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전통시장 가치재조명‧관광자원화]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미래유산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장의 가치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을 시장 3곳을 대상으로 수행한다. 1회 차는 ‘건어물 성지’로 불리는 중부‧신중부시장, 2회 차로 구로공단의 역사와 함께 한 구로시장, 마지막으로 전통과 현재의 공존이 아름답고 가히 서울생활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풍물시장을 기록한다.

■ 과거
50년대 시장 형성·2014년 서울미래유산 지정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의 미래유산 공모사업 일환으로 ‘시장의 가치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을 시장 3곳을 대상으로 수행했다. 1회차는 중부‧신중부시장, 2회차는 구로시장, 3회차는 서울풍물시장의 과거-현재-미래를 기록으로 남긴다.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시장’을 표방하는 서울풍물시장은 보통 시장과 달리 개발논리에 의해 이동을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은 독특한 시장이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삶속에 수많은 애환이 담겨 있고 그들이 취급하는 오래된 물건 속에도 다양한 사연이 숨어 있는 흥미진진한 곳이기도 하다. 흔히들 서울풍물시장을 ‘고물이 보물 되는 중고 명품 장터’로 부르고 있다.

황학동에 물산이 몰리게 된 배경

▲ 서울 동쪽 교외 왕십리 등지에서 생산된 제품이 황학동에 모인 후 도심으로 들어가 최종 소비됐다. 도심에서 생산된 제품은 황학동을 통해 서울 외곽으로 유통됐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품목은 쌀, 채소 같은 식재료였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대표적인 물품은 중고품들이었다. 황학동은 이들 물산이 오가는 결절지였다. 사진은 황학동벼룩시장이 시작된 1960년대 말 좌판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옛 상인의 모습. [사진=서울풍물시장 제공]

18세기 후반 시전상인, 공인, 개인상인에 의해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됐다. 도고(都賣)상업이 행해지면서 종로구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을 하나의 시장권으로 조성했다. 도고상업이란 수송능력과 정보를 기초로 독점과 지역 간 가격 차이를 발생시키는 상업 행위를 말한다.

당시 종로구 일대는 청계천을 포함한다. 청계천에 위치한 황학동은 조선 초부터 왕십리 일대에 속해 있었다. 왕십리 일대는 채소밭으로 도성 주민의 식재료를 공급했다. 뚝섬에서는 땔감이 났고 얼음을 운반하는 통로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동대문 성 밖인 황학동에는 사대문 안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큰 시장이 서게 됐다.

반대로 도심에서 생산된 제품은 황학동을 통해 서울 외곽으로 유통됐다. 외곽으로 나가는 대표적인 물품은 중고품들이었다. 황학동은 이들 물산이 오가는 결절지였다. 왕십리와 황학동 일대는 사대문 안팎의 주민들 생필품이 모이고 매매되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동기다.

일제 강점기 우리 농촌은 미곡수탈과 토지정책으로 농민층이 몰락했다. 농민들은 1920년대부터 꾸준히 도시로 이농했다. 아무런 물적 기반 없이 도시로 들어 온 이들은 도시 내에서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늘어나는 이들을 흡수할 만한 여력은 없었다. 이농민들은 도시 내에서 토막민이란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고 생계유지를 위해 시장으로 나갔다. 토막민은 청계천변에 토굴을 짓고 살았던 이들을 말한다.

전통적인 상점가인 종로는 조선인 상점가로 유지됐지만 취급 상품의 상당량이 수입이거나 외부에서 들어 온 공산품으로 채워졌다. 또 주택가 상점, 상설소매시장, 도심의 상점, 백화점이 등장하는 시기를 맞는다. 일제에 의한 도시화로 인해 몇몇 일본인을 중심으로 특정 주류는 부를 축적하는 한편, 대다수는 자영업자, 봉급생활자,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로 기본적인 생활비도 벌기 힘든 하층민이었다.

