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 5. 16.(토) 10:00~13:00
■ 장소 : 서울역 1번 출구 집합
■ 코스 : 서울로7017-남대문교회-천주교중림동약현성당-성요셉아파트-서소문역사공원-서소문아파트-주한프랑스대사관-충정각-충정아파트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 5월16일 1회차 천주교중림동약현성당을 시작으로 10월 7회차 유교의 성균관 명륜당과 대성전 그리고 반촌 이야기까지 6개월에 걸쳐 각 종교의 서울 유입과 그들이 지은 건축물을 쫓아가 본다.

중림동약현성당을 찾기 위해 문화지평 답사팀은 5월16일 오전 10시 서울역 2번출구 강우규 동상 앞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했다. 이슬비와 가랑비 중간쯤 추적이는 비가 초여름 더위를 식혔다. 답사에서 비는 결코 좋은 동반자가 되지 못한다. 빗소리로 인해 집중이 어렵고 우산을 받쳐 들어야 하는 불편함 등 여러 단점이 있다. 특히 우중에 찍은 동영상 화질이 좋질 않아 맑은 날 찍은 영상과 합쳐서 편집하는 애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해설 포인트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감성이 묻어 있는 답사기로 나눠 기록했다.

서울로7017, 명물에서 흉물로 전락 다시 명물로 재탄생

▲ 위로부터 1970년 준공 당시 서울역 고가도로와 중간은 2000년대 차들이 지나던 때, 마지막은 서울로7017로 조성된 때 모습.

답사팀은 가장 먼저 서울역 광장에서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서울로7017’에 올랐다. 서울로7017은 준공 당시 명물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흉물로 전락했다가 다시 서울의 명물로 재탄생한 공간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서울로7017은 1970년에 지어 2017년 보행길로 재탄생했다는 의미를 가진 숫자다. 총길이 1.24Km 고가 보행로는 ‘중림만리동, 소공동, 명동, 남산 코스, 후암동 코스 등 주변 5개 지역과 걸어서 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1900년 경인선과 남대문 정거장이 설치되고 1925년 경성역이 준공된 후 서울역과 철도는 회현동과 중림동, 청파동 지역을 서로 나누고 가로막는 벽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1970년 산업 근대화의 상징물로써 지어지기 시작했고 그해 3월 퇴계로에서 동자동 구간 개통됐다. 1975년 만리재에서 퇴계로까지의 구간을 포함한 서울역 고가도로가 마침내 완공됐다. 이후 서울역 고가도로는 당시 대우그룹 빌딩과 함께 지방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한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대면하게 되는 서울의 첫 얼굴이자 상징적 구조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울의 고가도로는 1960년대 말 근대화의 상징이자 도시 교통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도시미관을 저해하는 흉물로 전락했다. 1980년 교통문제연구원이 서울시내 10개소 고가도로를 조사한 결과 교통 소통을 돕기는커녕 아예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1960년대 말의 고가도로 건설 근거로 작용했던 개념인 교통난 해결책과 근대화의 상징 기반이 1980년대 들어 흔들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흔들거리는 것은 개념만 아니라 실제로 고가도로가 ‘흔들거리며’ 안전이 문제 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일반적인 안전문제가 대두되고 1990년대 수차례 걸친 안전진단과 대규모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울역 고가도로를 비롯한 서울의 ‘고가도로’ 존재 자체에 의심이 커졌다. 이러한 때 마침 토건족 출신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면서 고가도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철거’라는 현실적 대안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서울역고가는 서울역 철로시설들에 의해 단절된 도심 및 남대문시장 일대와 서울역 서측지역 일대를 잇는 연결로의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연결도로였기에 무조건 없애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서울역고가는 오랫동안 만리동, 청파동, 서계동 일대 소규모 봉제공장과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오면서 산업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서울역고가를 산업유산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006년 말 서울역고가는 정밀 안전진단 안전성평가 결과 D급 판정을 받았다. 2008년에는 서울역 북부역세권과 연계하는 대체교량을 설치했으나 이듬해 철거를 추진했다. 2014년 교량 바닥판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는 등 안전성 문제가 제기돼 철거 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가차도 활용방안을 검토하라는 박원순 시장 지시에 따라 서울역고가 재활용 관련 구조안전성 검토(2회), 디자인·구조 전문가 합동회의(4회), 서울역고가 재활용 사업 효과분석(서울연구원) 등을 통해 민선 6기 공약으로 채택됐다.

