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창과 칼을 이용하여 싸우던 전투와는 달리 개인 화기인 총이 개발되고 보급이 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보병들의 주요 전투는 참호전이었다.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전으로 서로 대치하다 보니 돌격전으로 공격을 하는 쪽에서는 실익도 없는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막대한 희생자의 증가에도 서로 장기간 대치가 되자 영국군 측에서는 대안 마련에 고심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대의 진영까지 토굴을 파고 가서 적진을 폭파하는 방법도 사용했지만 너무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실익도 별로 없었다. 마침내 참호전을 타개하도록 고안된 것이 장갑차였다. 처음엔 ‘무한궤도 트랙터’라고 했다고 한다. 이 장갑차의 개발은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W. 처칠이 설립한 육상군함위원회가 진행했는데, 그들은 프로젝트의 보안유지를 위해 장갑차 이름을 전선의 러시아부대로 물을 운송하는 탱크(tank : 물 저장 큰 통)의 이름을 차용하여 ‘탱크’라 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탱크 모델인 ’리틀 윌리’는 시험용으로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실전 공격용으로 진보된 것이 전차 ‘빅 윌리’인데 차체 양쪽의 스폰슨에 57㎜포 각 1문을 장착해서 1916년 1월 시험을 하였다. 그렇게 비밀리에 세상에 나와서 1916년 솜므 전투에서 실전에 투입되자 처음 본 독일군은 놀라서 혼비백산을 하였다 한다. 그렇지만 적의 공격에도 취약했고 참호에 접근해서는 참호 속에 빠져 제 역할을 못하는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점차 개선되고 진화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어느 지형이나 자유롭게 이동하고 운행속도도 빠른 오늘날과 같은 제대로 된 탱크가 나왔다.

독일에서 제대로 된 탱크를 선보였다면 최고의 과학적 탱크는 소련에서 선보였다. 과학적이라는 의미는 이전의 탱크 외관이 직각으로 된 박스 형태로 만들다보니 철판에 포탄이 명중하면 탱크에 구멍이 나면서 치명상을 입혔는데 소련제 탱크는 외관을 경사지게 함으로써 포탄이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의 탱크 외관은 경사지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지상의 전투는 탱크가 주도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탱크(tank)’는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탱크는 인디언 고유어로 물 저장소를 의미하던 용어가 포루투갈어로 유입되어서 ‘tanque(탱크, 물저장소)’가 되었는데 이 단어에서 ‘tank’가 나왔다. 이것이 ‘탱크’의 어원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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