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각각 최고의 전문 킬러인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상대를 자신에게 완벽하고 환상적인 상대이며, 그런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이 자신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당연한 보상 또는 놓칠 수 없는 행운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여태껏 살아왔던 것과 상당히 다른 자신의 최고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마침내 주위의 조언을 무시한 채 결혼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오랜 습성으로 각자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집에 오면 함께 식사도 하고 나름대로 대화도 나누지만,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도 불분명한 채로, 뜨거웠던 감정은 언젠지 모르게 사라지고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관계로, 흔한 말로 ‘부부가 아닌 가족’ 상태로 되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속이는 것인지, 자신이 상대를 속이는 건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라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다가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상대가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각자의 마음에 새파란 비수를 품은 채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상대의 말과 태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상대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자신이 아니라 상대만을 탓하기 때문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아이로니컬한 것은, 사랑을 할 때보다는 사랑이 식어갈 때, 그리고 ‘설마 이런 건 모르겠지?’ 할 때 상대는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어 나름의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때문에 섣부르게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들이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곤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때야말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을 깨닫게 되지만, 문제에 빠져있는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상상도 못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일단은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또 상대가 굽히지 않는데 자신이 먼저 양보하면 문제가 고쳐지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도 결코 원하지 않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면 다시 함께 잘 살 수 있을까?’보다는 ‘상대를 어떻게 응징해야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될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상대에게 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말겠다는 강박 상태로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모든 피해는 상대 때문이라고 확신하여 더 큰 손실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그동안 최강의 적과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어, 그동안 자신을 속여온 상대를 응징하기 위해 또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영화처럼, 둘 중 하나 또는 두 사람 모두 죽게 된 결정적 순간에 각자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취약한 면을 상대에게 온전히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사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화해를 하려고 해도, 문제의 배후에는 더 큰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 의견 차이로 인한 싸움이 첫 번째의 전쟁이라면, 비로소 부부관계를 회복하려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두 번째의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경제난 또는 자녀 양육일 수도 있고, 각자의 가족적 배경이나 사회적인 압력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영화를 보면, 조직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을 양쪽 조직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물론 이들이 아무리 영화 주인공이라고 해도 수십 명의 킬러들이 죽는 동안 이들은 멀쩡하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장면을 부부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부가 이렇게 한 편이 되어 모든 장애물과 싸울 수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너무 높은 현실의 장애를 끝내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드물지 않겠지만, 함께 싸웠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들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리고 이 두 차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부부의 모습은, 그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게 됩니다. 즉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원인과 해결을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찾기 때문에 훨씬 쉽게 안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칠수록 서로가 가장 믿을만하고 고마운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상대를 위한 자신의 수고가 조금도 아깝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결혼생활을 포함하여 ‘산다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고도 하지만, 한때는 서로를 대하여 싸우던 이들이 한 편이 되어 바깥에 대하여 싸우게 하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부치료사’가 하는 일입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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