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미 1983년 매스미디어가 여론을 왜곡하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지배할 수 있음을 ‘비디오드롬’을 통해 경고했다. 시빅 방송 사장 맥스(제임스 우즈)는 일정을 알려주는 비서의 모닝콜 비디오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요즘 불법으로 다운로드한 스너프 필름에 빠져있다.

그는 다른 방송사의 토크쇼에 매혹적인 라디오 진행자 니키(데보라 해리), 영상으로 참여한 미디어학자 오블리비언 교수와 함께 출연한 뒤 단숨에 니키와 연인 사이가 된다. 고객들의 환상을 수입으로 바꾸는 그는 가학적 성애자고, 고객들의 상담에 지친 니키는 피학적 성애자라 궁합이 잘 맞는다.

업계 원로 마샤는 ‘아폴론&디오니소스’라는 집단 섹스 테이프를 권유하지만 고문과 살인의 스너프로 손쉽게 돈 버는 데 익숙한 맥스의 양에 찰 리 만무. 맥스가 콧방귀도 안 뀌자 마샤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에이전트로 나설 테니 독창적인 쇼를 제작해 보라고 충언하지만 역시 반응은 시큰둥하다.

비디오드롬이라 명명한 스너프를 볼수록 그의 환각은 강해지고 점점 그 증상이 심해질 즈음 콘벡스라는 사람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도 케이블TV 사장인데 오블리비언 박사와 함께 비디오드롬을 만든 장본인이다. 콘벡스는 맥스에게 시빅의 공동 설립자 2명을 살해한 뒤 회사를 제게 넘기라고 한다.

알고 보니 박사는 이미 11개월 전에 죽었다. 박사가 1호, 맥스가 2호 실험 대상이었던 것. 맥스는 박사의 연구를 이어가는 딸 비앙카를 찾아간다. 그녀는 음극선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는 시설을 운영 중이다. 그녀는 위층 사무실에서 아래층 병실을 마치 사이비종교의 교주와 같은 자세로 바라본다.

추레한 모습의 환자들은 비앙카가 치료 시스템으로 제공한 TV 테라피에 마치 성서를 대하듯 푹 빠져있다. 있지도 않은 신을 찬양하는 사이비 광신도나, 비디오라는 허상에 집착하는 정신병자가 다를 게 뭔지 묻는 시퀀스다. 가상의 존재, 혹은 작위적 구조주의에 의존해 사는 현대인의 병폐적 현실.

바르트의 일반 기호현상은 신문 기사와 사진, 영화, 광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다룬다. 그는 이러한 의미작용을 사회, 문화 현상에 적용해 함축 의미로 읽고, 그걸 신화론으로 확장했다. 이 작품은 그중에서 미디어다. 일일드라마가 남존여비라는 기호로 조장하는 신화론 같은.

사람들은 자극에 점점 더 둔감해지고, 미디어는 그걸 이용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한편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세뇌하는 것이다. 비디오드롬을 만든 방송사의 모회사는 안경회사다. ‘눈은 마음의 창’이니 그들이 만든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안경 신제품 발표회를 통해 더욱더 심화, 고착화시킨다.

감독은 아예 대놓고 프로이트를 거론한다. 수시로 맥스의 배가 갈라지고, 콘벡스는 그 안에 비디오드롬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삽입한다. 맥스는 스스로 권총을 그 안에 갈무리한다. 갈라진 배는 누가 봐도 여성의 성기 같고 총은 남근을 상징한다. 아니마(남성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성).

이제 케이블 안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실재계를 지배할 단계에까지 오른 비디오드롬에 대한 맥스의 공포심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의 이론(거세 공포증)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는 비앙카로부터 비디오드롬은 뇌종양을 유발하는 전자파이고, 환각 증세를 유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곳도 아닌 뇌에 종양을 생성한다는 것은 현대 미디어가 순기능에서 조금만 벗어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경고다. 바르트가 언어와 기호에서 랑그(외연의미)와 파롤(함축의미)을 구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파레이돌리아야 어쩔 수 없겠지만 영상은 기사처럼 팩트만 전사하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왠지 탄산수는 반드시 코카여야 하고, 점심은 맥도날드여야 유행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콘벡스가 맥스의 채널을 빼앗으려는 이유는 미국은 약해지는데 나머지 세계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외려 인간의 야만성을 들춰내니 순수성이 필요하다는 것.

비앙카는 콘벡스가 맥스를 프로그래밍 해 비디오테이프 재생기처럼 틀 수 있다고 경고한다. 콘벡스는 신제품 출시회에서 로렌조 메디치를 언급한다. 중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쥐락펴락했던 재벌 메디치가 후원하는 스펙태켤러 옵티컬은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는 만화경을 만든다.

융은 옛사람들의 의식적 경험이 상징을 통해 후손들에게 집단 무의식으로 전승된다고 주장했다. 집단 내에서 자연스레 전해져 계승된 신화와 전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바르트의 구조주의는 미디어 발생 이전에도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영역을 원초아(본능), 자아(양심), 초자아(초월)로 구분했다.

그 정신세계는 또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전의식은 이 영화에선 그다지 관계가 없다. 무의식의 세계 안에는 의식세계에서 갈무리한 의지와 욕망(리비도)이 원래 무의식 단계 이전부터 있었던 본능과 공존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비디오드롬을 없애기 위한 도약이 요구되는 것.

그걸 위해선 낡은 육체를 버려야 한다. 맥스는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이라며 자살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한 변신이라며. 크로넨버그는 언제나 그렇듯 그로테스크하다. 인체와 기계와의 합체를 추구하는 사이버펑크적 컬트는 이제 고전이 될 듯하다. 이제 인류는 의식조차 자유롭지 못한 걸까?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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