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가난한 집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열심히 살 것을 몸으로 일러준다. 자식들은 귀로 듣지 않아도 가난한 부모들의 고단한 몸짓을 눈으로 보고 느끼며 자란다. 옛말에 3대 부자가 없고 3대 거지가 없다고 했다. 가난하다고 절망할 이유도, 부모가 돈이 많다고 자만할 이유도 없다. 가난을 3대 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 방법이 있다. 바로 당신 세대에서 그 가난을 끝내면 된다. 단,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 20대에 이가 다 갈려 30대에 틀니를 할 정도로 말이다.

어렵게 살아온 시절들이 굳건한 정신력의 원동력이 되므로 우리는 없는 부모를 둔 게 복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고물을 주웠고 어머니는 선지에 버무린 당면을 돼지 창자에 쑤셔 넣으며 평생을 살았다.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남 앞에 당당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창피하지않다 치더라도 불편한 점이 아주 많다. 혹자는 부자의 천당행이 낙타가 바늘 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며 위안을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원수라고 하지만 우리는 평생 원수를 그리워 하며 산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달관한 듯 말하는 자들이 밥 한 번 제대로 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돈은 인간을 사악한 이중 인간으로 만드는 더럽고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린 필자에게 있어서 가난은 창피함과 불편함, 그 자체였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끔 고물 실린 손수레를 끌고 오는 아버지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고물장수와 그의 아들은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하였다. 파지나 낡은 고철등을 산더미처럼 실은 아버지는 행여 아들 친구들이 볼세라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걸어온다. 큰 아들 놈은 군대 열병식에서 병사들이 취하는 우로봐 자세로 외면을 한다. 곁눈질로 힐끗 보면 리어카 손잡이를 가슴팍으로 밀며 지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인다. 같이 끌기는커녕 창피함에 아버지를 외면한 죄책감이 지금도 필자의 가슴에 남아있다.

괴로운 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종종 집안의 형편을 묻는 설문을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직업과 더불어 TV나 냉장고 따위가 있는지를 종이위에 적도록 했다. 밥 먹을 궁리도 바쁜데 뭔 텔레비전이며 선풍기가 있겠는가. 학교에서 그 따위를 묻은 설문은 지금은 없으리라 본다. 어떤 가재도구가 있는지 묻는 창피함 때문에 아버지를 외면한 죄책감이 지금도 필자의 가슴에 남아있다.

필자는 때론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엿과 순대를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리어카에서 엿을 몰래 집어먹는 경험은 나쁘지 않았으나 밤새 질금을 달여 고아 만든 엿을 가지고 나가 고물과 교환해오는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다음호에는 어머니가 순대를 만들기 위해 핏물에서 돼지의 창자들을 꺼내시는 이야기를 해볼려 한다.(다음호에 계속...)

▲ 박창희 다이어트 명강사

[다이어트 명강사 박창희]
한양대학교 체육학 학사 및 석사(동대학원 박사과정 중)
건강 및 다이어트 칼럼니스트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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