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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 이면의 매력적인 민낯…이태원 주변 이야기 [문화지평 답사기]

기사승인 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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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날이다. 마냥 집에만 있다간 오히려 더 축축 몸과 마음이 늘어질 거 같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하품을 마스크로 가려감서 집을 나섰다. 딱히 이르지도 그렇다고 마냥 늦지도 않은 토요일 오전 시간대, 지하철은 한산했다.

용산. 수시로 들어온 지명이지만 딱히 갈 일은 없었다. 지하철역 녹사평역은 더더욱 나의 발걸음이 닿을 기회가 없었다. 교통부터 살짝 애매해 스마트폰 어플에 의존했다.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동묘역에서 6호선을 갈아탔다. 아름다운 역으로 손꼽히고는 한다는 녹사평역은 한 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녹색 식물이 가득 자리잡은 휴식공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꽤나 길어 보이는 에스컬레이터의 도움을 받았다. 1번 출구로 나아가는데 평소 같았으면 보기 힘들었을 외국인을 두 명이나 스쳤다. 한 때 미군부대가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서울 한복판, 용산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많은 걸음이 필요했다. 좁은 골목길은 대개가 오르막이라 아침을 거른 나에게는 살짝 긴장감을 안겨다 주었다. 마음의 심란함은 몸을 움직이면 조금이나마 극복 가능하다기에 묵묵히 걸었다. 고맙게도 하늘은 화창했고, 조금만 높다 싶은 곳에 이를 때마다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 보는 호사를 누렸다. 앞으로 어떤 공간을 접하게 될지, 기대감은 육교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됐다. 항상 뿌연 하늘 탓에 어렴풋하게만 보였던 N서울타워가 선명함을 자랑했다.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잡은 집들에 대해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음을 뒤늦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일명 달동네로 불리곤 하는 곳일 테지만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는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생성될 것이다. 값비싼 서울 땅을 단 한 평도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듯 우리는 정비에 열을 올리곤 했다. 도시재생 등으로 패러다임이 달라졌고, 예전보다는 덜 폭력적인 방식이 통용되기 시작했다지만 과거와의 결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앞으로 용산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할지, 기대 반 우려 반, 어찌 보면 지나친 오지랖을 부려가며 첫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뻗은 길의 명칭은 유관순길. 유관순 열사에 관한 어떤 이야기가 깃든 길이기에 이토록 숭고한 이의 이름을 길에 붙였을지 싶었다. 일종의 추모비와 이태원 부군당이 나란히 자리 잡은 모양새가 다소 어색했다. 너무도 이질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부군당은 제를 지내는 공간이라 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은 알게 모르게 많은 측면을 전통 신앙에 의지했는데, 한양 안에서도 이는 유효했다. 이 곳 뿐만 아니라 성수, 옥수, 금호, 한남, 보광, 서빙고, 동빙고, 원효, 당산, 신길 등 참으로 많은 곳에서 이와 같은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했다. 더구나 부군당에서의 제는 특정 신분에만 국한되지 않은 듯했다. 지역 사람들이 다수 제에 참여했는데, 2009년에도 제가 열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전통 보존 차원에서 일정 정도의 지원금이 주어지는 등의 지원이 약간은 있을 테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호흡하는 공간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동선 중 한남동 부군당도 포함돼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방치된 듯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삶이 퍽퍽해질수록 제 안위와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믿음, 신앙 차원을 떠나서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해주는 이와 같은 장소는 최대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부군당과 유관순 추모비가 나란히 존재하는 공간은 지대가 제법 높았다. 초반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른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세 개의 탑을 품은 두 개의 남산 봉우리가 우릴 반겼다. 누에의 머리 모양과 닮은꼴이라 하여 잠두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봉우리를 비롯하여, 향로봉, 해방촌 등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잊기를 반복했으나, 비교적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도 그 중 있었다. 용산이라는 지명은 일제시대에 대규모 병영 기지가 만들어지면서 붙게 되었고, 위치도 지금의 용산과는 다소 달랐다는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도시가 팽창하는 가운데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병영의 모습이 현재도 뚜렷이 남아 있다는 게 가슴 시렸다. 물론 마냥 자랑스럽지 않단 이유로 제거를 시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여긴 서울 한복판이기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에 얽힌 이야기도 접할 수 있었다. 인근에 무덤이 무려 10만여 개에 달했고, 유관순 열사의 시신 또한 이 근방에 안치됐던 모양이다.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개발로 소실된 것을 최근 추모비를 설치하고 도로명 주소를 부여함으로써 되살렸다 하였다. 산 자의 공간보다 죽은 자의 공간이 드넓어서, 최근에는 화장 문화를 장려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향후 장례문화의 변화까지는 예측 못하겠다. 허나 애오개, 신당, 사당, 당산, 당고개 등, 무덤이 많았으며 혼을 위로하는 각종 제가 성행했던 공간이었음을 암시하는 지명을 통해 지난날을 상상하는 일은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걸음이 분주해졌다. 한동안 언론에 오르내렸던 이태원이라는 동네를 본격적으로 둘러볼 차례다. 이태원역이 등장할 무렵부터 마치 외국에 온 것 마냥 눈이 마구마구 돌아갔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가늠조차 힘든 꼬부랑 글씨가 쓰인 간판이 이색적이었다. 하나의 예술로 각광받기 시작한 그라피티 작품(!)으로 장식된 상점도 상당했다. 서울 안의 작은 외국답게 외국인들도 살짝 보였다. 코로나 정국은 무시할 수 없는 건지 거리는 상당히 한산했다.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아랑곳 않고 클럽으로 몰려들려나. 이름조차 낯선 몇몇 클럽을 지나치면서 더는 젊다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자신에 대해 괜한 타박을 했다. 클럽에 출입하는 게 젊음의 상징은 분명 아닐 것임에도.