이들은 상설시장 등 모양을 갖춘 시장과 상점 보다는 노천시장, 임시시장, 노점, 행상과 같은 영세상인을 찾아다니는 데 익숙했다. 이처럼 도심 중심부에서는 새로운 소매상업이 등장해 소비문화가 양산되고 반대편엔 영세시장과 이를 이용하는 하층민으로 채워져 경제적 이중 구조가 서서히 만들어졌다. 이런 경향은 광복 후에 더욱 심화된다. 해방 직후 사회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미군의 원조 물자에 의지하게 된다.

1953년 휴전 성립 이후 외국 원조를 통한 경제 재건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경제성장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권한을 허락하는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소수 대기업 중심의 자본 축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른바 재벌의 등장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우리 경제가 대기업이나 재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구조적 모순을 낳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한국전쟁 후 청계천변 판잣집‧고물상 들어서

▲ 한국전쟁 직후부터 청계천변에는 판잣집이 다시금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진은 1962년 청계천변 판잣집 모습.[사진=서울역사편찬원]

1946년 종로구와 중구 일대 동대문과 남대문을 비롯해 도매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곡과 채소가 집산되는 도매시장으로서 성동시장이 설치되는데, 이는 남대문, 동대문시장과 더불어 서울 3대 시장으로 손꼽혔다.

해방 후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된 황학동과 왕십리 일대는 한국전쟁을 겪은 동안 불타거나 부서져 사라졌다가 휴전 후 청계천 양쪽 천변을 중심으로 다시 판잣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곳 거주민들은 생계유지로 고물상을 시작했고 골동품과 고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대규모 이농으로 도시 지역의 인구가 증가했다. 창신동, 숭인동 일대 인구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다. 이 지역은 여전히 서울서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17세기 무렵 지방에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고 흉년이 겹치면서 몰락한 농민들이 국가에서 구휼책을 내놓자 창신동 등 서울로 몰려들었다.

또 일제하 경성부 인구 집중 과정 속에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전쟁 전후 창신동 비탈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판자촌이 들어섰다. 도시빈민들은 개인적으로 소유권 분쟁이 없는 낙산 기슭 산비탈이나 청계천 변의 공유지에 거처를 만들었다.

서울시는 1968년 12월 주택난 해소와 판자촌 정비를 목적으로 하는 ‘서민아파트 2000동 건립계획’을 세웠다. 이때 창신숭인지구도 1,653㎡(500평)이 선정됐다. 이듬해 일대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낙산시민아파트 28개동을 지었다. 시민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더 늘어 출근길이면 어깨를 부딪치며 골목을 내려왔을 정도였다.

인구가 많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초등학교 학생 수다. 1970년 당시 창신국민학교는 무려 122학급 1만166명의 학생 수를 기록했다. 이듬해 학생 일부를 떼서 명신국민학교로 분리했다.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어른들도 많았다는 반증이다. 창신동과 청계천변 판잣집에 모여 사는 이들은 생계를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든다.

전쟁을 겪은 후 유일한 생계유지 장소로 시장이 활용됐고 전쟁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군수품이 유통됐다. 청계천에 고물상이 유입되던 당시는 남대문, 동대문시장이 점차 팽창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남대문, 동대문시장은 일제시대부터 유통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 하다가 전쟁을 겪은 후 상업인구의 증가와 미군 구호물자의 유입으로 더욱 큰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남대문, 동대문 시장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역을 아우르는 도매시장으로서의 기능하고 있다. 이들 시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게 아니다. 남대문시장은 칠패시장, 동대문시장은 이현시장 등 조선시대 만들어진 시장이 발전한 것이다. 양대 시장이 포화되자 이승만 정권은 가운데 중부시장을 만들었다.

중부시장이 들어서기 전에 군용품, 원조물자 등이 거래되던 국제시장은 황학동벼룩시장으로 유입되거나 그 언저리에 남아 업을 이어갔다. 그 흔적이 아직 종로5가 신진시장에 군용품을 파는 상점으로 남아 있다.

