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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 첫동네가 품은 이야기…중림동약현성당과 충정로 일대 [문화지평 답사기]

기사승인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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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어제 하루 종일 부슬비를 흩뿌린 하늘이 미련이 남았던지 오늘(5월16일)도 아침부터 잔뜩 흐렸다. 비가 안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심상찮은 분위기라 가방에 우산부터 챙겨 넣었다. 목적지 서울역까지는 환승 없이 한 번에 닿을 수 있으므로 나름 교통이 편리하다. 그렇다고 마냥 밍기적거렸다가는 약속 시각을 놓칠 수도 있어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아무도 코로나19의 출현을 예상치 못했으며,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우리가 바이러스의 영향 하에 놓일 거라 생각한 이도 없었다. 끽해야 한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사태가 끊이지 않다 보니 바이러스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영영 불가능하진 않을까 조바심도 인다. 확실히 자유로워질 날을 알지 못하므로 조심조심 기지개를 펴기로 했다.

비로 인해 습도 높은 오늘과 같은 날씨 하에서는 숨쉬기가 약간 곤란하다만 마스크로 단단히 얼굴을 가렸다. 나와 같은 차림새의 사람들이 지하철에 드문드문 앉아 토요일 오후를 시작하고 있는 모습이 예전 같았으면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표정이 굳는다. 집중력이 잘 발휘되지 않는 가운데 책을 읽으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나름 일찍 출발했다고 믿었지만 10시 10분 전이었다.

애매할 정도로 날리는 빗방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안경 착용자의 비애지만 일단은 우산 없이 버티기로 마음 먹었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놓인 계단을 타고 7017 고가도로로 올라섰다. 모든 것에는 유행이 있어 한 때 서울 도처에 고가도로가 놓였다. 육교도 마찬가지. 오래된 그래서 흉물과도 같은 모양새를 자랑하던 몇몇 고가는 정책적인 판단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70년 김현옥 시장 시절 탄생한 고가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었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서울로 7017'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재탄생한 이 곳 고가는 서울시의 주장(?)에 의하면 공중정원에 해당한다. 도시재생, 사람중심 행정의 결과물 등 거창한 수식어를 걷어내고 가벼이 걸을 수 있는 산책 공간 즈음으로 오늘은 이를 활용했다. 제법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녹색 공간이어서 일대 직장인들의 점심 산책로로도 괜찮을 법했다.

고가 위에서 본 서울 한복판의 모습은 상상대로 복잡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거대한 도로는 사람으로 치자면 대동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강남이 화려하게 꽃 피기 전 서울역은 분명 서울,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지금도 변두리에는 속하지 않으나 어딘가 모르게 퇴락한 느낌이 살짝 묻어나는 게 오묘했다. 내가 거주하는 도봉구 방학동과 마찬가지로 이 동네 역시 철도를 중심으로 동서가 나뉜 상태였는데, 두 지역이 비슷한듯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풍겨 더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시선은 자꾸만 서쪽 방면에 놓인 철로로 향했다. 1906년 완공된 경의선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 의도가 가득 담긴 철로였다. 지금도 개발 논리에 의해 많은 것들이 잠식되곤 하나 당시에는 더더욱 환경적인 요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흔적조차 찾기 버거워진 만초천이 그렇게 철로의 탄생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 즈음이 물길에 해당할 것이라는 설명을 통해서만 존재를 실감할 수 있을 뿐 여전히 만초천의 복개는 요원한 상황이다.

서울역은 철로에서 그리 멀지 않다. 1925년 남만주철도회사에 의해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준공됐으니 그 자체가 역사의 산증인이다. KTX 개통 등으로 이제는 신역사에 기차역 역할을 내어준 후로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코로나 여파로 아마 최근에는 문을 꽁꽁 걸어 잠갔지 싶다.

간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향한 곳은 남대문교회였다. 성문 안에 종현(명동)성당과 함께 초창기 지어진 종교 시설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 중 가장 오래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꽤 오랜 역사를 지녔다. 인근에 고층 빌딩이 과하다 싶을 만큼 밀집해 지금은 높은 지대의 덕을 보기 힘들어졌지만, 예전엔 서울을 관망하기 좋은 위치였음이 분명했다.