이따금 등장하는 차를 조심스레 피해가면서 오른 언덕길에서 이슬람 사원(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을 만났다. 특유의 화려한 타일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마음 같아선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으나, 왠지 성스러운 공간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사진 찍기가 꺼려졌다.

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로 손꼽힌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국가에서 꽤 많은 분들이 우리 땅에 이주해 생활하고 있지만, 이 종교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리감은 상당하다. 유일신 알라를 강조하는 것이야 사실 기독교도 유일신앙을 중시하므로 크게 난해하진 않다. 최근에는 다소 잠잠해진 알 카에다 등 테러 집단이 나에게 준 충격이 상당한 탓이리란 생각이 든다. 정교 일치 시스템 또한 우리에겐 꽤나 낯설다. 종교의 정치 개입을 위험하다 여기는 우리에게 종교 집단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문화는 살짝 미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허나 호전성이 이슬람의 본질은 결코 아니다. 이슬람은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국민을 보호하는 측면은 이슬람의 부흥에 큰 힘을 발휘했다.

어찌 이 곳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섰는지 의아했다. 석유에 꽤나 높은 의존도를 자랑(?)하던 시절, 우리의 필요에 의해 들어섰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이슬람 사원 하나가 원활한 석유 수급에 효과를 발휘했을까. 거래라고 하긴 뭐하지만, 효과적인 거래였는지가 살짝 궁금했다.

길게 뻗은 우사단길을 따라 마냥 걸었다. 이색적인 분위기가 익숙해질려는 찰나에 현대건설 측에서 걸어 둔 현수막을 마주했다. 단군이래 최대 재개발이라는 용산 한남 3구역 재개발 시공사로 선정됐으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터이다. 과연 재개발이 이 일대 주민들에게도 마냥 호재일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죄다 어디로 뿔뿔이 흩어질지가 걱정스러웠다.

한광교회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나의 생각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색적인 레코드점(Mmm Records)과 카메라 가게(CITY CAMERA)를 마주한 공간에서 용산 일대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에게 한 아주머니가 꽤나 성을 내셨다. 자신의 집을 불법으로 촬영한다며 날을 잔뜩 세운 목소리였다.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의 반영이었을까. 속내를 알 순 없었지만 재개발로 동네가 말끔히 정리되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의 마음은 잃을 수도 있겠단 우려가 일었다.

쇠락한 도깨비시장을 관통해 한남동 부군당을 둘러본 후 무후묘에 도달했다. 삼국 시기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인 제갈량(诸葛亮)을 섬기는 사당답게 정문의 형태가 격이 있는 건물에 쓰인다는 솟을대문이었다. 일대가 재개발 구역인데 사당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도 아니고 아니 재개발을 피해하긴 힘들 거 같다는 의견이 살짝 우세를 보이려 드는 찰나에 불경인지 무엇인지 알 길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왠지 이곳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듯해 기분이 묘했다.

아직 다리가 묵직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제법 많이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아까 걸었던 그 길이 아닌가 싶은 도로를 접하고 한동안 걸은 끝에 폴리텍대학이 등장했다. 정확한 명칭은 한국폴리텍대학 서울정수캠퍼스.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대학이 맞는지, 오래 전 한동안 궁금해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폴리텍대학은 기능대학이다. 기능대학은 전문대학 학위과정과 직업훈련 과정을 병행하는 교육 기관을 뜻한다. 2000년대 문을 열었다는 연혁만을 놓고 보면 역사가 깊다고 할 순 없으나, 이곳 서울정수캠퍼스는 1970년대 있었던 직업훈련기관은 정수직업훈련원에서 출발했다. 고등학교에 진학 못한 학생들을 모집해 다양한 직업학교를 제공했다던 정수직업훈련원. 한 때 교육을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의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였음이 떠올랐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을 하나의 자원으로 관리하려 들었던 시대를 우린 살았다.

용산이라고 하면 화려함만이 떠올랐다. 강북이긴 하나 한강변에 가득 들어찬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아파트가 가득한 곳, 호화청사 논란이 가득했던 용산구청 청사 등이 내가 용산에 대해 지닌 이미지의 전부였다. 걸음걸음이 나에게 단편적 사고에 대한 깨우침을 선사했다. 빼앗긴 서울, 다양성이 존재하는 장소, 누군가에겐 구곡간장(九曲肝腸)과도 같을 곳. 오늘 접한 용산은 왠지 알면알수록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전수정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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