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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대성사에서 찾은 초대불교 흔적과 강남 이야기 [문화지평 아카이브]

기사승인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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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20. 6. 20.(토) 10:00~13:00
■ 장소 : 예술의전당 앞
■ 코스 : 대성사-예술의전당-반포대로-사랑의교회-천년향(향나무)-대검찰청-영포빌딩-정역신도비-국립중앙도서관-서래마을 몽마르뜨공원-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영동선)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 3회차 답사가 지난 6월 20일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초기 백제불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서초구 우면산 대성사를 시작으로 반포대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근현대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해설은 ‘강남을 읽다’의 저자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가 진행했다.

문화지평 답사팀은 20일 오전 10시 예술의 전당 앞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아침부터 볕이 강했다. 이날 답사는 해설 포인트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감성이 묻어 있는 답사기로 나눠 기록했다.

우면산 대성사, 마라난타 병 치유한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

▲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수토병을 고친 생수가 나던 우면산에 대성초당을 지은 것이 대성사의 전신이다.

백제는 384년(침류왕1)에 불교가 전래됐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한성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했다.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라난타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백제로 오는 동안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수토병(일종의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다가 우면산에서 솟는 생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궁중에서 거처를 우면산으로 옮겨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짓고 머물렀다. 이곳이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로 지금의 대성사가 들어선 공간이다. 마라난타가 대성초당을 짓고 머무른 이후 근대까지 대성사는 고승들의 수행 도량으로 이용됐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 참가했던 용성스님은 대성사를 중건하고, 백성의 계몽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찰을 불태워 버렸다. 용성 스님의 법손(法孫)인 불심도문(佛心道文) 스님은 폐허가 된 대성사를 중창했다. 이는 용성스님의 10대 유훈 가운데 하나인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는 뜻을 받든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불교는 고구려 372년(소수림왕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은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했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가 고구려로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게 했다. 이 두 절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는 백제, 신라보다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빨리 잡게 됐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에 인도 고승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됐다.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 서북경지방인 일선군(경북 선산)에 들어와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는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을 의미한다. 부족국가에서는 하늘, 조상신에 제사를 지내는 등 중앙집권적 요소가 미약했으나 불교 전래와 정착은 왕권의 확립과 국가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다. 불교가 국가를 움직이는 강력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암사라는 지명과 대성사의 마라난타 이야기는 불교가 처음 전래한 백제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전당,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

▲ 예술의 전당은 ‘문화예술진흥과 창달, 국민의 문화향유 기회 확대’를 목표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순차적으로 건립된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예술센터다.

예술의전당은 ‘문화예술진흥과 창달, 국민의 문화향유 기회 확대’를 목표로 설립된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예술센터다.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일대에 7만여 평 대지에 오페라하우스, 음악당, 서예관, 한가람미술관,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을 구비한 건축 연면적 3만6522평의 세계적 규모의 아트센터다.

1984년 5월 국제지명공모를 통해 김석철을 주 건축가로 선정해 11월 기공식을 가졌다. 김석철 안은 축제 분위기에 어울리며 지형 활용이 우수하고 시설관리 운영 면에 조화를 이뤄 전반적인 수정 없이 세부 수정만으로도 보완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김석철은 3개월 동안 수정을 거쳐 최종 기본설계안을 완성했다.

김석철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적극 반영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공간 창출에 힘썼다. 또한 사람, 자연, 도시 키워드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간, 자연 속 열린 공간으로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 주변 지형과 조화로움을 갖고 있는 공간을 목표로 예술의 전당을 만들어 나갔다.

1987년 2월15일 재단법인 예술의 전당으로 운영체계를 갖춘 뒤 1년 뒤 1단계로 음악당과 서예관을 개관했다. 1990년 2단계로 미술관과 자료관을 개관하고 3단계로 1993년 오페라하우스를 열어 복합 문화예술 공간을 완성했다.

반포대로, 수입차 회사 즐비한 린다 김의 욕망의 거리

▲ 서초GS주유소 뒤로 흉물이 된 한진오피스텔(파란색 점선 원) 건물이 보인다. 붉은 색은 린다 김이 개발하려고 했던 필지다.

답사팀은 예술의 전당을 빠져나와 반포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반포대로란 이름은 서초구 반포동을 지나고 반포대교가 한강의 남북으로 연결시켜주는 데서 붙여졌다. 반포대로에는 유난히 수입차 전시장이 많다. 일명 반포 수입차거리다. 반포대교에서 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지는 반포대로는 벤츠(한성), BMW(한독), 아우디(위본), 폭스바겐(마이스터), 재규어랜드로버(KCC), 혼다(일진), 렉서스(엘앤티), 토요타(효성), 미니(코오롱), 포드(선인) 등 다양한 수입차 전시장이 있다. 이와 비슷한 곳이 수입차 성지로 불리는 도산대로다. 그만큼 수입차 회사들이 강남을 타깃으로 삼아 영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초GS주유소 뒤편에는 서초센트럴아이파크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그 한쪽 인접지역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흉물스러운 빌딩 하나가 있는데 옛 한진오피스텔이다. 철거와 재건축 계획이 있다고는 하나 몇 해 째 유령 건물로 방치돼 있다.