오래 된 교회인지라 배출한 인물이 제법 여럿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 이름을 남긴 33인의 민족대표 중 1명인 이갑성을 비롯하여, 이승만 정권시절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등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대문교회가 북에서 내려온 신앙인들의 모임 장소로 안성맞춤이었으므로 종교계 인사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비롯, 다수의 찬송가를 작곡하였으며 <동무생각>으로 널리 알려진 박태준이 남대문교회에서 20여년 동안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놓인 찬송가 기념비 앞에 서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려 했다. 신앙촌 박태선 장로 또한 이곳 출신이라고. 이렇게 된 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힘이 컸다. 제 아무리 제국주의를 표방한들 서양인 선교사를 대놓고 해할 순 없었다. 상대적으로 삼엄함 경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교회 주변은 조계지와도 같았다.

이 외에도,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 ‘귀로’ 등에서도 교회가 등장했다 하는 것으로 볼 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종교계는 물론 문화계로부터도 널리 사랑을 받은 듯했다.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린다. 빗줄기가 굵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음 장소인 중림동약현성당까지는 제법 걸었다. 약현성당이란 명칭은 ‘약초밭이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한 때 이 일대의 풍경을 유추 가능케 하는 명칭이다. 정하성 동상에 이르는 산책로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부조가 여럿 있었다. 아산의 공세리 성당과 닮은꼴이라고 하면 실례이려나. 그곳에도 성당 뒤편으로 이와 같은 길이 있어 걸으며 마음을 가다듬는 게 가능했다.

성문 안 궁이 다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성당을 지을 수 없어 성문 밖 공소 형태로 시작한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도 6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지금이야 성문 안팎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요,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를 가늠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허나 불과 반세기 가량 전만 하더라도 성문 밖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라는 부모의 엄포가 있었을 정도로 안팎의 온도 차이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성문 밖이라곤 하나 당시로선 성당을 짓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지는 부지를 마련했으며, 코스트(Coste) 신부의 설계와 감독 하에 성당을 지었다. 성당의 건립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낯설었을 벽돌이 사용됐다. 이는 한강통의 연화소에서 제작했다고. 얼핏 보아도 건물의 앞뒤 모양새가 달랐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절충이라는 말에, 건축에 관한 전문 지식은 없음에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처음 세워진 약현성당이 아니라고 했다. 중간에 화재로 전소했기 때문이다. 나무 아닌 벽돌로 지은 건물이 전소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후 지어진 건물이 오히려 초대 성당의 모습을 더욱 잘 재현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성당으로 이동하는 도중 만난 매우 아담한 전망대에 잠시 머물렀다. 저 멀리 보이는 신호등 즈음이 칠패시장이 있던 위치라 했다. 마포나루가 가까웠던지라 시장에서는 주로 어패류를 취급했다. 반면, 이현(광장)시장 쪽에서는 채소 거래가 성행했단다. 자본주의가 이 땅에 정착한 게 불과 몇 십 년 같건만, 자본주의의 맹아가 도처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마냥 억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나가는 이야기를 여럿 접했다. 칠패시장의 경우 떠오르는 해를 매일 응시하다 보니 상인들의 이마가 벌겋게 달아올랐다면, 이현시장을 드나드는 상인들은 목덜미가 검게 그을렸다 했다. 상인을 보고 어느 시장으로 향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는 소리다.

칠패시장 일대에서 빈번했던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처럼 신용카드 한 장으로 모든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 물건 구입을 위해서는 폭 넓은 소매 안에 엽전을 가득 숨겨 다녀야 했다. 한 명이 소매를 툭 쳐 엽전을 흘리게 만들면, 다른 이가 엽전을 주우려는 원주인을 방해해가며 유유히 엽전을 주워 사라지는 게 그들의 수법이었다. 한두 명의 일탈 수준은 아니었던지, 그들의 행위는 ‘소매치기’라는 용어를 우리에게 남겼다.

걸을 땐 잘 몰랐는데, 방금 전까지 정면에서 바라보던 성당이 뒤편에 있었다. 아담한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이 아파트라는데 성당 쪽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아파트로 추정되는 건물이 안 보였다. 방향을 달리하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파트의 이름은 성요셉아파트. 얼핏 보아도 낡았거니 싶었는데 1970년 지어진 건물이었다. 경사진 땅을 고스란히 놔둔 채 건물을 올리다 보니 좌우측 층이 다른 독특한 형태로 완공됐다. 한쪽으로 들어가면 3층까지밖에 없는데 다른 쪽에서는 6층이 나온다나 뭐라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모교의 학관 건물이 절로 생각났다. 그 건물은 정말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도 분명 3층이었건만, 걷다 보면 1층이다. 새내기 시절엔 수업이 열리는 강의실을 찾지 못해 30분이나 일찍 도착해놓고도 지각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구조가 하수상한 나머지 시인 이상이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니 말 다했다.

