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은혜의 4차산업혁명 이야기] 4차 산업혁명이란 말만큼이나 언제부턴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기 시작한 단어가 있다. 바로 ‘패러다임’이란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야말로 어떠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이해한다. 사실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어떠한 종류의 변화에 대하여 툭하면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표현을 쓴다. 과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패러다임 전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사람들이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는, 이 오묘한 단어를 처음 제시한 인물은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었다. 아마도 토마스 쿤처럼 그에 대한 평가에 호불호가 뚜렷한 과학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저널리스트 존 호건의 인터뷰 내용에서 그려진 쿤은 우유부단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심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그가 내어놓은 대표작 <과학혁명의 구조>는 매우 과감한 책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게 참 놀라울 정도다. 어쨌든 이 사람 덕분에 과학철학이라는 분야가 별도의 분과학문으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하다. 쿤의 실제 의도가 보다 온건했을지는 모르겠으나, 과학철학에서 평가받고 있는 쿤은 그야말로 위험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그가 과학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인류학적 아이디어에 일정한 빚을 지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들도 저마다의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쿤은 과학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옛 이론이 보완되어 새 이론이 마련되는 게 아니다. 과학은 완전히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교체하는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 비유하자면,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건물을 몽땅 밀어버리고 그 옆 자리에 새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아인슈타인으로 전개되는 과학의 역사가 이와 같다.

흥미롭게도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에서 뉴턴 역학으로의 전환을 통해 인류는 얻은 것도 있지만 동시에 잃은 것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학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가 아니란 말인가? 쿤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쿤은 과학이 일종의 도그마(dogma)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과학 활동은 모두 이 도그마에 기댄 활동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과학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혁명들은 논리적 절차보다는 오히려 과학자들의 심리 상태에 더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반응
그렇다면 쿤은 왜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을까? 그 대답은 쿤의 활동 당시 은근히 유행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으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관찰의 이론적재성’이라는 과학철학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자는 인간의 관찰 행위가 생각만큼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고, 후자는 관찰의 결과가 관찰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아예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과학철학자들은 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판되었을 때, 이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특히 그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했던 용어, ‘패러다임’(paradigm)이 주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독자들은 쿤이 사용하는 패러다임이란 말의 용법이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스무 개가 넘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용어를 이렇게 애매하게 쓰면서 어찌 철학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비판에 직면하여 쿤은 나름의 답변을 추가한 <과학혁명의 구조> 2판을 출간한다. 여기에는 1판에는 없는, 패러다임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쿤은 패러다임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했다. 우선 넓은 의미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말한다. 쿤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이란, 기호적 일반화, 모형, 가치, 범례로 구성되는 복합체다. 이들 네 가지는 좀 복잡한 개념들이지만, 그나마 쉽게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호적 일반화라는 것은, 특정한 공식 혹은 법칙을 공유하는 과학자라면 동일한 패러다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가령 뉴턴은 그 유명한 공식 E=mc2를 몰랐지만, 아인슈타인 이후의 모든 과학자는 이 공식을 알고 공유한다. 둘째, 모형은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존재에 대한 가정을 말한다. 셋째, 가치는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것들 가령 정확성, 일관성, 넓은 적용범위, 단순성 등을 말한다. 동일한 패러다임 안에 있는 과학자들은 이들 가치 간의 서열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범례는 패러다임의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쿤은 이 범례를 좁은 의미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한다.(다음편에 계속...)

▲ 박은혜 칼럼니스트

[박은혜 칼럼니스트]
서울대학교 교육공학 석사과정
전 성산효대학원대학교부설 순복음성산신학교 고전어강사
자유림출판 편집팀장
문학광장 등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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