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레바논 공화국, 레바논(아랍어: 루브난, 프랑스어: Liban)은 중동 지중해 동부 연안의 다종교 국가로 수도는 베이루트다. 북쪽과 동쪽은 시리아, 남쪽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지중해와 경계를 이룬다. 세계의 작은 독립국가들 중 하나로 지형이 좁은 띠 모양이며 남북 길이 215km, 동서 최대 길이 약 90km이다.

지형적으로 서에서 동으로 4개 지형구로 나뉜다. 지중해를 낀 좁은 해안평지, 남북으로 뻗은 해발 2,000∼3,000m의 레바논 산맥, 이 산맥과 나란히 뻗은 175km의 기름진 알비카 계곡, 동쪽 국경을 이루며 남쪽 헤르몬 산까지 이어진 안티레바논 산맥이다. 유일하게 1년 동안 마르지 않는 리타니 강은 알비카 계곡 대부분을 관류하여 티레(현 수르) 부근에서 지중해로 흐른다. 전 국토의 경작 가능지는 16.4%, 농경지 13.7%, 기타 69.9%이다. 삼림지대가 많았으나 지금은 국토의 8%만이 숲이고, 수세기에 걸친 개발로 히말라야 삼목은 보호받는 산비탈 숲에서만 볼 수 있다. 광물자원은 거의 없다.

지중해성 기후지만 서풍을 막는 큰 산맥들로 다양한 기후가 있다. 여름에는 기온이 높고 비가 적으나 겨울에는 따듯하고 비가 많다. 연평균 27도, 연평균 강유량은 900~1,000㎜로 겨울철 우기는 11월말~3월이다. 강우량은 중동에서 높은 편으로 해안은 대부분 겨울이지만 연간 약 750∼1,000㎜가 오며 동쪽으로 갈수록 감소한다. 레바논 산맥의 고지대는 강우량이 최고 1,500㎜에 달하고 알비카에는 380∼630㎜의 비가 온다. 연중 약 300일간 맑은 날씨로 겨울에도 해안지역은 따뜻하고, 산간지역만 눈이 내리고 혹독한 추위인데 이제는 해안 지방에도 간혹 눈이 온다. 여름에는 해안지역은 드물게 40도 이상으로 덥고, 산간지역은 따뜻해서 레바논에서는 봄에 산에서는 스키를 타고, 해변에서는 해수욕을 한다.

역사를 보면, 레바논은 좋은 항구덕에 옛날부터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B.C 3000년경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를 근거로 티루스(현 티레), 시돈, 비블로스(현 주바일) 등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이집트와의 상업 및 종교 교류는 B.C 2613년경 시작되어, 아모리인이 페니키아를 침략할 무렵(B.C 2200경)까지 계속되었다. 페니키아를 지배한 집단은 힉소스인(B.C 18세기), 신왕국시대의 이집트인(B.C 16세기),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인(B.C 14세기) 등이 있다.

이집트 신왕국의 세티 1세(B.C 1290∼79)는 페니키아의 대부분을 다시 정복했으나 람세스 3세(B.C 1187∼56)가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온 침략자들에게 빼앗겼다. 이집트 지배 후 앗시리아(B.C 10세기)가 서쪽으로 진출하던 동안에 페니키아의 역사는 주로 티루스가 주도했다. 페르시아 키루스 2세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B.C 538년 이 지역을 점령했고 티루스 북쪽 시돈은 제국의 해안도시가 됐다. B.C 332년 티루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되며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B.C 64년 페니키아는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합병되고 티루스에 해군기지가 설치됐으며, 서기 300년대에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395년 레바논은 비잔틴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6세기 시리아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친 그리스도교도들이 레바논 북부에 정착하여 원주민들을 흡수하여 마론 교회를 세웠다.

