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한성감옥 시절의 이승만(맨 왼쪽 서 있는 인물)

-감옥에서의 석방은 30세가 되던 1904년 8월이었죠.
“그렇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한성감옥의 정치범에 대한 석방이 시작됐습니다. 러일전쟁에서 독립협회파의 상당수가 일본의 승리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석방자 명단에 없었습니다. 거의 마지막에 석방자 명단에 들어갔고 석방된 직후 YMCA에 참여하여 ‘상동청년회’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 활동을 벌이다가 그해 11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출국 명분은 미국 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임무는 민영환과 한규설의 개인 밀사자격으로 가는 것인데 한미수호조약의 상호방위 조문을 발동하도록 청원하는 것이었다, 여비 일부는 한성감옥 부서장으로 있던 이중진이 조달했습니다. 1904년 11월 4일 인천으로 가 비밀리에 오하이오 호에 승선했습니다.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고베 항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서 한국인 친지들과 미국 선교사 로건의 환영을 받았지요. 11월 13일 저는 로건의 교회에서 연설을 하고 신도들은 여비에 보태라고 하면서 헌금을 했습니다. 며칠 뒤에 호놀룰루로 출항하는 시베리아호에 승선했습니다. 배가 11월 29일 아침 도착하자 나를 찾아온 사람은 미국 이민국의 통역으로 있는 홍정섭이었으며 교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리교 선교부의 감리사로 있는 존 와드먼 박사도 와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 호놀룰루에서 20km 떨어져 있는 에와의 한국농장으로 갔습니다. 200명 이상의 한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밤 11시까지 장시간 연설을 하고 난 뒤 윤병구 목사의 집에서 새벽까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일본이 겉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천명하면서도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또한 곧 있을 포츠모드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도 합의를 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간섭 때문에 공식대표를 보낼 수 없고 한인들 중에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밤을 꼬박 세우면서 얘기한 끝에 윤 목사는 잠시 하와이에 남아 모금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나는 워싱턴으로 직행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호놀룰루로 돌아와 한인들이 모금한 30달러를 시베리아호 3등 객실 요금을 지불하고 환송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그때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은 어디에서 했습니까.
“1904년 12월31일 워싱턴에 도착한 뒤 1905년 8월까지 최초의 대미외교를 시도했습니다. 만난 사람의 비중만 놓고 본다면 생각보다 일단 성공작이었습니다. 먼저 전 주한 미국공사 딘스모아 상원의원의 소개로 국무장관 헤이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나는 한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을 청원했습니다. 헤이가 일본의 중국 진출을 저지한 것처럼 한국에도 열강의 진출을 저지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딘스모어와 헤이를 만남으로써 사실상 민영환 한규설로부터 받은 외교임무는 완수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특히 그해 8월 4일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저는 고종이나 한국민이 아니라 8천 하와이 동포 한인대표로 루즈벨트를 만나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독립 호소

▲ 하버드대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왼쪽)

-결국은 독립유지 외교는 실패한 셈이네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큰 경험이었습니다. 30세에 불과했던 내가 미국의 상원의원, 국무장관, 대통령 등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한국문제를 협상해본 것은 큰 힘이 됐지요. 또 루즈벨트와의 면담으로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에 나의 외교활동이 소개됐고 국내 ‘황성신문’에 ‘이승만은 한국 인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존자요, 애국 열성의 의기로운 남자요, 청년지사’로 묘사됐습니다.”

-그 이후 미국에서 학업에 정진하게 됩니까.
“막후 외교활동을 마치고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해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다행히 공부는 수월했습니다. 수감생활 때 축적한 학식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와 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를 빨리 받게 됐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 5년반만에 미국에서 박사까지 딴 것이지요. 이는 주한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이 컸습니다. 게일, 언더우드, 벙커, 존스 등 서울의 선교사들이 미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19통의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게일은 ‘이승만은 한국 기독교계에 주도자가 될 것이니 2~3년 동안 공부를 더 한 뒤 귀국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1910년 7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학경비는 주로 교회 연설을 통해 조달했습니다. 미주 시절 나는 정치적 지향과 방향이 정해지게 됩니다. 현실적 정치관으로 굳어진 것이지요.”

-우선 목표인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귀국을 하게 되나요.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망명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귀국했습니다. 또한 미국 기독교계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쳤으니 국내에서 선교사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마침 서울 기독교청년회의 그레그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귀국할 때 신변에 불안함을 느껴 질레트 선교사가 조선통감으로부터 신변보장에 대한 언질을 받은 후에야 떠난 지 6년만에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1910년 9월 뉴욕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태평양 항로를 택하지 않고 대서양 항로를 택한 것은 유럽이란 나라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리버풀에 내려 런던과 파리를 구경했습니다. 그리고는 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만주에 도착했지요. 1910년 10월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해 부친을 만난 뒤 이상재를 찾아갔습니다. 이상재는 한성감옥 시절 기독교로 개종한 뒤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서울 YMCA에서 학생부 간사와 청년학교 학감으로 강연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최고 학력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소문이 난 것은 맞지만 단지 그 이유로만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또 봄과 가을 두차례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과 설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마다 일본 헌병들의 감시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 한일합방은 나에게 통곡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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