이 일대는 과거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본명 김귀옥)이 부동산 시행사와 동업관계를 맺고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던 곳이다. 당시 땅 매입 작업에 어려움을 겪자 린다 김이 땅 주인들을 만나 설득하고 다니는 등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땅 주인들은 낮은 매가 제시에 반발해 반감이 노출되는 등 사업 시행이 순탄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아마도 한진오피스텔은 이 와중에 주인을 못 찾고 서초센트럴아이파크 개발 때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포대로를 지나면서 마주친 욕망의 단상이다.

사랑의교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대판 바벨탑’

▲ 사랑의교회와 천년향.

사랑의교회는 1978년 고 옥한흠 목사에 의해 ‘강남은평교회’로 개척됐다. 1981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은 2대 오정현 담임목사기 시무하고 있다. 등록 교인 9만 명으로 주일에 출석하는 교인이 2만~3만 명으로 추산되는 강남의 대표적 대형교회다.

1985년 강남역 인근에 자리 잡은 사랑의교회는 2000석의 본당에 교인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신도수 증가해 인근 역 부근의 상가를 빌려 예배를 봐야 할 정도였다. 2009년 6월 사랑의교회는 신축교회부지로 서초구 서초동 1541번지(총 23개 필지, 약 7000㎡)와 인근 1501-9번지(1개 필지 451㎡)의 땅을 대림산업으로부터 1139억 원에 사들였다.

대림산업이 이 땅을 2009년 2월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약 610억 원에 매입한 것을 불과 넉 달 만에 두 배 가까운 값으로 땅을 사들인 것에 대해 교인들이 오 목사를 배임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지난 2014년 12월 검찰은 오 목사의 배임횡령 혐의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가 신축됐지만 특혜 논란에 휩싸인다. 교회 신축 공사 과정에서 서초동 대법원 4거리 도로 지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서초구가 도로 지하 1077.98 m2에 대해 점용 허가를 내준 것이 특혜라는 것이다. 서울시가 서초구청에 취소 요구를 했고 서초구는 서울시로부터 처분 취소 이행 조치를 받고도 이를 따르지 않자 서초구민들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7월 9일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는 이 소송에서 “주민 소송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소송 각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지난해 6월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사랑의교회 헌당식에 참석 해 “사랑의 교회의 예배당 지하 공간을 계속해서 쓸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이제 서초구청이 할 일은 영원히 이 성전이 예수님의 사랑을 열방에 널리 널리 퍼지게 하도록 점용허가를 계속해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되는 이유는 예배당 지하 공간이 세워진 장소가 공공용지인 도로이기 때문이다. 이 부지에 대해 서초구는 2010년 4월, 당시 신축 중이던 사랑의교회 건물과 교회 소유 도로 일부를 어린이집으로 기부채납 받는 조건으로 사용하도록 도로점용과 건축 허가를 내줬다.

이에 황일근 전 서초구 의원과 서초구 주민들은 2011년 12월 서울시에 감사를 요청했다. 당시 서울시는 “도로점용 허가 처분은 위법하니 2개월 이내에 시정하라”고 서초구에 요구했지만, 서초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2019년 10월 대법원은 불법검거를 최종 판결했다. 반포대로 서초역 사거리는 교회의 욕망이 그 옛날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수령 880년된 향나무는 말이 없었다.

서초역사거리 북단 대법원 청사 앞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향나무는 서초구가 지난 2009년 ‘천년향‘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이에 앞서 서초구는 향나무 이름 공모를 통해 천년향으로 선정했다. 천년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로 높이 15.5m, 둘레 3.6m, 추정 나이 871년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이 나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나무다. 서울시는 1968년 시 보호수로 지정했다.

천년향 인근에 있는 검찰청과 중앙지법 위치는 원래 서울시청 청사를 지을 부지였으나 사법부와 서울시가 부지교환을 통해 현재 모습으로 개발됐다. 서초경찰서만이 유일하게 서울시청이 들어올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공기관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을 개발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정부기관을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려 했다. 계획대로 모든 기관을 옮기진 못했지만 상당수 공공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서울법원 종합청사와 검찰청사가 이전한 서초역 주변은 원래 서울시청이 옮기려 했던 부지다.