재선에 성공한 박 시장은 2015년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지금의 서울로7017이 탄생했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중림동을 핫플레이스로 뜨게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24일 방문객 2000만명을 돌파하면서 성공적인 도심재생 사업으로 평가받았다. 답사팀은 서울로7017 길을 따라 서울스퀘어 쪽으로 내려가 남대문교회로 향했다.

서울스퀘어, 대우그룹 해체로 주인 5번 바뀐 서울 상징

▲ 서울 랜드마크인 구 대우빌딩은 주인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우여곡절을 가진 대표적으로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서울스퀘어는 이번 답사의 해설 포인트는 아니지만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1973년 대우그룹이 사들여 77년 지하 2층 지상 23층 건물로 완공했다. 당시로서는 서울서 가장 넓은 연면적을 자랑했다. 대우그룹 본사가 있던 건물은 대우가 해체되고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대우건설 인수에 무리수를 뒀던 금호그룹은 결국 ‘승자의 저주’가 됐다. 주인은 다시 모건스탠리 부동산 운용부분에 매각됐고 2009년 서울스퀘어란 이름을 달고 재개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모건스탠리는 건물을 싱가포르 계열 알파인베스트먼트에 손절 매각을 했다. 이를 NH투자증권이 사들였고 이를 다시 상장리츠인 NH프라임리츠, 삼성화재, 군인공제회, 농협중앙회 등 국내 기관투자가에게 매각하면서 주인이 다섯 차례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빌딩으로 남았다.

남대문교회, 최초 주일예배 드린 제중원 신앙공동체서 탄생

▲ 고려대 본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동진의 작품으로 고딕양식의 석조건물이다. 원래 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현 교회당은 1969년 새로 지어졌다. 교회건축물은 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1885년 6월21일 주일 저녁 조선의 첫 정주선교사인 알렌 선교사 부부, 미북장로회 제1호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은 헤론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 대부인(스크랜턴 선교사 어머니)이 알렌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함께 첫 공식주일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후일 남대문교회의 모태가 됐다.

감격적인 첫 공식주일예배는 이후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외교관 포크 등이 참석하는 정기적인 주일 예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885년 10월11일 루미스 목사의 설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가 집례 한 우리나라 최초의 성찬식이 행해졌다. 1886년 7월18일에는 알렌의 어학선생 노춘경이 헤론의 집에서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 국내 최초 세례식이 거행됐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공식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을 중심으로 모인 신앙공동체로 출발했다.

1887년 9월 헤론 선교사가 알렌에 이어 제중원 2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제중원의 병원, 교육, 교회의 기능이 강화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남대문교회의 역사도 1887년 11월21일 시작된다. 이후 1887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조직했다.

제중원은 1893년 에비슨 선교사 입국하여 제4대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했다. 1894년 9월26일 정부로부터 독립한 완전한 선교기관이 됐고 1904년 남문밖에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전문화된 의료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병원과 공존하던 교회는 1910년 전문화된 복음전파를 위해 병원건물에서 독립해 구내에 ‘남문밖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현재 교회당은 1969년 새로 지어졌다. 교회건축물은 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건축가 박동진(1899~1981)의 작품이다. 박동진은 보성전문학교 본관(현 고려대 본관), 영락교회, 조선일보 사옥, 아서원, 오산중학교, 중앙중학교 등을 지었다. 그의 작품은 ‘근대 합리주의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석조 고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중림동약현성당, 벽돌로 지은 최초 서양식 고딕 건축물

▲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지은 벽돌조 고딕 건물이면서 서울에 지은 첫 천주교 성당이다.고딕과 로마네스크양식 절충형이다. 답사팀이 약현성당 본당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중림동약현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지은 벽돌조 고딕 건물이다. 또 서울에 지은 첫 천주교 교회당이다. 엄밀히 따지면 고딕과 로마네스크양식 절충형으로 바실리카식으로도 분류된다. 바실리카란 로마재판소 형식을 초기 교회가 차용한 것으로 직사각형 혹은 정사각형 건물을 의미한다. 당시 기술과 재정으로는 고도화된 기술과 고비용이 요구되는 고딕양식으로만 짓기 어려워서 불가피하게 타협한 것이다.