7세기에 이슬람교도가 시리아를 정복한 뒤 아랍화, 이슬람화가 진행됐다. 400년 뒤 이 아랍인의 많은 사람들이 드루즈교로 개종했고 해안도시에는 수니파가 늘어났다. 11세기말 레바논은 십자군이 세운 나라의 일부가 되었으며, 12세기까지 셀주크투르크와 십자군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뒤 시리아와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1250~1517)에 편입됐다. 1516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됐다. 1842년 오스만 투르크가 드루즈파의 시하브가 지방통치를 종식시키자, 마론파와 드루즈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들의 반목은 1860년 드루즈파가 마론파 그리스도교도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상태가 됐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해 오스만의 술탄을 압박하여 레바논 산에 1861년 마론파 그리스도교인들의 산악 자치주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며 1920년 4월 산 레몬 회의에서 베카고원 등의 내륙도 그레이터 레바논에 합병되었다. 레바논은 프랑스가 시리아를 독립시킬때 마론파가 다수인 프랑스령 시리아의 서남부 해안가를 분리 독립시킨 곳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레바논은 프랑스 군정과 위임 통치를 받았다.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이 되었고, 1943년 1월 독립을 했다. 1945년 프랑스가 물러가고, 1946년말 레바논은 완전히 독립했다. 독립 레바논 정부는 1943년 국민협정에 따라 운영됐다. 이 협정은 각 종교집단들이 동등한 대표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마론파 그리스도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국민의회 의장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에서 뽑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레바논은 중립주의 민주주의에 경제적 자유화정책으로 아랍국들의 물자와 정보 제공의 중간자적 역할로 금융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8∼49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 남부의 난민촌에 다시 정착했다. 1958년 범아랍주의에 힘을 얻어 레바논의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군 도움의 중앙정부가 진압했다. 1970년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중심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됐다. 이후 레바논의 이슬람교인의 수가 증가하며 마론파 기독교도들의 우위는 무너지고 불안이 심각해졌다.

1970년대초 PLO가 월경하여 이스라엘 북부를 수 차례 습격하자 레바논 정부는 PLO 군사활동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받았고, 마론파들도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대항하는 팔랑헤(Phalange) 민병대를 결성했는데, 이스라엘이 민병대를 지원했고 지금도 팔랑헤 민병대 정당인 카테브당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면서 PLO는 레바논 이슬람교도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연합해 1975년 2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지원 이슬람교도와 팔랑헤 민병대를 결성한 마론파 기독교도들의 내전이 일어났고,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밀리자, 시리아는 1976년 11월 이스라엘의 개입과 레바논 내의 그리스도교도들을 막기 위해 레바논에 약 2만의 군대를 보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PLO 소탕을 위해 서베이루트를 완전히 포위하고 2개월간 맹폭했다. 그해 8월 미국의 중재로 PLO는 서베이루트에서 퇴거했다. 이후에도 1982년 9월 기독교 민병대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사건, 1983년 7~9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각 파에 의한 내전 격화와 미국 해군의 함포사격, 1983년 10월 미국 및 프랑스의 주둔 본부에서의 폭탄테러사건 등 분쟁이 지속됐다. 1984년 1월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이슬람교도 세력과 정부군, 기독교 민병대의 내전이 다시 격화됐으며, 미국 해군은 이슬람교 민병대 거점에 재차 함포사격을 가했다. 그해 2월 이슬람교 세력이 총궐기하여 서베이루트를 제압했으며, 3월에는 시리아의 주도 아래 정전이 실현되었다. 1985년 이스라엘은 철수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에 모인 의회의 구성원들은 마론파 그리스도교 대통령, 수니파 이슬람교도 총리, 시아파 이슬람교도 국민의회 의장에 합의했고, 총리와 국민회의 의장의 권리가 확대되었다.

