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말레피센트2’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판타지로 확장했다면 ‘스노우화이트’(안느 퐁텐 감독)는 ‘백설공주’를 꽤 현실적으로 구체화했다. 클레어(루 드 라쥬)는 아버지 사후 계모 모드(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호텔을 운영하며 산다. 모드는 제 연인이 클레어에게 흑심을 품은 걸 알고 살인을 교사한다.

외진 숲속에서 클레어가 총살될 찰나, 때마침 멧돼지 사냥을 나온 피에르의 오발로 구조된다. 그는 쌍둥이 동생 프랑수아, 첼리스트 뱅상과 함께 사는 자기 집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그녀는 카페에 취업해 나름대로 성취감도 느끼는 가운데 자신에게 특별히 친절한 일곱 남자들과 각별한 관계가 된다.

유일한 서점 주인 샤를르, 그의 아들인 수줍음 많은 태권도 사범 클레망,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신부 길보, 그리고 뱅상의 친구인 수의사 샘 등과의 교류는 지금껏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그녀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게 해준다. 한편 그녀의 생존을 아는 모드가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3개의 세계가 있다. 모드가 추구하는 왜곡된 에피쿠로스의 세계, 클레어가 사는 욕망이 거세된 세계, 그리고 일곱 남자들이 사는 모든 게 자연스러운 라살레트 마을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마음껏 펼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써 진정한 쾌락을 찾는 것.

그러나 모드는 그렇지 않다. 호텔에서 그녀는 새빨간 슈트 차림이고, 클레어를 직접 처리하기 위해 승용차를 운전하고 이동할 땐 빨간 장갑을 끼고 있다. 그녀는 클레어의 호텔 지분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클레어가 자기의 단 한 명의 남자를 ‘훔쳤기’ 때문이다. 욕망 때문에 눈이 멀었다.

마을에 와 보니 모든 남자들이 클레어에 푹 빠져있다. 더 깊어진 질투심은 “예전의 공주에서 이제 모든 남자들의 여왕이 됐어”라며 클레어를 향한 살의에 억지로 당위성을 부여한다. 클레어는 13살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뒤 모든 걸 포기하고 관성적으로 살았다. 욕구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고, “넌 내 친딸 같아. 밖에 나가서 좀 즐기렴”이라는 모드의 가식적인 애정의 진위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진 그녀는 자아를 방치한 채 쉼 쉬듯 습관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납치와 살인미수라는 크나큰 위기는 외려 욕망의 실체를 깨닫는 기회를 제공했다.

모드의 욕망은 직선 위의 전진과 후퇴라는 아주 평범한 방식이다. 부자와 결혼했고, 그가 죽자 전문 경영인과 연애 중이다. 그저 그 남자만 내 것이면 된다. 그녀는 “요즘 여자들이 순정이 어딨어”라고 말한다. 클레어는 다수의 남자들과 동시에 연애를 한다. 순정이란 건 애초부터 없는 것이었다.

그 욕망은 다분히 자크 라캉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윤리는 욕망의 만족’이라고 했다.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욕망은 도착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욕망은 동물적이고, 변태적이며, 자본주의적일까? 외려 그 반대다. 그는 성 도착증에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욕망을 추구했다.

그가 상극인 욕망과 윤리를 한 데 묶은 이유는 전통적인 윤리가 기득권이 지키고자 하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봤기 때문이다. 욕망의 억제는 체제에 순응시키는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신분석에게 ‘욕망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오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클레어의 연애에 자연스러운 합리주의를 부여하는 건 아니다. 모드의 어긋난 집착의 병폐를 강조하기 위할 뿐. 모드는 클레어에게 ‘집으로 가자’고 종용한다. 아마 다른 주주들로부터 경영권 사퇴 압박이 있을 것이다. 우호지분인 클레어의 지원사격을 받기 위해 그녀를 경영 일선에 내세우려는 것.

하지만 클레어는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 도시의 화려한 호텔의 여사장보다 산골마을 카페의 여종업원이 더 좋다. 슈트를 빼입고 고상한 척하는 가식적인 도시의 신사보다는 향수 대신 땀 냄새가 나지만 솔직해서 인간적인 이곳 남자들과의 다소 일탈적인 난음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이 될 듯하다.

라캉이 추구하는 ‘탈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표현만 욕망일 뿐 어쩌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리비도를 꿈꿀지도 모른다. 성적이되 동물적인 건 아니고, 탈 자본주의적이되 유물론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인간적이되 생물학적이지 않은 욕망의 도덕률일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속세에 찌든 모드와 순수한 클레망은 이상화된 몸의 나르시시즘과 현실의 눈에 비친 불완전한 몸의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이 충돌하는 상상계(유아기)의 거울단계에 동시에 머물고 있다. 세속적인 모드는 자본주의라는 기득권 체제에 이미 고착화돼있기에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클레망은 클레어를 통해 상징계를 거쳐 실재계로 나아가게 된다. 클레어가 쌍둥이의 집을 벗어나 찾는 곳은 성당, 카페, 그리고 서점이다. 라캉은 ‘언어활동으로서 구조화된 무의식’이라는 테제로 무의식을 분석하려 했다. 클레어는 책방에서 샤를르를 때림으로써 무의식의 욕망을 깨닫는다.

대놓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소쿠로프 감독을 거론한다. 전자는 진리, 깨달음, 믿음 등을 안에서 찾자고 부르짖었다. 후자는 인생의 근원과 영혼의 궁극을 묻는 영화를 통해 ‘제2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 불린다. 이 정도면 ‘백설공주’로 철학책 한 권을 만들 수도 있겠다. 청소년 불가. 24일 개봉.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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