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이란은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공화국이며, 수도는 테헤란이다. 이란은 사막보다 해발 460m 이상 고원지대에 2,000m 이상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저지대는 이라크와 국경 주변의 카룬 강 유역과 페르시아 만, 오만 만 주변의 좁은 연안지대, 카스피 해 주변의 연안 늪지대뿐이다. 대지 절반 이상이 염분 사막과 사람이 못사는 황무지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1년의 절반 동안 눈 덮인 곳들도 있다. 이란 최고봉 다마반드 산(5,604m)이 있는 북부 엘부르즈 산맥과 이란에서 가장 큰 남부 자그로스 산맥이 있다. 국토는 엘부르즈 산맥과 카스피 해 사이의 협장한 평야지대, 엘부르즈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에 둘러싸인 이란 고원 본토, 자그로스 산맥 남쪽의 페르시아 만 연안지방의 3개의 지형구로 나뉜다.

대륙성 기후로 기온의 연, 일교차가 크다. 연강우량은 테헤란이 230mm로 사막, 스텝 기후를 보이는데 비해, 카스피해 연안은 1,000mm 이상으로 아열대 식물도 자라며 쌀도 재배된다. 내륙 사막은 강수량이 100㎜도 안된다. 강은 계절천으로 내륙을 흐르는 물길은 대부분 해안 늪지대로 흘러가며 카룬 강만이 배가 다닌다. 페르시아 만 주변 여름은 55℃인 반면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겨울은-37℃에 이른다.

역사를 보면, 사람이 정착한 시기는 구석기 초기(B.C 100000년경)로 올라가나, 문자로 기록된 문명은 B.C 3000년경 엘람인들과 시작되었다. 중앙아시아 초원 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아인들은 B.C 4000~3000년 무렵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됐고 일부는 이란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됐다. 인도에 간 이들은 드라비다인을 남으로 내몰고 현재 인도의 다수인 인도-이란어파 사용자의 조상이 됐다. 이란에 처음 페르시아인들이 등장한 시기는 B.C 12~ 9세기다. 흑해 북부 러시아 남부지역에서 아리아 족이 남하했는데, 파르사족과 메디아족이 대표적이다.

메디아 왕조(B.C 728∼550년)의 메디아족이 파르사족을 지배했다. 파르사족 키루스 2세가 B.C 533년 메디아 왕조를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고 조로아스터교가 유입됐다. 이 왕조는 전제군주제로 다리우스1세는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 불렀다. 주변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강성해졌다. B.C 4세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을 당했다.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파르티아인들에게 무너지며 파르티아 제국(B.C 247)이 세워졌다. 지배층은 유목민이라 중앙집권보다 소공국들의 연방국가 형태로 페르시아족과 쿠르드족, 아프칸족 등이 소공국을 형성했다.

제국은 로마 제국과 전쟁에서 패하지 않은 강대국으로 오랫동안 유지됐다. 하지만 국력이 쇠하며 파르스의 이란 민족 사산인들에게 정복됐다. 226년에 건국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강력한 군주체제를 구축했고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을 숭상했다. 사산 왕조가 비잔틴 제국과 전쟁으로 약화되자, 아라비아를 장악한 이슬람군대가 640년 침입했다.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650년 이란 전역을 정복했다. 칼리프 국(650~661) 후 우마야드(661~750) 왕조, 압바스(750~821) 왕조, 이란인인 사파르 등의 여러 왕조, 셀주크 투르크 왕조(1037~1220) 등 비이란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219년 몽골의 침입(1219~1381)으로 일 한국에 편입됐으며 다시 몽골계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왕조의 지배(1381~1501)가 됐다.

1502년 이란계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1736년까지 지속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사파비 왕조는 압바스1세 통치기(1588년~1629)에 정치적, 문화적 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8세기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1724년), 아프칸 왕국의 침공(1731년) 등으로 1736년 멸망했다. 이 시대 국교인 시아파 이슬람교는 오늘날까지 이란의 국교다. 이후 1779년 카자르족 지도자 아가 모하마드 칸이 이란의 재통일에 나섰고, 1794년 카자르 왕조가 세워져 1925년까지 이어지며 근대 이란의 모체가 됐다.

나세르 옷 딘 샤 아들 모자파르 옷딘 샤는 무능력자로 1906년 입헌군주제를 강요받았다.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이 분할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중립을 선포했으나 석유 때문에 서양세력의 전쟁터가 됐다. 20세기 초 폭동이 수차례 일어났다. 무능한 그의 아들 모하마드 알리 샤는 러시아의 도움으로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의회 정부를 철폐하려 했다. 하지만 1909년 쫒겨나고 아들 아흐마드 샤(1909~25)가 즉위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은 기근과 경제 붕괴로 1921년 쿠데타가 발생해, 레자 칸이 1925년 카자르 왕조 제거 후 레자 샤 팔라비로 칭하며 팔라비 왕조가 시작됐다. 1935년 국호 페르시아를 이란으로 바꾸고, 1936년 궁정 여성들이 베일을 벗기 시작해 전역으로 퍼졌다.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가 1941년 9월 16일 즉위했다.