레바논은 주로 국제무역과 금융, 중계무역, 그밖의 상거래에 기초를 둔 시장경제로 움직인다. 전통적으로 중동의 상업과 재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계속된 내란과 외국 군대의 개입으로 지위가 서서히 약해졌다. GNP의 약 10%인 농업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농업은 지중해를 낀 해안과 알비카 계곡에서 주로 행해지는데, 농장은 규모가 작고 세분되어 있다.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해서 많은 양의 채소류와 고기를 수입한다. 밀이 주요 작물이며 사과, 감귤류, 포도와 대마잎이 주요 환금작물이다. 염소와 양을 주로 키운다. GNP 14%인 제조업은 소규모지만 중동의 타 국가들에 비해 발달한 편이다. 예로부터 직물과 가공식품이 산업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전쟁으로 숙련 노동력이 귀해져서 1980년대에는 시멘트, 밀가루, 종이 등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주요 수출품은 식품, 화학섬유, 보석, 섬유제품, 금속제품이고 수입품은 전자제품, 자동차, 광물자원, 의류 등이다.

레바논은 종교 종파별 안배주의 균형이 정상적으로 작동이 않되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다. 독립 당시 마론파 기독교도가 힘의 우위로 정치적 합의에 따라 기독교계가 대통령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다수인 이슬람교계의 힘이 강하져 대통령은 이슬람계의 지원 없이는 국정 운영이 어렵고 선출 자체도 불가능하다. 대통령제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각각 64명의 의원이 할당되어 총 128명으로 의회가 구성된다. 정당인 헤즈볼라는 테러 단체로 취급받는다. 팔랑헤 민병대의 기독교 마론파 카테브당은 이스라엘의 지지를 받는다. 1926년 헌법에 따라 행정권은 대통령이,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국민의회가 장악한다. 사법제도는 프랑스 제도를 본떴다.

레바논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2018년 인구는 6,093,509명이다. 레바논인들은 인종적으로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의 피가 섞인 혼혈종이다. 레바논의 인구 구성은 아랍인이 90.6%(레바논인 71.2%, 팔레스타인인 12.1%, 크루드인 6.1%, 기타 아랍인 1.2%), 아르메니아이 6.8%, 기타 2.6%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일부에서는 프랑스어를 아랍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한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알아듣는 식자층의 폭이 넓으며, 상당수의 레바논인이 3개 국어를 구사한다. 주민 대부분이 아랍어 상용자이며 터키어와 아르메니아어, 아람어의 상용자가 소수 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교도(수니파 27%, 시아파 27%) 54%, 그리스도교도(마론파 21%, 동방정교 8%, 멜키트 그리스 카톨릭 5%, 기타 6.5%) 40.5%, 드루즈파가 약 5.5%를 차지한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함께 공식적으로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지 않은 아랍 국가로 여러 종파를 인정한다.

레바논은 2007년 2월 10일 레바논 국회의 징병제 폐지안에 따른 헌법 개정으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다. 레바논은 미국의 무기지원국 중 5위에 속한다.

교육은 의무교육제가 아니며 6년의 초등과정과 3년의 중등과정, 3년의 고등과정으로 되어 있다. 레바논은 아랍 세계에서 문자해독률이 높은 나라다. 100년 이상된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교 등이 카이로와 함께 아랍세계의 학술 중심지 역할을 한다. 고등교육기관은 주로 사립이다.

온화한 기후에 경치가 아름답다. 주 유적지로는 베이루트 북쪽 주바일 신전, 시돈 교회의 묘지 유적, 로마시대 유적으로 베카 고원 발베크의 주피터 신전, 바쿠스 신전등이 유명하다. 그외 트리폴리, 주바일, 시돈 등의 해안 성채 등이 있다. 지중해안의 여러 파안지와 휴양지가 발달했다.

중동의 진주 ‘레바논(Lebanon)’은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Lebanon’은 레바논 산맥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셈어 조어 ‘laban(white)’이 성서 히브리어 ‘ləbānôn’을 거쳐서 최종 ‘Lebanon’으로 정착을 했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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