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애드 아스트라>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톰 크루즈가 흥행성과 완성도를 갖춘 블록버스터형 스타라면 브래드 피트는 작품성에 까다로운 야전형이다. 독립영화도 마다않던 그가 이번엔 미국의 차세대 거장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냉정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현실주의, 실증주의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 도전했다. 124분. 12살 이상. 오는 19일 개봉.

우주인들의 영웅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 박사는 16년 전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실종됐다. 그의 외아들 로이(브래드 피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어려워하며 원망을 하고 우주 비행사의 꿈을 키우며 자라 육군 소령이 됐다. 우주 사령부가 그를 호출한다.

사령부는 박사가 실종된 게 아니라 외계인 발견에 대한 과욕으로 스스로 잠적해 실험 중인데 그게 전류 급증 현상인 써지를 유발함으로써 지구를 큰 위기에 빠뜨렸으니 달을 거쳐 화성으로 가 박사에게 설득 메시지를 보내라고 명령한다. 프루이트 대령과 함께 달에 간 로이는 해적의 공격을 받는다.

부상당한 프루스트가 로이에게 뭔가를 건네주고 로이는 혼자 화성에 도착한다. 그는 박사를 잘 안다는 헬렌을 만나 아버지와 사령부에 대한 진실을 듣고 경악하는데. 대기권에 쌓아올린 타워에서 작업을 하다 써지에 의해 지표면으로 추락하는 인트로와 달에서의 추격전 등은 시각적 긴장감을 준다.

▲ 영화 <애드 아스트라> 스틸 이미지

화성으로 가는 행로에서 구조 신호를 보낸 다른 우주선을 수색하는 시퀀스는 충격이다. 그 외엔 로이의 내레이션으로 잔잔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심리전으로 서스펜스를 전한다. 이 작품은 정말 소름 끼칠 만큼 냉정하게 현사실적으로 유물론적이다. 신비주의를 해체하고 종교를 주제에서 배제한다.

마블과 DC의 복잡하고 작위적인 세계관을 무시하고, 양자역학을 끌어들여 차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다루며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결정론을 주창한 ‘인터스텔라’는 잊으라고 갈파한다. 그렇다. 인력(삶)과 척력(포기)을 통해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목 터져라 외친 ‘그래비티’에 가깝다.

학계와 재야엔 무수한 가설이 떠돌고 있다.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먼 거리의 이집트와 아메리카 대륙에 당시의 문명으로 건립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유사한 형태의 피라미드가 있고, 벽화에 누가 봐도 우주선과 외계인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그려진 건 과학적 증명이 쉽지 않다.

그래서 등장한 가설이 인류보다 훨씬 문명이 앞선 외계인이 오래전 지구 곳곳에 그들의 문명을 퍼뜨려주고 갔다는 ‘프로메테우스설’과 타임머신을 발명한 미래의 인류가 다녀갔다는 시간여행설이다. 많은 SF 영화들은 이 두 가지에 종교와 신비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도입해 관객의 흥미를 끌었다.

▲ 영화 <애드 아스트라> 스틸 이미지

그 작품들에 등장하는 외계인 대부분은 흉측하고 초능력을 지녔다. ‘에이리언’과 ‘프레데터’는 경악스럽고, ‘화성침공’은 재기 발랄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많이 다르다. 우리가 못 가봤고, 알 수 없는 먼 우주와 거기에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는 형상과 현상을 추측하기보다는 현세에 집중하는 게 특징.

인트로의 “희망과 갈등이 공존하다”는 내레이션에 모든 주제가 담겨있다. 인류는 계속해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그건 우리 과학이 그만큼 진보하고 있다는 희망일까, 지구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다는 불안일까? 다른 생명체와 진화를 찾아 우주로 내달리고 있다는 진보는 과연 미래의 희망일까?

로이가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항상 남의 시선으로 보는 연기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의 즉자적 무의식이 그 타자 의식을 제쳤을 때 심리 테스트에서 실격한다. 즉 체제는 순수한 인간미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멋대로인 박사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로이가 탄 우주선 세피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안드로메다의 아버지인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다. 아내의 오만 때문에 딸을 잃을 위기에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도움을 받지만 아들이 없어 결국 페르세우스 가문에게 왕위를 넘긴다. 로이는 ‘왜 이 일을 놓지 못할까? 아버지도 놓지 못했지’라고 말한다.

▲ 영화 <애드 아스트라> 스틸 이미지

비현실적인 목적의식에 집착하는 박사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케페우스다. 웬일인지 조난 우주선에 실린 실험용 유인원은 분노해 있다. 자연(우주)을 탐험하고 실험함으로써 파괴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진리를 원효대사는 ‘해골의 샘’에서 찾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에서 찾았다.

인간과 교신이 가능한 지적 외계생명체의 수를 계산하는 드레이크 방정식이 거론되는 건 모든 개인과 체제의 인식론을 말한다. 이 방정식의 각각의 값에는 정답이 없기에 각자 어떤 값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아버지를 찾고 싶은 건지, 벗어나고 싶은 건지’라는 내레이션이 그 뜻이다.

멋진 세계엔 아무것도 없었다는 내레이션도 마찬가지. 그가 진실을 깨닫고 세피우스에 승선하기 위해 물속을 헤엄치는 건 ‘그래피티’의 주인공의 자궁 속 아이의 자세와 같은 맥락, 즉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로이가 박사와 교신하는 통신실이 선과 면으로 이뤄진 1, 2차원적인 건 단순화의 교훈이다.

희망은 개척과 진보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중용은 보수적이다. 칼 세이건은 우주에 은하가 1000억 개가 있고, 각 은하엔 1000억 개의 별을 비롯해 행성, 혜성 등이 더 있다고 했다. 성간운에선 수십 가지의 유기분자(생명체 존재의 강한 가능성)가 발견된다고 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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