황학동 벼룩시장이 초기 형태

▲ 1971년에 만들어진 청계고가로. 아래로는 청계천이 복개됐다. 이로 인해 일대가 상업지구, 본격적인 벼룩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사진=서울역사편찬원]

전쟁 직후까지는 청계천변 판자촌에서도 고물상 이외에 미군물품 등 군용품을 파는 노점상이 난립했다. 1950년대 황학동에는 이처럼 고물상 세력이 강했다. 1957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원조가 대폭 줄어들게 되면서 황학동은 남대문, 동대문시장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유통구조를 갖게 된다.

당시 이름은 황학동벼룩시장, 황학동도깨비시장으로 불렸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중구, 종로구 일대에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등 우리나라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주요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황학동은 이들 주변 시장과 연계해 물품 유통의 마지막 통로이자 중고물품 유통 시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황학동벼룩시장은 서울의 경제거점인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자리 잡으면서 전국 최대 규모의 중고품 유통 시장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황학동 벼룩시장 형성 이면에는 일제시대부터 꾸준히 증가한 이농민을 포함한 도시빈민 계층 거주지로 도심에서는 소외된 공간이다. 이는 황학동벼룩시장이 도시빈민의 생계유지를 위해 형성됐다는 것이다.

1969년 청계 고가도로 건설, 1973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완료되고 주상복합건물인 삼일시민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일대가 상업공간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지금까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등 주변 중심 상권에 편입되지 않고 사회문화적 배경의 변화에 따라 주요 거래 물품이 바뀌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1970년대 골동품, 고가구, 헌책방이 주요 상점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에서 수집된 공동품 중에서는 종종 진품도 나왔다. 이 소문에 골동품상들이 몰려들었고 수집가들도 따라 모이기 시작했다.

황학동벼룩시장에는 한때 골동품상 130여 개가 밀집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86아시안게임 때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장안평에 골동품상가를 새로 짓는다. 그리고 황학동에 있는 골동품 상점을 장안평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이 때문에 황학동은 골동품은 물론 중고서점도 같이 쇠락했다. 그 틈새를 당시 폭발적으로 증가한 전자제품이 주요 물품들이 채웠다.

1990년대에는 음반 비디오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들을 취급하는 유통점이 중심에 자리했다. 이러한 상점과는 반대로 노점은 꾸준히 헌옷류, 만물류를 비롯해 각종 잡화, 성인용품, 군용품을 취급하면서 주변 빈민계층의 생활용품을 공급했다.

청계천 복원사업 1차 철거…DDP 공사로 2차 철거

▲ 청계고가를 없애고 청계천 복원사업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이 같은 황학동벼룩시장의 배경으로 인해 무질서하게 보이는 시장 구조는 사실 나름의 질서를 갖고 형성 유지됐다는 평이다. 황학동벼룩시장은 주변 상권과 비슷한 규모로 전국 유통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고품을 취급하기 때문에 주변 상권과 다른 역방향 유통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황학동벼룩시장은 정상적인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중고품을 처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중고품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황학동벼룩시장은 시세를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고 시대적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공약이었던 청계천 복원사업은 2003년 7월1일 착공, 2005년 9월30일에 완공됐다. 황학동 벼룩시장 노점상을 비롯해 청계천변 노점상에 대해 서울시는 보상과 관련한 특별한 대책이 없었다. 청계천 노점상들은 수 십 년간 자체적으로 공간을 구획해 영업을 해왔다. 시장을 형성하는 공간에 있어서도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어떤 보상도 보장받지 못할 처지에 놓이자 2002년 8월 한 노점상이 분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할 정도였다. 노점상들의 생계 터인 청계천변 인도 폭은 공사 이후 절반인 3m로 줄게 되자 설계변경을 요구했으나 묵살됐다. 공사 착공 4개월만인 2003년 11월 노점상들에 대한 강제철거가 집행됐다.

