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사랑의 본질은 ‘끌림’이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이 끌림이 없으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게 부족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너무 반대의 성향의 사람들은 끌림만 가능하고 지속은 불가능하다. 공통의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오행의 생조와 극제를 예로 들어보자. 나무는 물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불은 그 나무의 도움을 받아 활활 타오른다. 생조라 함은 자연스러운 순행의 길이며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물의 도움만을 받아서는 안된다. 흙에 뿌리를 강하게 내릴 수 있게 노력을 해야 하며, 때가 되면 금의 기운에 의해 자신을 기운을 조절하고 억제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금이 나무를 치는 순간, 나무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 역시 성장을 위한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흔히 사랑이라 하면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틀린말이다. 보상을 바라고 내어주는 사랑은 문제가 있지만, 너무 많은 물을 주는 것은 나무를 썩게 하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의 ‘고통’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끌림으로 만난 연인들이 고통의 순간이 오면 이별을 결심한다. 궁합을 보러 온 커플들 중에는 상당수가 서로에게 ‘원진살’로 묶여 있다. ‘원진살’은 ‘강하게 끌리지만 반대의 성향으로 인해 갈등이 많아 원망하다 헤어지고 헤어지면 그리워하는, 고슴도치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생조와 극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쉽게 말해 ‘끌어당김과 밀어냄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끌어당김과 밀어냄은 음과 양처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끌어당김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밀어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고 모든 원진살로 묶인 커플들이 서로에게 인연이란 소리는 아니다. 전생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어 만난 사람들이라 보면 편할 듯 하다. 숙제를 풀지 못하면 결국 다음 생에 또 다시 만나 싸우다 헤어지게 되는 이치이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그리고 소위말하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일컫기도 한다. 에로스는 프쉬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프쉬케의 의미는 ‘정신’이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와 정신의 합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진살이 있어 끌리는 남녀간의 사랑은 ‘에로스’ 단계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성숙의 단계로 끌어올릴 수 없다면, 그 사랑의 숙제는 풀리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원망하며 이별을 선택할 것이다.

결국 ‘지적인 사랑’의 단계로의 승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에로스 상태의 사랑은 이별의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다. 미움도 사랑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될 것이다. 그 단계를 거쳐 매스컴이 조장해 놓은 사랑이라는 허울좋은 핑크빛 로맨스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누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노력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을 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이 가진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그럴만한 가치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도록 해야한다. 각자의 능력과 재능이 다르듯,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분명히 타인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도 인정함과 동시에.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