1979년 서울시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할 신청사 부지로 서초역 일대 2만5000평을 매입했다. 서울시청이 강남으로 이전하지 못한 이유는 대통령의 결재가 나지 않아서였다. 강남 이전이 무산되면서 서울시는 이 땅을 법원과 검찰 청사 부지로 내줬다. 그 대신 정동에 있던 법원과 검찰청사 부지를 넘겨받았다. 정동 옛 법원 건물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포빌딩, 청계재단 그리고 해주 정씨 세거지

▲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만든 청계재단 사무실이 있는 영포빌딩.

답사팀은 중앙등기국 쪽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이곳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재단이 입주해 있는 영포빌딩이 있다. 영포목우회 또는 영포회는 1980년에 결성된 경상북도 영일·포항 출신 5급 이상의 중앙부처 공무원 사조직이다. 회원은 2010년 기준으로 약 120여명. 지역 장학금 지급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영포회 회원들이 요직에 중용되면서 눈총을 받았다.

청계재단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부동산 등 재산 330여억원을 출연해 2009년 8월 설립한 장학과 복지사업을 위한 재단이다. 청계재단의 '청계'는 이명박의 새로운 호인 '淸溪'를 뜻하는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은 막바지에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말하는 광운대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명박은 자신이 소유한 서울 서초동 영포빌딩과 대명주빌딩, 양재동 영일빌딩 등 감정평가액 395억원의 자산에서 채무를 제외한 금액기준으로 331억4200만원 상당의 자산을 청계재단에 출연해 위기를 넘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일 청계재단은 부족한 장학금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유는 은행대출 등 이 전 대통령이 떠넘긴 빚 때문이었다.

▲ 정역의 신도비와 정곡 표석.

영포빌딩을 지나 한블럭 정도 교대방향으로 걷다보면 해주 정씨 세거지였던 곳을 알리는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지금의 서초동 법원 일대에서는 옛날 해주정씨 일가가 모여 살던 정곡(鄭谷)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조선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정역(鄭易)의 묘소가 있었다.

정역 묘소는 법조단지 조성으로 인해 1984년 경기도 여주로 이장했고 이곳에는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를 말한다.정역은 효령대군의 장인이면서 예조·형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 집현전 대제학 등을 지냈다. 왕실과 인척 관계이지만 교만하지 않고 덕이 많은 성품의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에 ‘정곡’(鄭谷)이라 적은 표석도 있다. 이에 대한 안내문에 따르면 ‘서기 1458년 과천현 백석동(현 서초동) 후산에 조선개국공신 의정부좌찬성 집현전대제학 증영의정 시호 정도공(貞度公)인 휘 정역(鄭易)의 묘가 조성되고 묘하에 재실을 마련하여 자손이 세거함으로서 마을 이름을 정곡(鄭谷)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공(公)의 9대손 부정 중만(重萬)이 서기 1709년(숙종 35년) 비돌에 정곡이라 글을 써 세우므로 오늘에 이르렀으나 서기 1989년 법원 및 검찰청사가 건립됨으로 원위치에서 300여미터 서남쪽인 현위치에 이전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을지로·남산 거쳐 서초에 둥지

▲ 일제의 조선총독부도서관 연혁을 잇지 않고 해방이후부터 연혁을 사용하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을지로, 남산을 거쳐 1988년 지금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1923년 11월 일제가 서울 중구 소공동 옛 남별궁 터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만들었다.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주차장이다. 이 곳은 원래 원래는 석고단(석고전, 광선문, 석고)이 있었다. 석고단이란 1902년 고종황제의 칭경기념(稱慶記念, 등극40년과 망육순(望六旬))을 위해 건립된 시설이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됐다. 일제 패망 후 한국인 사서들은 일제가 장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켰다. 일본인 사서와 미군정이 협의해 모든 장서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승계됐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은 총독부도서관 연혁까진 승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중앙도서관 개관일은 1945년 10월이다.

반도호텔을 인수한 롯데가 호텔을 짓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반도호텔 옆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1974년 국립중앙도서관은 소공동 시대를 마감하고 ‘어울리지 않게’ 남산 어린이회관으로 이전했다. 롯데는 국립중앙도서관 부지에 롯데백화점 주차장을 지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표지석이 서 있다.

1949년 5월 국립도서관 직제가 공포되어 국립도서관 발전을 위한 큰 계기가 됐다. 1963년 국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칭됐다. 남산 어린이회관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은 1988년 5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현 위치에 도서관을 신축해 이전·개관했다.

위형복이 설계한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은 철근콘크리트조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이다. 9×9미터 모듈을 기본으로 설계한 건물이다. 수직선과 수평선 모두 굵직하게 처리해서 웅장함을 강조했고 외벽은 화강석으로 마감했다.

