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임시정부는 말그대로 임시로 수립한 정부입니다. 주권도 영토도 잃은 상황에 해외에다 터를 잡은 것이었지요. 그 어려움을 말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특별히 임시정부 운영의 힘든 일을 말씀하신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기자 선생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리타국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데에 어려움을 어찌 한두 가지로 정해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시정부로서 정부의 요소는 대략 갖추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제약돼 있었고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의견 차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후손 여러분들이 알만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였다가 또 하나둘 등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재정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애초 임시정부의 중요한 임무가 독립 운동의 지속과 이를 위한 재정 모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교를 하든 전쟁을 하든 모든 것이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재정이 없으면 국제회의 참석 등을 위한 여비 지원도 어렵고 군사 설비를 하지 못하니 군대를 조직할 수도 없습니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에 저는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이에게 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돈 한 푼 갖다 주지 않고 일만 하라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임시정부 차원에서도 안정적 재정 마련을 위해 애국 공채 발행, 인구세, 구국 재정, 외채 발행 등 여러 방침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현실적인 문제군요. 후손들이 TV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국내에 있던 부호들이 논밭을 팔아서 독립 자금을 대고, 또 그러다가 집안이 망하는 모습도 많이 나옵니다.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재정은 어땠습니까?

“국내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 모아다 준 자금, 해외 교민들이 지원해주는 자금 등으로 운영됐습니다만 넉넉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내외에서 고된 노동을 해가며 자금을 모아다준 국민들의 고통에 비할까만은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의 요인들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도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이 매년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했었지요.

임시정부도 하나의 정부이므로 당연히 정부의 일을 추진하는 예산이 있어야 했고 나름의 재정 정책도 있었습니다. 기실 당시 우리 국민들의 경제관념은 극히 박약했습니다. 오랫동안 쇄국주의 정치 하에 있어서 경제적 경쟁 생활을 하지 못했고 유교의 영향으로 재물을 다루는 일을 천하게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일부는 경제관념이 깨어 있었지만 대부분 국민들은 생활과 사업에 경제가 어떻게 중요한 것인지 그다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요. 그러니 독립 운동을 시작하면서도 죽자고 운동을 하기만 하고 자금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3·1독립선언도 그랬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이 문제는 거의 도외시되었습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임시정부는 국민 개납(皆納)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어디 부자 몇 명의 지원을 받아 독립 운동을 하자말자가 아니라 독립 운동 기간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또 금액이 많고 적음을 논할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1전, 2전씩이라도 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먹고 살기는 할 것이니 밥 반 그릇을 덜어서라도 각각 독립 자금을 내고 또 거기에 자산가는 자산가대로 거액을 내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국민 개업(皆業)주의도 주창했습니다. 대한의 남녀라면 누구나 자기의 직업에 힘을 쓰란 것입니다. 노는 것은 독립 운동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수입을 받아 각자가 매일 4~5전씩, 아니 2~3전씩이라도 국가를 위해서 냈음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때 돈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독립하고자는 마음이야 다들 같았겠지요. 다만 생활이 어려운 분들은 독립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봐야 푼돈이니 그게 무슨 큰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합니다.

“국민 개납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국민 한명 한명이 내는 세금을 모아서 한해 몇 백 조씩 되는 예산을 마련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4~5전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국외에 있는 모든 대한 사람들이 그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저는 상해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우선은 국민 개납주의, 국민 개업주의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모든 국민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해 일제와 싸울 수는 없었으니 적게나마 자금이라도 지원한다면 독립 운동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었겠습니다.

“그 자체가 독립 운동이라고 해도 진배없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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