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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과의 인연 [김문 작가]

기사승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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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영화 <암살> 스틸 이미지

일왕 저격 김지섭

-도쿄 왕궁 진입을 시도한 것이 그때쯤인가요.

“그러니까 의열단원 김지섭입니다. 1924년 1월 5일 저녁 도쿄의 궁성 앞 이중교(二重橋)에서 왕궁 진입을 시도하며 세발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세발이 모두 불발됐지만 의열단원이 왕궁 앞까지 와서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 그날을 택했습니까.

“1923년 9월1일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일본군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많은 동포들을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열단원들은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나도 기회를 봐서 보복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신년을 맞아 동경회의가 열리고 총독 이하 각 대관이 모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김지섭이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김지섭은 어떤 사람입니까.

“경상도 안동 태생인데 한학에 능하고 일어도 한달만에 독학으로 배워 능통했습니다. 단번에 지방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을 채용됐는데 경술년에 강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키자 그만두고 중국으로 와서 의열단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도 한국 강점 죄악사와 총독통치의 악행 및 경제수탈의 실상을 질타하고 대일 항쟁의 당위성을 설파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기필코 싸우겠다고 선언했지요.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 중 1928년 2월 20일 형무소 독방에서 4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소원조차 이루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김삼웅씨의 ‘약산 김봉원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의열단원들에 의한 암살. 파괴활동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니었다. 개별적, 부차적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원봉은 계속되는 의열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지켜보면서 일열단의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김원봉은 이 무렵 이념체계에 있어 다소 방황했던 흔적이 보인다. 임시정부 개조파나 적기단과 협력한 것, 그리고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에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된 것이 그 증거이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 운동이 동양 각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국내의 한 신문이 1925년 초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차이점과 일치점’이라는 기획난을 만들고 한용운, 최남선, 현상윤, 주종건, 김찬, 조봉암 등 저명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글을 실었다. 또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는 신채호,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과 김원봉의 글도 게재했다. 김원봉의 위상은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들 과 같은 반열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게 될 만큼 성장했다.

장개석과의 인연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투쟁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고민이 많을텐데요.

“고민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김지섭이 일본 왕궁 앞 2중교 폭탄사건 이후 의열단에 대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공한 것도 있지만 실패한 것도 많았습니다. 혁명열기는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즈음 손문을 만나게 됩니다. 손문은 군사, 정치 인재를 양성하여 혁명의 전위로 삼기 위해 광주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국공합작과 소련의 지원으로 창설된 군사정치학교로 열혈 청년들이 우러러보는 신교육의 요람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황포군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 간부 진과부가 장개석 앞으로 써준 소개장을 받고서 상하이를 떠나 광주로 향향했습니다. 1926년 봄이었습니다. 나와 일부 단원들은 새로운 군사정치기술을 배워 일제와 싸우기로 하고 이 학교 교장인 장개석을 방문하여 입교를 허락받았습니다. 이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암살과 파괴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때 중국혁명의 선결과제인 제국주의 세력과 유착한 군벌정권을 타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열단원들도 이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조국 광복전쟁의 예비체험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민중의 일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략구도의 변화는 더욱 굳어지고 대일 무장투쟁의 추동이 새 노선으로 확정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의열단원 몇 명이 입교를 했나요.

“1926년 1월에 황포군관학교 4기로 우선 핵심단원 15명이 입교해 군사교육을 받았고 3월에 5기로 80명이 입교했습니다,”

-그렇다면 본거지를 상하이에서 광주로 옮긴 셈이네요.

“혁명근거지를 광주에서 새로운 무대에서 서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인적 자원의 확충과 군대조직의 기초마련, 군사조직 운용기법의 터득 및 전술능력 제고라는 두 측면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조성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광주에 있게 됩니까.

“황포군관학교의 설립은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하고 국민혁명을 완수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학교에는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다수의 소련군사고문단과 공산당원들도 참여해 명살상부한 ‘국공합작’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 8월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황포군관학교도 폐교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열정을 바친 것으로 압니다. 이때 백범 김구가 방문해 학생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고 자료에 나오던데요.

“맞습니다. 1934년 4월 초순 백범이 간부학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조선혁명을 위해 최후까지 분투할 것을 격려하고 조선해방은 일본과 소련이 개전할 때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만년필 한 개씩을 선물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나는 국제정세 추이로 봐서 멀지 않아 미일전쟁이 일어나고 여기에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조선독립이 가능하리라고 내다봤습니다. 학생들에게도 희망적인 분석을 통해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지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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