서울시는 대안으로 철거 노점상들에게 동대문운동장과 동묘역 부근 주말 벼룩시장을 제안해 2004년 1월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세훈 서울시장으로 바뀐 후 2006년 디자인콤플렉스건립계획을 발표하면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기로 했다. 2003년에 이어 두 번째 철거에 따른 강제 이전이었다. 물론 어렵사리 합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시장사(市場史)에 유래가 없는 공권력 집행이었다.

이에 앞서 전국노점상총연합, 한국프로야구협회 등 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동대문운동장 철거반대와 보존을 위한 공동대책위’는 ‘동대문운동장 철거 반대와 보존을 위한 100인 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시에 대해 동대문운동장 철거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5년에 지어진 근대 최초의 체육문화시설로 스포츠역사문화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동대문운동장을 리모델링해 경기장과 스포츠박물관, 공원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디자인 서울’을 부르짖었던 오세훈 시장은 그곳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짓고 운동장을 비추던 조명기둥 2개와 성화대를 기념으로 남겼다.

당시 동대문운동장내 풍물벼룩시장에서 940개 점포 노점상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생계대책은 당시에도 뾰족한 게 없었다. 마침 2005년 학교이전으로 비어있던 옛 숭인여중 부지가 대체지로 부상했다. 2008년 8월 우려곡절 끝에 894개 점포가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다양한 이름을 가진 독특한 벼룩시장

▲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생계 터를 잃은 상인들을 동대문운동장에 수용해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을 열었다.

목선경 씨는 1996년 ‘얼과 문화’ 6월호에 ‘황학동 벼룩시장은 해당 이름 외에 중고품 시장, 도깨비 시장, 개미시장, 고물시장, 만물시장, 마지막 시장 등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전국을 벼룩 뛰듯 돌아다니며 희귀한 물건을 모아온다는 뜻, 혹은 물건들에서 벼룩이 금방이라도 기어 나올 것 같다는 의미에서 ‘벼룩시장’이라 한다. 오래되고 망가진 물건이라도 감쪽같이 새 것이 된다 해서 ‘도깨비시장’이다. 삼일아파트에 상인들이 대다수 거주할 때는 비가 오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개이면 다시 노점을 펴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시 나온다 하여 ‘도깨비시장’이라 하기도 한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하여 ‘개미시장’이라고도 한다. 한국 전쟁 이후 각종 고물을 취급해서 ‘고물시장’, 없는 물건이 없이 다 있다 해서 ‘만물시장’이라고도 불린다. 구식이 되어버린 물건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라 하여 ‘마지막 시장’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황학동벼룩시장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이름을 달리했다. 황학동벼룩시장의 굴곡진 운명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느낌이다. 처음 시장이 형성됐을 때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다가 공식적인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에 장을 펼쳤을 때는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동대문운동장과 지역의 다양한 물건을 의미하는 풍물, 그리고 그동안 사용했던 벼룩시장을 부분적으로 차용해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동대문이 주는 세련됨 때문에 풍물벼룩시장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 단점이 있었으나 장소성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 현재
세 번째 이름 ‘서울풍물시장’ 개장

▲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옛 숭인여중 자리에 자리를 잡은 서울풍물시장.

옛 숭인여중 자리에 서울풍물시장으로 자리 잡기까지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003. 7. 1 청계천복원사업 착공
- 2003. 11 청계천변 노점상 강제철거
- 2004. 1. 16 동대문풍물벼룩시장 개장(총 894점포)
- 2005. 9. 30 청계천 복원 완공
- 2006. 9. 19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 발표
- 2007. 8. 21 옛 숭인여중(신설동) 자리로 이전 합의
- 2007. 9. 20 위탁관리업체 선정
- 2007. 9. 26 시민공모로 새 이름 서울풍물시장 확정
- 2007.11~ 서울풍물시장 건축공사(신설동) 개시
- 2007. 12. 18 동대문운동장 철거 시작
- 2008. 4. 26 이전 개장(동대문->신설동)
- 2014. 5. 16 서울풍물시장 활성화 기본계획 수립

