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6월 6일 현충일. 여느 일요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코로나의 여파인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보강 공사가 한창인 시청역도 그랬다. 평소 같았더라면 역사 구석구석 노숙인들의 흔적이 묻어났을 장소들에서 허함이 느껴졌다. 시계를 응시한다. 10시 10분 전. 다행이도 지각을 면했다. 화장실에 들러 얼굴의 절반 이상을 뒤덮은 마스크를 점검한 후에 그 길로 모임 장소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얼핏 스친 도시건축전시관 앞엔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이다. 고개 숙여 가벼이 인사 후 오늘 둘러볼 장소들을 하나둘 헤아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사이렌 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진다. 처음에는 살짝 의아한 마음이 일었으나 이내 숙연해졌다. 오늘이 현충일임을 떠올리니 더더욱, 앞으로 접하게 될 곳들이 의미있게 다가오는 듯했다.

정동 쪽이 처음은 아니다. 반복해 들어도 기억이 희미한 건 내 삶과 매우 밀착한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 거다. 그저 문제 하나 더 맞추기 위해 암기해야만 했던 것들을 뒤늦게 껴안으려니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어쩌면 깃든 역사 자체가 유쾌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꺼질 수 있는 촛불마냥 위태로웠던 조선 그리고 애써 칭송하려 들지만 결국에는 스러진 대한제국을 어느 누가 뿌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동은 꺼져가던 희망이 마지막 숨을 고르던 장소였다. 을미사변 이후 경복궁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던 고종이 기거했던 장소. 그런 고종에게 역설적이게도 약간의 안정감을 선사했을 외국 공사관들이 다수 위치한 공간. 태평성대를 꿈꿨지만 이미 시대는 기울었고, 제국주의 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국가들이 제 영역 확장에 몰두했던 공간. 가장 국제적이었으며 활기 넘쳤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진. 지나친 감정이입은 서글픔만 불러온다. 눈 앞에 놓인 현실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각국 영사들이 조선에 터를 닦으면서 부수적으로 들어온 게 많았다. 종교 시설도 그 중 하나였다. 성공회성당 또한 영국공사관과 더불어 지금의 장소에 들어오게 됐다.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에서 많은 공사관이 다른 곳으로의 이전을 강행했다. 반면 영국 공사관은 1901년 무렵 들어선 그 자리에서 여전히 업무를 수행 중이다. 아마도 지금의 장소가 최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얼핏 들으니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했다. 건축 분야 문외한인 나에게 그보다 여실히 다가왔던 건 창문의 크기였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작은 나머지 앙증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같았으면 채광을 위해 보다 드넓은 창을 냈을 테지만, 당시에 거대한 창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기술력의 부족은 건물 외관의 독특함으로 이어졌다. 창 위아래 부분에 돌을 덧대어 무게를 지탱한 것인데, 일부러 다른 색 벽돌을 사용함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거둔 경우도 잦았다.

한국적인 요소도 살짝 볼 수 있었다. 의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인부가 모두 한국인이다 보니 빚어진 결과? 거대한 교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향하는 게 묘했다. 전반적으로 건물은 십자가 형태를 취했다. 근처 안내판에 그려진 건물 모형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 가능했다. 예배드리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늘에서 이를 바라보는 신도 흐뭇함을 느낄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신앙에 충실할 수 있는 공간. 내게 성공회성당은 그리 비춰졌다.

건물 출입이 여의치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길까지 가로막힌 점은 살짝 당혹스러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고민은 짧게. 계획했던 것과는 동선을 달리해 움직였다. 굳게 닫힌 대한문 앞을 지나 돌담길을 끼고 걸었다. 예전에는 없었지 싶은 안내 표지판이 우릴 반겼다. 표지판 내용을 읽은 후 다시 바라보아서일까, 돌담길 귀퉁이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아치 모양의 ‘구름 다리’가 놓였던 자리였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도로에 의해 분할 됐으나 오래 전 궁은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었다. 일제는 제 편의에 따라 공간을 분할했다. 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로를 뚫고 철로를 놓음으로써 근대화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그들은 주장하나, 과정은 일방적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리 설치한 기반 시설은 효율적인 착취를 위해 사용됐다. 근대화가 맞다면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을까.