건축사적으로 보면 벽돌로 지은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이다. 또 명동성당과 함께 1900년 이전 서양식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양으로부터 수용되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길이 약 32m, 너비 12m의 십자형 1층 구조로 지어진 약현성당은 6년에 걸쳐 지은 명동성당에 비해 매우 작았다. 그러나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일찍 지으면서 사전에 여러 핵심적인 요소들이 시험되고 채택됐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내부 공간의 분절화와 벽돌을 직접 생산하고 이형 벽돌 사용, 목재 볼트 등을 사용한 서양식 벽돌조 건축방법은 당시 초기 서양식 건축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건축가 이규빈의 해석은 다채롭다. ‘구조가 곧 건물이 된다’는 그는 “창문 모양, 뾰족한 첨탑이든 건물 외형은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로 덧붙여진 게 아니라 건물이 제대로 서있기 위한 구조적인 힘을 떠받치는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형태”라고 했다.

그는 중림동약현성당의 건축사적 특징을 리브볼트, 플라잉버트레스, 실내 피어(기둥), 목조경량천정, 벽돌 등에서 찾아내 분석했는데 “건축의 불모지던 한국에서 고딕양식의 교회당을 지어내는 데 성공한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와 프랑스의 감각, 일본의 구조, 중국의 기술 그리고 한국의 염원이 모두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멋진 작품”이라고 자신의 티스토리에 소개했다.

중림동약현성당이 위치한 약현은 과거 서울역에서 만리재로 넘는 곳으로 약초 재배 밭이 많아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렸다. 이를 줄여 ‘약현’이라 일컫던 것이 고개 부근의 지명이 됐다. 성당이 지어진 1892년은 100여 년간의 천주교 박해가 끝나는 시점으로 서울에 세워진 첫 성당이 됐다.

천주교는 17세기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다. 18세기 들어 양반과 중인들이 중국에서 교리를 배워오면서 확산됐다. 왕이 통치하는 봉건주의와 계급사회였던 조선에서 만민평등을 외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당연히 탄압의 대상이 됐다. 정조는 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했고 1791년 조선 최초로 천주교도 박해 사건인 신해사옥을 시작으로 순조1년(1801년) 신유박해, 헌종5년(1839년) 기해박해, 고종3년(1866년) 병인박해를 통해 천주교인 수천여 명이 참살됐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마침내 천주교 선교 활동이 이뤄졌다. 조선에서의 공식적인 종교의 자유가 시작된 셈이다. 늘어나는 신자를 수용하고 박해당한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이들을 처형하던 장소인 서소문 밖 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성당을 세우기로 했다.

1891년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와 시공 감독을 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이듬해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이자 성당 건축물인 약현성당이 탄생하게 됐다. 이규빈이 언급한 프랑스 감각과 중국의 기술이 예서 나온 말이다.

약현성당은 사대문 밖 경기도부터 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다. 사대문 안은 물론 명동성당 담당이다. 두세 신부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1895년 약현서당을 설립해 어린이를 가르쳤고 가명학교를 개설하고 약명학교를 세우는 등 아동교육에 힘썼다.

1954년 한국전쟁 후 가명학교 자리에는 성요셉의원과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를 개설해 의료인 양성과 극빈자 진료를 했다. 이들은 가톨릭대 의학부와 부속병원인 성모병원의 모태가 됐다. 1998년 어처구니없는 방화사건으로 소실됐다가 복원됐다. 그동안 중림동성당으로 불리던 것을 2007년 중림동약현성당으로 공식적인 이름을 바꿨다.

성요셉아파트, 자연에 순응한 무욕의 건축물

▲ 왼쪽이 언덕을 타고 오르며 지어진 성요셉아파트다.