서울풍물시장에 대한 2013년 서울미래유산 선정 당시 기록을 보자. ‘옛 풍물과 일상생활용품, 관광, 토속 상품, 민속 먹거리 등을 저렴하고 편안하게 먹고 즐길 수 있는 풍물 한마당이 어우러진 시장이다. 원래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 풍물시장은 황학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황학동 벼룩시장에는 오래된 풍물 물건이나 상품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우리나라의 벼룩시장 또는 만물시장을 대표했다.

황학동과 청계천변 노점 상태로 운영 중이던 황학동벼룩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주변 노점상을 정리해서 2004년 초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으로 이주하여 영업을 했다. 2006년에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이 발표되면서 관광산업과 연계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물시장 개발을 위해 2007년에 시유지인 동대문구 신설동에 세계적인 풍물시장을 목표로 공사를 착수해 노점 894점을 입주함으로써 2008년 4월에 새로운 쇼핑의 명소가 될 서울풍물시장(Seoul Folk Flea Market)을 개장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각종 골동품, 희귀 레코드판, 필름카메라, 축음기, 외국의 장식품 등 실생활에서 보기 힘든 물품들이 판매되고 있어 과거의 추억을 발견하고 옛날 생활 풍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장터이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전통과 현대의 멋이 공존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쇼핑명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기록과 지금 현재 모습은 큰 변화가 없다. 그만큼 서울풍물시장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때로는 거꾸로 흐르는 곳이다. 레트로 감성을 중요시 여기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힙’한 곳이다.

옛 숭인여중 부지에 둥지 틀어

▲ 서울풍물시장은 현재 자리로 이전 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풍물시장은 2008년 4월 26일 정식 개장했다. 청계천 복원 전 황학동벼룩시장에 있던 노점 상인들이 청계천 복원공사에 밀려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으로 내몰렸다가 DDP 공사 때문에 다시금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서울시는 80억원을 들여 총면적 7941㎡에 2층 철골 구조를 세우고 철골 지붕에 천막을 씌운 형태로 한자 ‘천’(川)를 형상화했다. 서울풍물시장은 청계천으로부터 100m, 지하철 신설동역으로부터 130m 거리에 있고 태생지라고 할 수 있는 황학동과는 불과 1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뒷골목으로 점포들이 이어지면서 이 곳을 찾는 고객들에게는 거의 같은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의욕적으로 문을 연 서울풍물시장은 개장 1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손님이 절반으로 떨어져서 상인들과 서울시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서울풍물시장상인회 정성태 회장은 “현재는 상인회와 서울시 간의 원만한 의사소통으로 만족하고 있다”며 “다만 숭인여중 잔여 부지 개발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빨주노초파남보 재미난 공간 구획

▲ 서울풍물시장은 취급하는 물품에 따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로 구분하고 지역을 구획했다. 소비자가 편리하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서울풍물시장은 온오프 전반적인 관리가 잘되는 곳이다. 서울풍물시장은 서울시에서 관리운영 민간위탁 기관을 선정한다. 시비로 관리운영비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위탁사무는 서울풍물시장 활성화와 시설관리 등 관리 운영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기업마인드로 전문적이고 조직적으로 온오프 관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민간위탁 기관 선정 결과 현재 맡고 있는 백상기업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서울풍물시장은 건물 전체를 품목에 따라 무지개 색깔로 구분하고 있다. 빨강동은 음식점, 주황동 구제의류, 노랑동 생활잡화, 초록동 골동품‧만물, 파랑동 스포츠의류‧명품 남성복‧작업복‧ 군복, 남색동 생활잡화, 보라동 레저용품‧카메라‧의류 등이다 2층에는 60~70년대 서울 시내 상점가를 재현한 테마존인 청춘1번가가 있다.