도서관 본관은 정면과 측면, 후면이 모두 같은 입면으로 처리되어 통일감을 주지만 좌우대칭을 강조해서 권위적 느낌을 풍긴다. 최초 설계에 있던 전면 계단과 식당 건물은 사라지고 중앙광장은 축소됐다. 이 과정에서 관료주의적인 ‘관공서’ 건물의 인상이 강화됐다는 지적이다.

해방 이후 10만 명 가까이 양성된 대한민국 사서 중에 국립중앙도서관장에 사서가 임명된 것은 2019년 개방형 관장제를 통해 임명된 서혜란 관장과 초대 이재욱 관장 단 둘뿐이다. 서 간장은 여성 첫 관장이란 타이틀도 있다.

▲ 전두환이 적은 ‘국민 독서교육의 전당’. 도서관 앞쪽에 있다가 디지털도서관을 짓느라 뒤로 옮겼다가 원위치를 시키지 않았다.

전두환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 때 ‘도서관’을 언급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고 권력자가 도서관을 정책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다. 국립중앙도서관 뒷마당에 가면 전두환이 쓴 글을 돌에 새겨 놓은 조형물이 있다. 디지털도서관 건립 과정에서 앞마당에 있던 것을 ‘뒷마당’으로 옮긴 것이다. 디지털도서관 공사 이후에도 원 위치를 시키지 않는 것은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잊고 있는 것일까.

답사팀은 국립중앙도서관과 몽마르뜨공원을 잇는 누에고치 모양의 다리를 건넜다. 반포라는 동네로 건너 온 것이다.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해서 ‘서릿개’라 불렀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됐다.

반포대교 남단의 사평로를 지나 팔레스호텔 옆으로 난 서래로를 지나다 보면 고급 빌라촌이 모여 있다. 서초구 반포4동과 방배본동 일부에 위치한 서래마을이다.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의미의 서릿개에서 ‘서래마을’이 탄생했다. 서래마을에 프랑스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주한프랑스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부터다. 2008년 기준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1000여 명 중 절반 정도가 이곳에 살고 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미운오리에서 백조로 날다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시장 구자춘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1975년 6월 27일 서울시는 도심 집중의 완화와 강남 개발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서초구 반포동 19번지에 종합버스터미널을 건설 계획 발표했다. 5만평의 부지에 고속버스터미널(3만평)과 시외버스터미널(1만평)을 짓고, 나머지 1만평의 부지에 택시 승강장과 시내버스 주차장 등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1976년 9월 1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됐다. 4개월 만에 급조된 고속버스터미널은 5만평의 허허벌판에 세 개의 승차장과 300평 규모의 공동정비고가 들어섰다. 강북에서 강남을 오가는 대중교통편이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강북 터미널에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잠시 들렀다가는 중간 정류장 역할을 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1975년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분산돼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을 하나로 통합하는 목적으로 계획됐다. 또한 70, 80년대 강남·반포지역 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된 수퍼블록 중 하나이다. 고속버스업계 9개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한 버스터미널이다. 1976년 9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 1978년에는 기존 강북지역에 분산돼 있던 개별 고속버스회사 터미널을 통합이전했다.

경부선, 영동선, 구마선을 운행하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호남선을 운행하는 서울종합터미널(현 센트럴시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하철 3,7,9호선의 환승역이자 20여개 버스노선이 지나는 대중교통의 중심지이다. 화훼도매상가로 잘 알려진 지하상가와 센트럴시티 개발로 승객 외에도 유동인구가 많다.

강남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75년 11월 초기에는 가건물 형태로 운영되다가 하차장은 1980년 9월 19일, 본관은 1981년 10월 11일에 완공하여 같은 달 20일 개장했다. 완공 당시에는 3층과 5층에도 승차장이 있는 초대형 버스터미널로 서울의 명물로 꼽혔으나 승차장과 진입로를 교량이 아닌 일반 콘크리트 건물 기준으로 지었기 때문에 승차장이 버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다. 1988년 5층 승차장, 1992년 10월에는 3층 승차장을 폐쇄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은 수 많은 유동인구와 편리한 교통 요지로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참고문헌>
-서초구청 홈페이지
-‘한국의 교회건축’, 이호진,
-‘서양건축문화의 이해’ - 서울대학교 출판부
-‘플렉서블 아이덴티티 사례 분석을 통한 본질적 일관성에 관한 연구 :예술의전당 CI 개발을 중심으로’, 어경은.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2018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재계획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재배치를 통한 도시 공공공간 제안’, 채주아,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2012
-서울고속버스터미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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