2차 대전 후 국제 연합 창설 회원국이 되었으며 1951년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이란의 현대화, 서구화를 착수하며 1962년 백색 혁명으로 종교 재단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서구 문물 유입으로 이슬람 사회 변질을 우려한 종교 지도자들이 반정부 운동을 주도했다. 1963년 6월 호메이니의 반백색혁명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970년대 경제 성장에도 불만이 높아졌고, 샤가 이를 탄압하며 반정부 운동이 강화됐다. 1978년 2월 타브리즈 폭동 등 반 팔라비 운동이 강화되며 1979년 혁명으로 무너졌다. 루홀라 호메이니는 귀국해 1979년 이슬람 공화국 건국을 주도했다. 1979년 3월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로 4월 1일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980년 1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1대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당선되며 4월 7일 미국과 외교를 단절했다. 그 해 9월 22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해 1988년 휴전하였다.

1981년 7월 24일 모하마드 알리 라자이가 대통령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국기를 변경하고 남녀 공학을 금지했다. 10월 2일 제3대 대통령에 알리 하메네이가 당선되고, 1985년 제4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989년 6월 3일 호메이니 사망 다음 날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로 피선되었다. 라프산자니는 1989년 7월 28일 제5대와 1993년 6월 12일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현재는 하산 로하니가 2017년 재선되어 대통령을 재임하고 있다.

최고 정치권력은 최고 종교지도자에게 있다. 종교지도자는 헌법수호위원회 위원 성직자 12명 중 6명을 임명한다. 위원회는 단원제 국회 이슬람 자문회의(마질레스)에서 통과된 법의 합헌성과 이슬람 교리에 대한 충실성 여부를 심의한다. 마질레스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270명 의원으로 임기 4년이다. 행정부는 대통령과 총리가 이끄는데 임기 4년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선출되며,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 후 마질레스의 승인을 받는다. 최고 사법권은 대법원과 최고 사법위원회를 구성하는 종교 재판관들에게 부여된다. 이란의 종신제 최고 지도자는 간선제 투표로 뽑고 무한한 권력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외교를 주관하며, 국회는 탄핵을 결의할 수 있다.

경제는 석유회사 등 국영과 농업 및 상업, 벤처 서비스업 등 민영 기업의 혼합경제체제이다. 석유 의존 경제의 다각화를 위해 자동차, 가전,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의약품 제조, 석유화학 공업, 핵 산업 등에 투자한다. 석유 생산 재개로 재정이 안정되고 자유시장의 개시로 농업, 공업의 국내 생산이 증가했다. 세계 석유매장량 10%, 세계 제5위 석유 생산이 중심인 광업은 GNP의 1/4 이상, 노동력의 1/5을 담당한다. 천연가스 매장량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비축, 보급하는 국영시설은 중동 최대규모다.

석탄, 구리, 철광석도 매장량이 많지만 미개발 상태다. 경제 제재로 리알 가치가 폭락했다. 2016년 1월 16일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잘 이행해 제재는 해제됐지만 핵문제로 미국과 갈등한다. 농업 부문은 국내총생산의 약 1/5이고, 취업 인구의 55%가 농목업에 종사한다. 식량은 상당 부분 수입한다. 농경지는 국토의 10%로 1/4은 목초지로 이용되는데, 이란 고원의 농경지는 오아시스 주변에만 있다. 관개가 되는 농경지 1/3은 사막과 산맥 사이의 변두리 구릉지대에 있다.

국토 1/8인 삼림은 대부분 카스피 해 주변에 있다. 주요 농작물은 밀, 보리, 감자, 야채, 면화, 쌀, 옥수수, 사탕무, 사탕수수, 담배, 포도, 멜론 등이며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차, 오렌지 재배를 한다. 대추야자, 피스타치오, 화훼 등 수출용 농업 생산물의 확대, 대규모 관개로 농업은 경제 부문 중 성장이 빠르다. 근해 어업이 수출(특히 철갑상어알)에 기여한다. 그밖에 직물(양탄자), 가공식품, 자동차, 전기기구, 철, 강철, 시멘트 등이 생산된다. 전력의 4/5 이상이 연료로 생산되며, 나머지는 수력발전으로 충당된다. 수출품은 석유 관련제품이 대부분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전기 제외), 철강, 곡물, 운송장비 등이다.

도로망은 잘 정비됐고, 도시 교통은 전적으로 택시, 버스에 의존해서 체증이 심하다. 테헤란 지하철은 남 녀 칸이 분리됐지만 혼용도 있다. 버스도 여성은 앞, 남성은 뒷칸이다. BRT 버스는 전용차도가 있어서 체증 심한 테헤란에서 유용하다. 테헤란에서 서쪽으로 자동차전용 고속도로가 이어져 있다. 원거리 버스노선도 발달해 테헤란의 4개 주요 터미널을 이용하며 북, 서유럽 나라와 운행된다. 철도는 테헤란을 중심으로 페르시아만연안, 카스피해연안, 아제르바이잔, 호라산, 케르만에 통한다. 이란에는 9개의 국제 공항이 있으며, 국내는 주로 테헤란과 지방간 노선이며 지방도시간 연결은 드물다.