성요셉아파트는 성당 측에서 수익사업을 고려해 지었다고 했으나 언덕을 깎지 않고 고스란히 놔둔 상태에서 건물을 지은 탓에 상점은 몇 없었다. 그래도 그 중 몇몇이 젊은이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업종이었다. 외려 낡았기에 사랑 받는다? 의외의 장소에서 시간을 머금었다는 이유로 사랑 받는 공간을 만나니 기분이 설렜다.

잠시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처마 아래 쪽에 모여 비를 피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고무신 공장이 많았다는 말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이하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 이완용과 같은 1858년생.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 사장. 언어가 통할 리 없음에도 선교사 알렌의 통역을 자처했던 인물. 외교권 없는 조선이 감히 미국에 주재공사를 파견했다는 청국의 문제제기로 모두가 귀국한 가운데 혼자 미국에 남아 주미대리공사로 흥청망청 빌린 돈 2백만 달러-역사 인식이 부재했던 고종이 그에게 미국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20만 미군을 데리고 오라는 명을 하사했고, 2백만 달러는 미군을 고용(?)하기 위한 금액이었을 거다.-를 탕진했던 인물, 거물급 친일파 등. 1915년에 사망했으니 그를 향한 욕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겠지만, 고무신 공장이 아니었을까 짐작 가는 건물을 비롯, 오래 전엔 꽤 지체 높은 분들이 거했지 싶어 보이는 고택 등이 여전히 주변에 존재했다.

6.25 때 엄청난 폭격으로 파괴를 경험한 이후로 중림동의 정체성은 변모했다. 도처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빈민들이 이 일대에 자리 잡은 탓이다. 누군가에겐 낙후된 지역에 불과했지만, 사진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김기찬의 시선에 이곳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골목이었다. 중림동의 정체성은 무어라 정의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보였다.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더니, 진정 그랬다.

이후 동선은 앞선 답사와 살짝 겹쳤다. 43인이 순교한 처형장이었던 서소문역사공원, 하천을 점유한 공간 위를 50년째 지키고 있다는 서소문아파트, 위대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인 프랑스 대사관 그리고 충정각까지. 처음 발길이 닿은 곳이 신선했다면 이미 한두 차례 다녀간 곳은 오랜만에 고향에 들린 것 마냥 반가웠다.

중간에 윤동주 하숙집 터였다는 곳(합동 27-1번지)을 지나치기도 했다. 서촌에 있는 윤동주 하숙집 터(소설가 김송의 집)는 나름 알려진 반면 이곳은 그 흔한 표지석 하나 없어 아는 사람만 알 듯했다. 이곳에 기거하는 동안 윤동주는 ‘자화상’을 썼다. 윤동주가 홀로 찾아가서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던 우물이 이 근처였던가! 의미심장하게도 현재는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건물이 바로 뒤편에서 위풍당당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로명 주소로는 '충정로2길 10'으로 기억하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 업종은 달라졌으나 흑백 사진 속 '이명래 고약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충정로역 바로 앞 충정각에서 계획했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지난번엔 충정각 내부에도 들어갔었는데,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오늘은 실내에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충정각 앞에서 마지막 단체사진을 한 장 남기는 걸로 안타까움을 달랬다.

슬슬 배고파질 시간이다. 모였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진다. 무리로부터 이탈한 나는 충정로역 안으로 바로 들어가기 아쉬웠던지 잠시 충정아파트를 응시했다. 몇 해 전 처음으로 충정로 일대를 거닐다가 접한 충정아파트는 강렬한 인상을 나에게 남겼다. 20여년 정도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게 재개발, 재건축 소리건만 충정아파트는 준공이 무려 1932년 1월이다.

전쟁 와중에는 인민군의 양민 학살이 벌어진 장소였고, 그 이후론 한동안 호텔로 사용되기도 했다. 서울, 아니 전국을 통틀어 이와 같은 장소가 또 있을까. 외부인 무단 출입금지, 내부 사진촬영 금지. 입구에 붙은 경고문을 거스를 수 없어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서울에 이토록 오랜 시간을 머금은 공간이 없어서, 부러워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누군가가 무얼 그리 보고 있느냐 묻는다면 새로이 짓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기술로도 쌓아올릴 수 없는 게 과거라 그렇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전수정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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