옛날 아날로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청춘이발소와 다방이 실제 영업중이고, 60,70년대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청춘사진관’을 비롯한 복덕방, 국밥집, 전당포, 만화방, 문구점, 풍금 소리가 울려퍼지는 추억의 교실 등 ‘청춘’에 대한 향수와 이야깃거리를 테마로 꾸몄다. 풍맛골은 오뎅, 호떡 등을 파는 야외 식당가다. 후문 입구에 위치한 전통문화체험관은 유료나 무료로 전통 소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초등학생들 체험활동 공간으로 인기가 좋다.

■ 미래
온라인 판매‧주차타워 건설 등 다변화 꾀해

▲ 서울풍물시장은 온라인 판매, 주차타워 건설 등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서울미래유산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감추지 않았다.

서울풍물시장은 전통시장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문화관광형시장, 글로벌명품시장, 골목형시장, 지역선도시장 등의 육성사업자가 되질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상인들끼리 콘텐츠 다변화와 내실을 기해서 발전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서울풍물시장은 상인들 인터넷 교육을 통해 온라인 판매계획을 준비하는 등 판매전략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또 주요 집객요소인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고 현재 1층 노면 주차장을 타워형 주차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주말에는 주차를 하기 위해 30분 이상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 불편을 줄여서 고객을 끌어들인다는 방침이다. 또 서울시에 대해서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만큼 홍보마케팅 분야에서 더 많은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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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시장의 매력 포인트(상인과 콘텐츠)

“전 세계 유일무이한 없는 게 없는 시장”…서울풍물시장상인회 정성태 회장

▲ 서울풍물시장상인회 정성태 회장이 문화지평 서울미래유산 아카이빙팀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정문쪽 현관 좌측에 붙어 있는 서울미래유산 동판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화지평 서울미래유산 아카이빙팀 전상봉 해설사가 지난 12월20일 서울풍물시장상인회 정성태 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정 회장은 서울풍물시장 초대회장을 거쳐 5, 6대 회장을 연임하고 있다. 동대문풍물벼룩시장 시절 다섯 개 지역 대표들이 있었다. 서울풍물시장으로 이전한 후 통합총회를 열어 정 회장을 뽑았다. 정 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문답식으로 풀어 본다.

-풍물시장은 한마디로 어떤 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나?

“우리 풍물시장은 옛날 것과 현대가 고루 갖춰져 있는 시장이라고 보면 된다. 박물관에도 없는 옛날 화석, 운석, 우리 조상들이 썼던 물건, 매일 희귀한 물건을 찾기 위해 인사동 수집상들이 오고 있을 정도다. 없는 물건이 없는, 없는 거 빼놓고 다 있는 전 세계를 찾아 봐도 유일무이한 시장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온다.”

- 어떤 외국인들 오고 있나?

“주말이면 동남아인들이 오고 평일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동남아인들은 우리나라에 근로자로 건너 온 사람들로 구제용품을 많이 구입해 간다. 본인들이 직접 작업복으로 쓸만한 물건들 같은 것을 주로 산다. 유럽쪽 관광객들은 독특하고 한국미가 담겨 있는 골동품 같은 것을 사간다. 동남아와 유럽의 구매 물품과 구매력에 차이가 있다.”

- 주로 어떤 품목이 많이 팔리나?

“대표적으로 골동품의 경우 소매로도 많이 나가지만 인사동, 근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 같은데서 구입을 많이 해 간다. 구제의류 같은 것은 광장시장, 남대문시장, 지방 의류점에서 많이들 사가서 장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건은 본인들이 수집광고를 통해 구하고 구제는 수집소에서 골라 오는 것이다.”

- 가끔 희귀한 물건도 나오나?