중림동약현성당서 주차장 쪽을 바라보면 옅은 오렌지색 오래된 아파트 건물의 뒷면이 보인다. 이는 성당에서 지은 성요셉아파트다. 1개동으로 1970년에 지어진 아파트는 현재 68가구가 산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라는 수식이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성요셉아파트보다 앞선 세운상가(1968년 준공)가 이미 거대한 주상복합으로 지어졌고 미동아파트(69년 입주)도 1층이 상가로 설계됐다.

성요셉아파트의 건축학적 의미는 경사진 언덕을 깎거나 또는 언덕에 맞춰 건물 고를 올리지 않고 지붕이 수평이 되게 지었다는 점이다. 가장 낮은 곳은 7층이지만 언덕배기 아파트 끝은 3층으로 마감된다. 언덕의 높이가 아파트 4층 정도 되는 셈이다. 그래서 아파트 출입구마다 올라가는 층수가 다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한 건축으로 해석된다. 또 하나 특징은 지은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층간소음이나 하자가 없는 아파트로 알려졌다. 아마도 일반분양이 아닌 신자와 수도자를 위한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론 가능한 부분이다.

서소문역사공원. 핏빛 얼룩진 백사장 위에 조성된 추모 공간

▲ 과거 죄수들 참수 현장이었던 곳에 조성된 서소문역사공원. 천주교 시설물로 1999년 건립한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자리는 원래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피비린내 가득했던 곳이다. 성삼문, 허균 등이 이 언저리에서 처형됐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안교선, 최재호 등이 효시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군대해산에 반발해 일본군과 서대문전투를 치른 군인 등 사회개혁 세력들뿐만 아니라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이곳에서 처형된 천주교인 중 44명은 성인으로 추존된 바티칸에서 공인한 국내 최대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서소문 즉, 소의문은 아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문으로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사형집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집행됐다. 일종의 범죄 억제책이었는데 서소문 밖도 이런 이유에서 1416년(태종 16)에 주요 형장으로 지정됐다. 형장 위치는 서소문 밖 비탈진 언덕길 아래, 즉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옆에 있던 이교(나무로 다리를 놓고 흙으로 덮어 흙다리라고도 함)의 남쪽 백사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원에는 천주교 시설물로 1999년 건립한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높이 15m의 주탑과 13m의 좌우 대칭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도록 했는데, 이것은 천주교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주탑 앞부분에는 순교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조각이 붙어 있다. 중구청은 2013년부터 지하4층, 지상1층의 전시기념관과 추모공간이 있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해 2019년 6월부터 일반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편향된 공간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소문아파트, 대지 지분 없어 살아남은 역설의 건물

▲ 만초천 물길 위에 세워진 서소문아파트. 재건축 추진이 어려워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역설의 건축물이다.

물은 곧게 흐르지 않는다. 만초천도 구불구불 완만한 물길을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위에 지어진 집들의 위치와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소문아파트는 마치 하얏트호텔 건물 모양으로 곡선 형태로 지어졌다. 만초천을 복개하고 휘어져 흐르던 물길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자세히 보면 둥글게 휜 게 아니라 두 번 꺾인 모습이다. 경관을 해치지 않고 물길과 도로의 생김새에 맞춰 지은 또 하나의 자연순응형 건물이다.

하천 위란 이유 때문에 대지지분이 없다. 홍제천 물길 위에 지어진 유진상가, 도로 위의 낙원상가 등이 대지지분이 없는 대표적인 대형 건물이다. 재건축이 어려운 역설적 이유로 인해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뜩지 않았다. 2013년 서울시가 미래유산 지정을 추진했으나 주민들이 반대해 무산됐다.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놓으면 개발이 더더욱 어려워질까 우려했던 것이다.

주한프랑스대사관, 르 코르뷔지에 제자 김중업의 작품

▲ 1961년 건축 초기 프랑스대사관 전경. 김중업과 스승 르 코르뷔지에의 철학이 녹아있는 작품이다.[사진=서울역사박물관]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한국 근대건축의 1세대로 손꼽히는 김중업의 작품이다. 프랑스대사관은 상당히 경사진 지대에 지어졌다. 이런 지형을 이용해 김중업은 마치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양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대사관에 적용했다. 한 기사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김중업은 건축에서 시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조화시키려 했다. 이 조화로움의 정점이 1961년에 완공된 프랑스대사관이란 것이다.

