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회

독립호소를 위해 동분서주

-그런 분위기에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

“공식적인 직함은 한성임시정부 총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사실 한성임시정부에 애정이 많았습니다. 내가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갈 때 독립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려면 외교중심지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습니다. 워싱턴과 제네바에서 독립을 호소하면서 다른 나라들의 외교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절감했지요. 그럴 무렵인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이를 규탄하기 위해 국제연맹총회가 1933년초에 열리게 됩니다. 나는 지체없이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갔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자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고맙게도 경비는 하와이 교민들이 지원해주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직후 김구가 이끌고 었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회담이 시작되기 전인 1932년 12월 런던를 거쳐 제네바에 도착했습니다. 현지에서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을 만나 한국독립문제를 의제로 채택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게 학대받고 있으며 한국을 독립시켜 일본을 견제해야만 동양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지요. 이러한 주장은 ‘주르날 드 쥬네브’ ‘라 트리뷴 도리앙’ 등에 실렸습니다. 국제연맹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연설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국제연맹사무총장에 공식서한을 보냈습니다.”

-결과는 어땠나요.

“이같은 호소는 회의장 주변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한국문제는 끝내 총회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일본의 훼방이 많았더군요. 가는 곳마다 일본은 사전에 나의 활동을 저지하고 막았던 것이지요. 게다가 자유국가인 미국, 영국, 프랑스는 극동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호의적인 일부 외국인들은 나의 호소에 동정을 하고 소련에 가서 뜻을 전달하고 도와줄 것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소련은 일본의 만주침략에 내심 긴장하고 있어서 얘기가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으로 가게 됩니까.

“맞아요. 하지만 비자를 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민하던 중 도와줄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오스트리아 주재 중국대사관의 대리공사 동덕건 박사가 생각나더군요. 친분이 있던 사이였거든요. 그를 찾아 비자를 받게 됐고 1933년 7월 9일 신분을 숨긴 채 비엔나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지요. 그런데 역에 내리자마자 소련 관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고 오더니 즉각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요. 자초지종 얘기도 않고 그냥 돌아가라고만 하더군요. 이유를 알아야 돌아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고 했지요. 관리들 중 한 사람이 모스크바에 만주 동철도 운영권을 사려고 흥정을 하기 위해 일본 철도청 책임자가 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한국문제로 일본 대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비엔나로 돌아가 프랑스 니스에서 뉴욕행 배를 탔지요.”

프란체스카 여사 만나다

▲ 하버드대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왼쪽)

-제네바에 체류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게 되지요.

“맞습니다. 처음 만나 것이 1933년초였습니다. 부인은 비엔나에서 아버지가 하던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맡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첫 만남은 저녁 식사때 붐비는 호텔식당에서 자리가 모자라 두 모녀와 함께 합석을 하게 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때가 저는 58세였고 프란체스카는 33세였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프란체스카는 제네바로 떠났고 저는 모스크바로 갈 때 다시 만나게 되면서 결혼 약속을 했습니다. 1년 뒤 뉴욕에서 결혼을 했고 이후 부인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나서서 도왔습니다.”

-제네바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어떤 활동을 하게 됩니까.

“미국인들에게 일본과 손을 잡고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해보려는 대외정책이 잘못됐음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1933년 9월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 뷰트에 들러 ‘몬테나 스탠더드’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또 로스엔젤레스에 들러서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비판한 기사가 나가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반박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외교독립론을 고집스럽게 계속 밀고 나갔지요. 미국과 일본이 언젠가는 무력충돌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여론을 확실히 잡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전쟁을 예언한 베스트셀러 ‘일본내막기’라고 있지요.

“1938년 후반기에 2차대전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습니다. 이때 나는 활동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겼습니다. 거처는 백악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을 써서 저명한 기자인 에드윈 힐을 통해 여러 신문에 싣게 했습니다. 1941년 6월 임시정부의 주미 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습니다. 일본에 대항하는 한국인의 투쟁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절한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무렵 ‘일본내막기’를 뉴욕에서 출간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실체를 밝히고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몇 달 안되어 12월 7일 일본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했습니다. 그때 ‘일본내막기’는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일본내막기’는 예언서입니까.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과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은 머지않아 태평양을 놓고 미국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예측한 책입니다. 출간 초기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나, 출간한 해 12월에 진주만 공습이 터지면서 이 책은 일약 유명 예언서로 불리며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1941년 출간 당시에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문판으로 출간했지요. 한국어로는 1954년 박마리아 번역본으로 나오게 됩니다.”

-아. 그렇군요. 다시 상하이 임시정부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올해 임정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 작업이 활발합니다. 그런데 자료나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의정의 자료는 그런대로 전해지고 있겠지요. 아마 국회도서관에 가면 그런 자료들이 있는 일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1932년 말기 일제가 펴낸 ‘조선민족운동연감’에 임정문서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자료가 부실한 이유 중 하나는 1932년 4월 윤봉길이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일이 있은 후 일제가 임정청사에 들이닥쳤습니다. 이때 임정요인들은 부랴부랴 자리를 피하면서 미처 여러 공식문서를 챙기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일제는 여러 중요 문서를 강탈해갔지요. 6.25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김구의 경교장에 그 문서들이 있었는데 북한군들이 가져간 것이지요. 그로 인해 임정자료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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