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조선혁명선언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단재 신채호와 만남

-대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이 선언문을 필독서로 지정해 단원들의 지행합일의 정신을 갖도록 했습니다. 나는 인쇄소에 ‘의열단선언’ 인쇄를 부탁하고 별도로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문서를 작성하고 이 두 문건을 군내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냈습니다. ‘의열단선언’은 5개 부문으로 돼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담임을 천명했습니다. 두 번째는 3.1운동 이후 국내에 대두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문화운동론을 일제와 협력하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매섭게 규탄했습니다. 세 번째는 임시정부의 외교론, 실력양성론, 준비론 등의 허실투성이인 독립운동 방략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네 번째는 일제를 몰아내려는 새로운 혁명이념으로 민중, 폭력의 두 요소를 바탕으로 아나키즘적 민중혁명과 폭력 철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5가지 파괴, 5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5가지 파괴는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이며, 5가지 건설은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민중,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재는 폭력적 암살, 파괴, 폭동 등의 목적물을 열거했습니다. 1. 조선총독 및 관공서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서 3. 정탐노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등으로 말입니다.”

-‘의열단선언문’ 이후 새로운 의열투쟁으로 전개됩니까.

“그렇습니다. 김상옥은 1923년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3시간동안 일경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서대문경찰서 경부 구리다 외 여러명을 사살하고 자결했습니다. 의열단원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여 수명의 사원과 경기도 경찰 경부보들을 사살한 뒤 권총으로 자결했습니다. 이밖에도 대구부호암살계획, 북경밀정암살계획 등 의거는 계속됐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의열투쟁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됐고 공공기관이 파괴됐습니다. 일제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요.”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의열단이 이러한 투쟁을 하는 동안 임시정부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했습니까.

“임시정부와는 의열단이 해체될 때까지 항상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둘 다 3.1운동 발발의 토양 위에 성립하여 조국광복을 분투했다는 점과 의열단의 본거지와 주 활동무대가 임시정부 소재인 상하이 중심이였다는 점에서 숙명적인 만남이었지요. 다만 임시정부는 다양한 세력의 결집체인 정치기관이었던 반면, 의열단은 한 구성인자로 포섭될 수준의 하위조직체였다는 점이지요. 갈등과 긴장의 관계가 연속되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나 역시 상하이의 임정 요인들과 계속적인 연락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임시정부와 관계가 틀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1922년 3월 황포탄 사건때 임시정부와는 하등의 관계 없다고 임시정부가 뒤로 물러서자 의열단은 실망했고 이런 분위기에서 신채호가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선언으로 천명하고 암살파괴운동의 정당성과 이념적 논거를 제공받게 됐다고 할 수 있지요. 이후 관계가 이전보다 요원해졌습니다.”

신채호의 조국을 향한 선언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새로운 의열투쟁이 시작되면서 의열단에 가입된 단원은 어느 정도 됩니까.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동안 상하이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해 독립운동계의 연안을 논의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모여들게 됩니다. 국내, 상하이, 만주일대, 북경, 간도 일대, 미주 등지 대표 125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것이지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안건도 대두됐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각기 자기 세력에 유리한 입장으로 맞섰기 때문이지요. 의열단은 국민대표회의가 국내외 세력간 주도다툼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끝나면서 수많은 애국자와 독립운동단체들이 그동안 치열하게 싸워온 의열단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많은 열혈청년들이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이때 국내외를 합쳐 1,000명이 넘어섰습니다.”

다음은 김삼웅씨의 ‘약산 김원봉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열단의 명성이 높아지고 세력이 강화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 계열이 제휴를 시도해왔다. 개조파였다. 개조파측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것은 창조파의 독선 탓이라고 지탄하면서 의열단과 제휴하여 창조파 세력을 몰아낼 것을 제의해왔다. 의열단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개조파가 고수파와 협조하여 임시정부를 개편했고 본거지를 북경에서 상하이로 옮겼다. 이로써 의열단은 상하이에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된 것이다.

이 무렵 김원봉은 임시정부청사로 임정 내무총장 김구를 방문해 향후 독립운동방향 등을 협의하고 적기단(赤旗團)과의 연합을 통한 국내활동 강화를 모색했다. 적기단은 1920년대 북만주와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 조직이었다. 연안현에 본부를 두고 단원이 한때 13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이 컸던 조직이다. 적기단은 의열단의 활동을 모방하고 일제요인의 암살과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활동했다. 적기단은 1924년 초봄에 의열단원들과 손을 잡고 결사대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리고 왕세자 히로이토를 비롯한 일제 군정 최고 수뇌부를 일거에 폭살시키고 주요 건물을 폭파할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김원봉은 국내외 항일단체뿐만 아니라 대만의 항일단체와도 국제적 연대를 시도했다. 또 의열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몽골지역을 주목하고 그곳에 단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몽골에는 다수의 한국 청년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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