인근의 미국 대사관이 보호 받는(?) 모습을 접하고 나니 기분은 더욱 묘해졌다. 지은 죄가 많은 탓인지 경찰만 보면 움츠러든다. 도로를 가로막아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길 너머에서 나부끼는 성조기가 보였다. 지난해 시위가 있었고, 혹여나 발생할 수도 있는 불상사를 고려한 조치라고 했다. 갑자기 등장한 인파가 경계 근무 중인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던지, 고요하던 무전기가 열과 성을 다해 목소리를 토해냈다. 러시아 공사관 쪽에서도 같은 광경은 반복됐다. 미국 대사관 터가 참으로 드넓다는 걸 본의 아니게 실감했다.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라는 평을 듣는 정동교회 앞에 잠시 머물렀다. 새문안교회와 오래된 것으로 1-2위를 다투는 종교 시설로, 새문안교회가 장로교인데 반해 정동교회는 감리교에 속했다. 포교에 중점을 뒀던 장로교와 달리 감리교 쪽에서는 사회사업 쪽을 중시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감리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안하니 이해가 갔다. 배재학당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토론(debating) 과목이 있어 학생들은 나름의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배재학당 출신은 아닐 테지만, 대학 교육이 상대적으로 생소했을 토론문화에 불을 지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독립협회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한 때 고종과 독립협회는 한 배를 탔다는 표현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황제 체제를 유지하려는 고종과 달리 독립협회는 의회제 도입을 부르짖었다. 고종이 혼란 속에서 러시아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일 때에도 독립협회는 헐값에 이권이 팔려 나간다며 반대를 공고히 했다. 둘은 언젠가는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정동교회는 고딕양식을 취했다 하였다. 고딕양식이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첨탑이건만, 정동교회에는 첨탑이 없었다. 본관 옆에 놓인, 1990~2000년대에 신축되었다는 신관과 교육관 건물도 여느 곳처럼 거대하거나 화려하질 않았다. 야트막한 높이의 건물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양 어떠한 위화감도 발산하지 않았다.

 

독립협회가 보다 오래 존재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그들 역시도 어찌 보면 친미 성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평을 듣지만, 이후 방문한 중명전 앞에 서니 자꾸만 만약을 따져 묻게 됐다. 중명전은 1904년 경운궁이 미심쩍은 화재로 불타 버린 후 고종이 임시로 머물렀던 곳이다. 을사늑약이 벌어진, 그야말로 민족의 수치라 새겨진 공간이었다.

을사늑약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대혼란이었다. 다양한 제국주의 세력이 야심을 드러내기 바빴는데, 그 중 일본과 러시아가 이 땅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구가하려 들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고종은 러시아에 많은 의지를 했다. 아마 둘의 다툼에서 러시아가 승산할 확률이 높아 보여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승자는 일본이었다. 러시아로선 동해에 이르기까지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그들은 전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고야 말았다. 물자 수급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늦어지는 출항을 기다리며 승리에 다가섰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까지 물리친 일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이라 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떠오르나 그가 홀로 모든 걸 행하지는 않았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사고를 해대며 자신의 안위를 충실히 도모했던 친일파들의 책임도 크다. 허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과도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건지,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지지부진하다.

혹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이미 멸망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시제로 조선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투박하게 그냥 군홧발로 짓밟았어도 큰 저항에 부닥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상대는 자신이 경험한 치욕으로부터 많은 걸 배운 터였다. 매순간 교묘하게 술수를 부려감서 조선을 농락했다. 경운궁 화재도 그들의 작품이었을 수 있다. 아궁이에서 불이 났다고 했지만 듣자하니 궁에서는 아궁이에 직접 불을 지피진 않는단다. 자신들에게 밉보이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그들은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명성황후 시해도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던가!

일제의 안하무인이 불편했다. 그보다 더 내 마음을 휘저었던 건 조선의 무기력이었다. 이왕이면 강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본능에 부합 않는 역사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면 거짓말이리라. 불쾌함을 애써 억누르며 손탁호텔 쪽으로 이동했다.

