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처럼 많은 남성들이 사회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정에서 풀고 싶어 하는데, 그 방법이 잘못되어 오히려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고 자신도 가족에게서 소외되는 결과를 얻곤 합니다. 다음의 사례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50대 중반의 남편이 부인과 함께 상담실을 들어섰는데, 그 남편의 표정에는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최근 들어 부인과 자녀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점점 심해진다면서 혹시 남자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갱년기 우울증이 아닌가 궁금해했습니다.

남편은 부인이 상담실을 나간 후 한참 망설이다가 “사실 저도 때때로 혹시 우울증인가 생각되어 상담을 받아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는데, IMF 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제안으로 동업을 했지만 결국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여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시름에 빠져 지내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에 다시 사업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몇 차례나 거래업체의 고의성 짙어 보이는 부도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어느 정도 수지를 맞출 수 있게 되었지만, 언제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항상 불안하며 가까운 사람조차 믿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자신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의 가정생활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부인이나 자녀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못마땅한 눈치만 보이거나 슬슬 피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애써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 자신의 소중함을 알아줄 것인지 모르겠다며 실망과 함께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필자는 우선적으로 그가 경험한 가정생활과 자신이 기대하는 가정의 모습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교에서 집에 돌아올 때나 아버지께서 귀가할 때면 현관에서 ‘오늘도 수고했다’며 맞아주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집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과 그렇게 해주지 않는 부인과 자녀들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이후 몇 차례의 상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에게서 듣게 되었습니다.

즉 우연한 기회에 그의 아버지에게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며 아버지를 받들며 살아왔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과 형제들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이었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 때문에 자신은 아버지처럼 자기 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비록 한때였지만 자신이 잘 나갈 때 자신에게 다가왔던 유혹을 뿌리치며 나름대로 애를 쓰면서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에서의 잘못된 결정으로 가족들을 위험에 빠뜨린 점이나, 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애를 써서 겨우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제 와서 보니 가족들에게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필자는 그가 경험한 것과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 이런 점에서는 그를 문제로 지목했던 그의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부인도 그가 나타내는 분노에만 불편해했지, 적장 그 남편이 경험한 고충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가족에게 얼마나 자세히 이야기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는 “그런 것을 가족에게 이야기해도 되나요?”라고 되물었지만, 그 후 즉시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거의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과 그런 상황에서 부인과 자녀가 자신의 수고와 고통을 몰라주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원망했던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말을 했을 때 가족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지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말이라도 해보겠다"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그에게 다른 과제도 주었는데, 즉 먼저 자신이 분노하게 되는 상황과 대상을 기록하고, 그 분노의 정도를 1에서 10까지 수치화하여 적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각 경우에 대한 책임의 비율을 배분하는데, 혹시 자기 자신이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도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부인에게는 별도로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맞장구쳐주도록 당부를 하였습니다.

다음 예약 시간에 그 부부는 상담실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의 치료팀에서는 그 이유와 그간의 경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어졌다고 했고, 그 부인은 지금껏 잘 몰랐던 남편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분노는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적절히 처리할 수 있으면 자신의 발전에는 물론 정말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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