“상인회 사무국장이 가지고 있지만 희귀한 우표가 있다. KBS쇼진품명품에서 무려 1억원의 감정가를 받은 우표다.”(옆에 있던 사무국장은 현재 우표가 모 은행 금고에 보관돼 있다고 했다.)

- 빈지티 상품을 사기 위해 젊은층 고객도 많이 오나?

“지난해 건물 냉난방 공사를 완료했다. 내부 환경도 지난해와 달리 깨끗해졌다. 주말이면 가족단위 고객, 젊은층 고객이 많이 늘었다. 시설현대화가 가져다 준 변화라면 변화다. 전반적으로 손님은 많이 늘었지만 구매력은 경기 탓인지 늘지 않았다.”

- 언제가 가장 경기가 좋았나?

처음 이곳으로 이전했던 2008년도가 매우 활성화 됐었다. 흔히 말하는 ‘오픈발’이 있었던 시기다. 그리고 지금이 그나마 조금 나아진 상황이다. 고객이 많이 늘었다. 주말이면 상당한 고객이 온다. 불황일수록 잘 팔리는 특수성이 있는 시장이다. 구제나 골동품 물건만 좋으면 팔릴지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중간수집상들이 가져간다.

- 서울풍물시장의 자랑과 매력은 뭔가?

옛것을 다 가지고 있고 서민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장이다. 생활용품부터 다양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장이 없다. 1차 식품인 먹는 것 빼놓고 나머지는 다 있다.

서울풍물시장 명물인 ‘3대 장인’

▲ 서울풍물시장에서 장인으로 인정받은 3인방.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태규 구두장인, 강희연 악기장인, 이영달 시계장인.

주황동 62호에서는 김태규 구두장인 명품구두를 팔면서 수선을 하고 있다. “단언컨대 나만큼 광을 잘 내는 사람은 못봤다”는 김 구두장인은 세상에 어떤 구두도 광을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김 구두장인은 “허리를 굽혀 쉼 없이 작업하는 순간 구두와 혼연일체가 된다”며 “구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초록동 80호는 강희연 악기장인은 명품악기 수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건강 때문에 문을 자주 열지 못하고 있다. 문화지평 서울미래유산 아카이빙 팀이 이틀을 찾았지만 계속 문이 닫혀 있었다. 강 악기장인은 평소 “나무로 만든 악기지만 인격적으로 대하면 대화가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다. 17세때 처음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에 잠을 설쳤다는 강 악기장인 이후로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청음을 깨우쳤다고 한다.

남색동 157호는 이영달 시계장인이 명품시계를 전문적으로 수리하고 있다. 이 시계장인은 “인생에 단 하나뿐인 결혼예물 시계, 멈춰버린 소중하 추억을 되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나이 지긋한 손님의 인사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장인은 시계수리만 50년을 훌쩍 넘겼다. 이 장인은 “멈췄다가 다시 작동하는 시계를 보면서 살아 있음의 의미를 알게된다”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계를 고쳐)읽어버린 시간을 되살려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들 장인들의 존재는 시장의 휴면웨어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서울풍물시장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황학동벼룩시장과 이어지는 거대한 구제 상권은 세계 언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업문화콘텐츠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독특함과 최근 들어서는 젊은 층이 좋아하는 ‘힙’, ‘레트로’ 요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매력을 가진 곳이다. 100년 후 후손들에게 물려 줄 보물인 서울미래유산이라는 공인된 타이틀도 이곳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이는 요소다.

▲ 문화지평은 서울시의 지원으로 중부‧신중부시장, 구로시장, 중부시장 등 3회에 걸친 ‘시장의 가치재조명을 통한 관광자원화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기록화작업의 필요성과 어려움을 동시에 알았고 여러 숙제를 남겼다. 기회가 계속된다면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시장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적극 고민할 것이다. 촬영과 인터뷰에 협조해 준 시장관계자들과 시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아키비스트(Archivist)]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前 기자, 칼럼니스트)
김범준 한국교사강사연합회 협동조합 대표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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