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은 빈한한 평민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잘생긴 외모와 부푼 야망으로 인생 역전을 꿈꾼다.

불륜과 사랑을 오가며 신분상승을 추구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사랑 끝엔 추락만 있을 뿐. 결국 현대에도 아직 계급은 남아있으며 상향사회로의 상승이동은 불가능하고, 가난한 가정일수록 가족 해체는 쉽게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한밤중에 불쑥 찾아와 아빠를 불편하게 했던 외삼촌이 세상을 떠난다.

그후 엄마는 멍하니 넋을 놓는 일이 잦아졌다. 아빠와 부부싸움도 꽤 격하게 한다. 오빠는 아예 대놓고 부모가 있는 데서 은희의 뺨을 때린다. 1994년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10월 21일 아침 뉴스를 보고 은희는 경악한다. 성수대교는 언니의 통학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나? 언니는 등교에 지각하는 바람에 사고 버스를 놓칠 수 있었다. 모처럼 다섯 식구가 앉은 저녁 식탁에서 오빠는 울음을 터뜨린다. 은희는 엄마의 각질 생긴 발뒤꿈치를 본다. 다행스럽게 은희네 가족은 그 풍파 속에서도 가족을 잃지 않았고, 가정이 붕괴되지 않았다.

지완과 데이트를 하는데 그의 엄마가 나타난다. “얘가 그 방앗간 집 딸이니?”라며 지완의 손을 거세게 낚아챈다. 순수한 사랑이 신분의 벽은 뛰어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영지는 중산층인 듯하다. 게다가 서울대를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항상 어둡고,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다른 데는 안 움직이지만 그 작은 건 움직이니까 참 신비로워”라며 용기를 주던 영지는 제가 먼저 지쳐 스스로 이승과 하직한다. ‘사랑은 유리 같은 것’과 ‘칵테일 사랑’의 유머가 재기 발랄하다. ‘여러분’을 틀어놓고 광기 어린 춤을 추는 은희의 허무주의가 인생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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