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수식 정치학 박사

[미디어파인 칼럼=신수식의 정치학 박사의 세상읽기]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홍범도 장군이 일제와 맞서 싸운 영웅이라면, 백선엽 장군도 공산세력과 맞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발언에 대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히틀러도 한때는 독일의 영웅이었지 꿈이고 희망이고~", "나라 팔아먹은 친일 역적이 6.25 때 활약하면 영웅? 살인강도로 한밑천 챙긴 후 가난한 사람에게 장물을 나눠주면 영웅이니? 한심한...", "백선엽은 친일군인, 비리 사학업주, 부동산투기범, 박정희 생명의 은인 이기는 해도 영웅은 아님"이라는 댓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안철수 대표의 한심한 역사 인식에 탄식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반민족행위범죄에 대한 처벌이 과연 어떠했는지는 외국의 많은 사례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던 정치인의 한심한 역사 인식에 실망하면서 필자의 생각 또한 네티즌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과거 치욕의 36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불법합병으로 우리 조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고 백성은 피식민지배의 비참한 삶으로 전락하여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며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 항일독립세력들은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구하겠다고 가족을 떠나 만주와 중국 등에서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받쳐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진정한 영웅들이다. 하지만 친일반민족세력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며 항일독립세력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처형시키며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방해한 역적이었다. 이들은 반드시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대가의 처벌을 그 죄값에 비례해 받아야 했다. 하지만 친일반민족세력들은 해방 후 이승만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정부의 요직에서 부와 특권을 누리며 사회정의를 비웃고 국민통합을 방해했다. 이들은 해방 후 혼란기에 '황군'에서 '창군 주역'으로 변신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 때 공산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 전쟁 영웅으로 색칠되어 친일반민족행위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덮어 버렸다. 사실 그들의 변신은 곧 해방 후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들의 생존을 위한 변신의 한 방법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 그 어떤 군인도 6.25 전쟁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과연 친일반민족세력들이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한 군인이 되어 6.25 전쟁 때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것을 두고 영웅의 칭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도 합당하지도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제헌국회가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구성한 기구를 1949년 6월 6일 경찰 50여 명이 지금의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맞은 편에 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건물을 안팎으로 포위해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서류를 빼앗고 난장판으로 만들며 출근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중부경찰서로 연행하고 잡혀갔다. 이날 연행된 사람은 35명. 특위 위원과 직원 9명, 반민특위를 경호하던 특경대원 24명, 민간인 2명이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희대의 사건으로 이로써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의 조사기능은 출범 여덟 달 만에 마비된 이 날은 사실상 친일반민족행위범죄를 처단할 기회를 날린 '국치일'이라 할 것이다.

1948년 10월 12일 친일·반민족 세력이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한 반민족행위를 찾아내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의 당시 친일조사대상자는 7,000명 정도로 예상됐으나 여덟 달 동안 10%에도 못 미치는 682건을 조사했다. 그 가운데 221건을 기소했고, 재판 종결은 38건에 그치고 1949년 8월 31일에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됐으며 현재까지 풀지 못한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많이 언급되었듯이 오늘날 한국 사회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이며 해방 이후 75년간 우리 사회갈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친일 청산이 없이는 국민통합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남북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국민과 정치세력을 빨갱이, 북한 정권의 하수인으로 매도하며 이념갈등, 지역갈등, 국민분열을 조장하여 왔기 때문에 남남갈등이 더 확대되었다.

필자는 제헌의회가 1948년 9월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은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른 공소시효는 친일경찰의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 습격사건을 계기로 앞당겨져 1949년 8월 31일에 끝이 났는데 대해 분노한다.

필자는 '친일 청산'을 마무리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정의를 세우는 길이며 반민족범죄에는 결코 공소시효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제는 친일 청산을 위한 법적, 제도적 마련에 국회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 54%도 ‘한국전쟁 등 다른 공이 있더라도 친일행위자는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을 개정해 친일행위자들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국립묘지법의 목적대로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 및 공헌한 분들을 기리며 선양하는 장소'로 국립현충원이 확립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시작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친일 청산의 법적, 제도적 문제를 21대 국회가 해결해 주길 국민과 함께 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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