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다음으로 교육 사업에 대해 말씀을 좀 나눠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 가나 학교를 세우시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을 교육자로도 사셨습니다. 교육에 그렇게까지 힘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교육은 비할 바 없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독립 운동 기간일수록 우리는 더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죽고 살고 또 노예가 되고 독립이 되는 것은 지력과 금력에 좌우됩니다. 우리의 청년들이 하루 동안 학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본국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할 여건이 못 되었지만 저는 기회가 되는대로 공부를 해야 되고 또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해 독립을 위해 시간이 있는대로 힘써 공부를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국민들에게 좋은 지식과 사상을 주고 애국의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신문, 잡지, 좋은 책을 간행하려고 했고 시설이 미비하나마 학교를 세워 어린이와 청년들을 가르치려 한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선생님께서 실력양성론자가 아니냐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마 평생 교육 사업에 큰 뜻을 두셨다는 점과 말끔한 신사의 이미지가 선생님은 무장 투쟁과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제가 무슨 대단한 역사적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서 하는 게 맞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가 옳다 아니다라고 어찌 하겠습니까.”

-당연히 대단한 역사적 인물이시죠. 매번 고액권 지폐의 도안 얘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후보로 등장하십니다.

“허허, 평생 금력과는 크게 관계없는 삶을 살았는데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나든 아니면 다른 독립운동가 동지들이든 고액권 지폐에 누구를 넣느냐 마느냐는 것도 모두 후손들이 정할 문제이지요. 다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나의 평소 생각을 약간 말씀 드리면 어떨까 합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저는 광복이라는 대업의 성취는 오직 의로운 피를 뿌림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대한의 국민이라면 절실하게 피를 뿌릴 각오를 하고 독립 전쟁을 단행하기를 결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독립군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국민이 모두 군사입니다. 대한의 청년과 장사라면 빠짐없이 독립군 명부에 등록하고 산에 있든 들에 있든 아니면 저잣거리에 있든 각각 처지대로 가능한 방편을 만들어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노예로 사는 것보다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분투하고 응당 죽음에 나아가기를 서슴지 않는 편이 가치 있는 삶일 것입니다. 대한 국민은 어떤 경우를 당하든, 설사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더라도 결코 적들의 관리가 되지 말고 적들에게 세금을 주지 말지며 적들과의 교섭을 끊을지며 적들의 연호를 쓰지 말고 또 적들의 물건을 사지 말아야 합니다.

실력양성론이란 말은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결국 조선은 독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과 같은 것 아닙니까. 당시에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순서를 밟아야 한다면서 참정이니 자치니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요. 이런 자들은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일본 놈에게 아첨을 하며 떨어지는 밥풀로 배를 채우려는 겁니다. 이들은 지금 우리는 일본을 당할 수 없고 우리의 힘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일부분을 당할 수 없으니 순서적으로 먼저 자치를 얻고 후에 독립을 하자고 합디다. 이런 비루한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동시대인으로서 참으로 유감입니다. 심지어 독립 운동가 가운데서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없지 않았습니다.

자치, 참정뿐 아니라 실력을 준비하는 식산(殖産) 운동을 하자는 자들도 있었지요. 문화와 식산이 진흥되면 독립은 자연히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게 합리적인 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일제의 압박 하에 있는데 어떻게 문화와 식산이 진흥된다는 말입니까. 먼저 민족적 혁명을 이룬 뒤가 아니면 문화도 식산도 진흥될 수가 없지요. 혹자들은 제가 설립한 흥사단을 문화 운동처럼 이해합니다. 제가 강조한 교육이나 식산 운동은 어디까지나 독립 운동의 일부분으로서의 교육운동이고 식산운동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얻는 순간까지 독립 운동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교육을 하여 지식을 북돋우고 식산을 진흥해 경제를 키워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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