2018년 기준 8,201만명으로 인구의 3/4이 도시에 거주한다. 페르시아인(마잔다란인, 길라키인) 61%, 아제리인(아제르바이잔) 16%, 쿠르드인 10%, 루르족 6%, 발루치족 2%, 아랍족 2%, 투르크멘족 2%,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시리아인, 바흐티아리족, 유대인, 아시리아인 등이 있다. 서부 산악지대에 쿠르드족과 페르시아 원주민계의 루드족이 살며, 이스파한 서쪽 자그로스 산맥에 바흐티아리족이 산다.

공식어는 페르시아어로 터키어, 쿠르드어, 아랍어 등도 사용된다. 투르크계의 비율은 적지만 이란인의 1/4이 튀르크어 속 언어를 사용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다리어,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어도 페르시아어에 포함된다. 루르족과 바흐티아리족, 발루치족 모두 페르시아어 방언인 루르어를 사용한다. 페르시아어는 B.C 7세기~ B.C 4세기 쐐기문자로 기록했으나, 7세기 말 이슬람 문화가 이란에 전파되면서, 아랍 문자와 비슷한 알파벳으로 표기한다.

여성들의 히잡은 서구의 스카프처럼 목과 머리의 일부를 가린다. 수도 테헤란의 여성들 중에 차도르를 입는 경우는 드물고, 팔과 다리를 노출하지 않는 긴팔의 상의와 바지를 입는다. 이란은 춘분인 3월 2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겨서 서구의 새해 첫날 1월 1일은 평일 공휴일로 했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이슬람교 99.4%, 기독교 0.16%, 조로아스터교 0.03%, 유대교 0.01% 등이다. 이슬람교 신자의 92%는 시아파 중 열두이맘파고 나머지는 수니파다. 서구의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 대신 금요일을 주말로 한다.

5년 초등은 의무교육이나 농촌은 부모 반대, 시설부족 등 미취학 어린이가 많다. 중등교육 제도는 발전 수준이 낮아, 주로 소수 학생들에게 대학입학 준비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나, 교육열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남녀 공학은 금지되어 있다.

네자미, 페르도우시, 오마르 하이얌 등 세계적인 시인과 모스크를 비롯한 여러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 양탄자는 그 예술성이 세계적이다. 대표적 관광지는 테헤란의 Saad Abad 궁전, Niyavaran 궁전, 야즈드 사원, 역사박물관, 테헤란 바자르, 이스파한의 이맘광장, 반크교회, 알리카푸 궁전, 하쥬다리,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 낙쉐로스탐, 마샤드의 이맘레자 사원, Tus, 타브리즈의 블루모스크, 라사드 호네, 야즈드의 불의 신전 및 저메모스크, 카스피해 부근의 휴양도시 라쉬트, 람샤드 등이 있다.

페르시아 대제국 ‘이란(Iran)’은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Iran’은 루스탐 릴리프의 3세기 비문에 처음 기록된 중부 페르시아 ‘Ērān(아리아인)’에서 직접 유래되어 ‘irân’을 거쳐 최종 정착을 했는데, 이란인을 지칭하는 ‘Aryān(아리안)’ 용어가 파르티안 비문에 있다. B.C 4세기~A.D 9세기 인도-유럽어족의 중부 이란어 ‘ērān’과 ‘aryān’은 ‘ēr-(중부 페르시아어)’와 ‘ary-(파르티아어)’의 간접 복수형인데 둘다 인도-유럽 공통기어 ‘ar-yo-(닮은 사람)’에서 기원한 이란어 조어 ‘arya-(아리아인)’에서 유래되었다. 신화에 따르면 국명은 전설적 왕자이자 형제들에게 살해된 약칭 ‘샤’란 이름의 ‘Iraj’에서 유래되었다. 이란은 서구에서 그리스 역사가들 때문에 ‘Persia(페르시아인들의 땅)’로 불렸지만 ‘Persis’는 현재 ‘Fars(파르스)’로 불리는 고대 이란의 지방명 중 하나였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499–449 B.C) 이후 용어 ‘Persia’가 지속됐다. 1935년 3월 Reza Shah는 국제사회에 국명을 ‘Iran’으로 할 것을 요청했다. 오늘날 문화적으로 ‘Iran’과 ‘Persia’를 다 쓰지만 국가 공식문서에는 ‘Iran’을 쓴다. ‘Persia’는 고대 페르시아어 ‘Pārsa(중남부 지방 파르스)’가 고대 그리스어 ‘Persis’로 유입됐고, 라틴어 ‘Persia’를 거쳐 최종 정착했다. 파르사족은 B.C 12~B.C 9세기에 이란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한 아리아족의 무리로 중남부 지역 파르스 지방에 정착했기에 지역명에서 ‘페르시아’가 나왔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