정확히는 손탁호텔이 있었던 터다. 현재는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있어 옛모습의 짐작이 어려웠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이었던 앙투아네트 손탁은 러시아가 이 땅에서 세력을 널리 떨치던 시기에 한옥을 하사 받아 이를 호텔로 개조했다. 2층짜리 건물에 총 25개의 객실이 들어섰는데, 아마도 가난한 조선인들로서는 호텔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니, 일확천금을 상상하며 조선 땅을 밟았을 외국인들이 주 고객이었을 거 같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머물며 을사늑약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한때 산림채굴권 광산개발권 등 다수의 이권을 손에 쥐었던 러시아의 영화는 그리 길지 못했다. 러일전쟁으로 입은 타격은 컸고, 손탁 또한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매각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자연스레 호텔은 호텔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참고로 길 건너편 지금은 캐나다 대사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 또한 손탁이 하사 받은 건물이었다. 손탁을 이해한다는 건 러시아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가 이 일대에서 막강했음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 러시아 공사관 터로 향했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애쓰지 않아도 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사관 위치가 그랬다. 일단 지대가 높았으며, 건물 또한 2층 이상으로 올려 마치 궁을 감시하는 듯한 형국이 초래됐다. 이는 왕조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제국을 마치 제 나라 평민 대하듯 내칠 순 없었을 것이다. 1900년대 초반 이 거리에서 풍겼을 이국적 향기 이면에는 약소국 조선의 서글픔이 깃들었다. 러시아 공사관은 지금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원래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그림이 공사 펜스에 그려져 있었으나 건물의 위용을 느끼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신, 언제 놓였는지 모를 안내 표지판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근대 역사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흐름이라 하는 건 무섭다. 러일전쟁으로 힘을 잃은 러시아는 이후 조선 땅에서 그리 많은 역할을 수행치 못했다. 혁명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택한 이후로는 더더욱. 물리적 거리와 더불어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고야 말았다. 그랬던 러시아가 우리의 역사에 재등장(?)하는 건 1992년 두 나라가 수교를 맺으면서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공사관 터를 다시 달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배재학당이 이전하고 남은 자리를 받았다고 하니, 한 번 정동에 내린 뿌리가 힘을 발휘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선원전 터를 끼고 돌아 마지막 장소인 구세군회관으로 향했다. 한 때는 궁의 일부였을 공간이 지금은 주차장, 덕수초등학교 등으로 사용 중이었다. 덕수초등학교 자리엔 일제가 설립한 경성방송국이 있었고, 홍난파는 이곳에서 관현악단 활동을 하며 차츰 친일 색채를 드러냈다. 모든 변화를 지켜보았을 주차장 너머 회화나무 한 그루는 말이 없었다. 혼자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역사였으리라. 왠지 회화나무의 침묵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 같았다.

그 옆으로 놓인 건물은 이제까지 보아온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서양 역사를 공부하며 들었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전면의 기둥이 이 양식의 특징인 듯했다. 구세군은 1870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감리교단이 그러하듯 사회봉사 측면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구세군 운동은 1928년 시작됐다. 건물 입구에 적힌 1928이라는 숫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건물을 겉에서만 훑다가 이 건물은 안엘 들어갔다. 일부는 음식점 등으로 사용 중인, 살아 있는 건물이었다. 얼핏 보아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2층엘 올라가니 거대한 세미나실이 있었는데,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책장에 잠시 소유욕을 느끼기도 했다.

오전 시간이 훌쩍 흘렀다. 건물은 고풍스러웠으나, 건물마다 서린 역사까지 마냥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역사라 하는 건 강자의 기록임을 절감했다.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정책은 순진했다. 우리가 세계 질서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판을 짰다. 그들은 서로 반목하며 세력 다툼을 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지구를 뒤흔들었다. 책임은 얄궂게도 그들에 의해 점령당했던 국가들의 몫이었다. 차라리 일본처럼 어설프게라도 제국주의를 부르짖었더라면 어땠을까. 참으로 위험한 발상임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요원한 친일청산과 통일의 문제를 떠올리니 머리가 아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하는지, 실존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역사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날의 답사가 내게 안겨준 결론이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