김중업은 프랑스 태생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 비지에와 일하면서 그의 건물 실사설계를 담당했다. 당연히 엄청난 영향을 받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적인 미와 스승의 오브제를 결합시켜 자신의 작품 곳곳에 담았다.

프랑스대사관의 사무동 지붕은 한옥의 지붕선이 엿보이고 지붕을 중시한 르 코르뷔지에의 그림자도 언 듯 비친다. 김중업은 이 작품을 “나의 작품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고, 이것으로부터 비로소 건축가의 첫발을 굳건히 내딛게 되었다”라고 했다.

지금은 프랑스 건축가 다비드 피에르 잔리콩에 의해 약간 변형됐다. 대사관은 신축 때 변형된 사무동을 원래대로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현 프랑스대사는 필립 르포르로 지난해 9월 부임한 2급 전권공사다.

충정각, 레스토랑으로 변신한 120년 역사 양관

▲ 지금은 이태리레스토랑 충정각으로 변모한 120년 된 서양식 주택 앞에서 답사 마무리를 하고 있다.

충정각은 캐나다 건축가 헨리 볼드 고든(1855~1951)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1901~03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가에 대해서는 특정되지 않지만 고든이 조선에서 머물렀던 시기가 1901년에서 1903년으로 이 집의 건립연대로 추측되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을 비롯해 몇 가지 이유에서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초 건물주는 미국인 맥렐란 소유였다. 맥렐란은 1899년 8월4일에 입국해 한성전기회사에서 기사장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한성전기는 1909년 일본에 매각됐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경성에 살던 많은 서양인들이 본국으로 귀국했다. 이를 통해 이 집의 건립시기를 1900년대 초반으로 역산해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1931년 조선식산은행 비서과에 근무한 다카마쓰 류키치 소유가 되면서 증축이 이뤄졌고 현재까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56년부터 2006년까지 배금순 씨 소유로 유지되어 오다가 2007년 송연준 외 1명에게 매각돼 충정각이란 이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했다. 충정각 뒤에는 1906년 설립된 이명래고약(명래제약)이 있던 자리다.

충정아파트, 현존 가장 오래된 아파트 명성

▲ 1900년대 초기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로 지금은 식당과 복합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답사팀이 마무리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충정아파트의 준공연도는 관공서 문서나 문헌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한 준공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문 등의 자료를 통해 준공연도를 가늠해 보면 1930년이 우세하다. 건축물대장에는 1937년 8월 29일로 등록돼 있는 데 당시 관행으로 역산하면 1930년 초반에 건설됐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충정아파트의 최초 이름은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豊田種雄)가 설계한 데서 그의 이름을 따 도요타아파트 혹은 우리말로 풍전아파트라고도 불렀다. 대동강철교 피난민 사진으로 퓰리처상(1951년)을 받은 미국인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가 찍은 사진에도 충정아파트가 등장한다. 충정로는 한국전쟁 당시 시가전이 치열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용케 온전하게 살아남은 건물이다.

휴전이 되면서 미군정에 수용돼 유엔군이 머무는 ‘트레머호텔’(Traymore Hotel)로 용도를 달리했다가 ‘코리아관광호텔’을 거쳐 이후 70년대 유림아파트, 또다시 충정아파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평탄치 않은 90년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충정아파트는 오랜 시간 동안 증축과 일부 철거, 업종에 따른 개축 등을 거치면서 기존 아파트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그래도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 형식의 주거 건축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로7017‧남대문교회‧중구청‧주한프랑스대사관‧충정각 홈페이지‧이규빈 티스토리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약현성당 정밀실측 및 수리보고서, 2004, 동아원색
-약현성당 100주년사 편찬위원회, 약현성당 100주년사 기념자료집, 1992, 천주교 중림동 교회
-최석우, 약현 본당사, 1976, 약현천주교회
-내 손안의 서울 ‘서울사랑’
-20세기 초 서울의 서양식 저택 연구 :현존하는 7채를 중심으로, 2013, 한국예종미술원 허유진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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