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리 인스타그램

[미디어파인=유진모의 이슈&피플] F(x) 출신 설리(25)가 또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녀가 26살 많은 이성민을 비롯해 유해진, 박철민 등 선배에게 ‘씨’를 붙여 호칭한 데 대해 찬반양론이 충돌하고 있는 것. 더불어 예전에 설리가 자유분방한 태도로 일부 대중에게 비난받는 것과 관련해 “멋있다”며 옹호한 김의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설리를 지적한 한 누리꾼에 대해 “상식과 멍청함의 차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거기 쫓아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식으로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 설리 팬 커뮤니티도 논란에 부채질을 했다.

‘설리 갤러리’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씨’는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한 누리꾼의 ‘씨’ 호칭의 쓰임새에 대한 질문에 국립국어원은 “‘씨’는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해 부르는 말이지만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

우리 선조가 일제강점기까지 거치면서도 꿋꿋이 지켜온 표준어는 ‘한 나라의 규범으로 인정된 말, 법으로 정한 언어 규범’이다. 의존명사로서의 ‘씨’는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런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의 용도는 다르다. 구어체와 문어체의 차이 같다.​

▲ 영화 <부산행> 스틸 이미지

종적 계급관계가 엄중한 일간종합신문사에서 근무했던 필자의 경험상 사내에서 ‘씨’는 서열이 동등하거나 애매한 사이에서,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출 때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 표현이었다. 선배를 아무개 씨로 부른다는 것은 도발을 넘어선 계급전도의 쿠데타에 다름없었다.

물론 그건 20세기만의 분위기라고 볼 수도 있다.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 고리타분한 과거의 정서와 질서를 강요하는 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영어 Sir는 씨보다는 님에 가깝게 번역되지만 정서적으로는 같을 수 없다. 10여 년 전 CJ그룹은 직책을 없애고 ‘아무개 님’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미국의 Sir는 평등이 아니라 서열이다. 성을 부르는 게 보편적이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즈음에야 친한 사이가 되며, 그걸 넘어서야 친구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친구는 우선 나이가 같거나 학교 동기여야 한다. 친소관계와 무관하게 같은 학교 동기생이면 친구다.

이와 달리 유럽과 미국의 친구는 나이나 학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서로 마음을 열고 흉금을 털어놓을 정도의 사이가 됐을 때 친구라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친구라고 하는 시퀀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어사전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 영화 <공작> 스틸 이미지

그런데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란 뜻도 있다. 순우리말인 벗의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나이 셈법도 거의 유일하게 다르다. 서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월과 일까지 따진 만 나이지만 우린 태어나면 1살이다.

게다가 독재자가 정한 ‘이른 나이’ 계산법까지 더해져 소위 ‘족보가 꼬인다’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미국 같은 신생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는 군주제와 계급사회를 경험했다. 여왕이나 황제가 있는 나라도 대부분 관념론적일 뿐 그들이 실권을 쥔 유물론적 절대세습왕(황)정제는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다. 즉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서 이끌어가는 나라다. 대한민국은 결코 통일신라도 조선도 아니다. 그 정통성을 잇는다고 하더라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해 반상의 계급과 왕족의 개념을 버린 지 이미 오래다. 더구나 21세기의 디지털화는 생활양식은 물론 사고를 급변시켰다.

설리 자체에 대한 논란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다만 씨와 친구에 대한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접근은 이 시대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댓글에서 보듯 젊은이들조차도 나이에 대한 존중심은 존재하는 게 우리 민족의 정서다. 국어원의 대답과 고착된 사회적 의식에 근거할 때 그 의식은 바뀌기 어렵다.​

다만 친구의 범주는 탄력적 수정주의가 필요할 듯하다. 설리의 대인관계에서 보듯 그녀와 50살 안팎의 그녀의 친구들은 이미 서구적인 친구관을 수용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란 표제는 노인의 변명적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스스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다는 테제다.

국어원은 2015년 6월 13일 ‘너무와 정말의 차이’를 묻는 한 국민의 질문에 너무를 부정 성격으로 규정했지만 15일 너무도 긍정에 사용이 가능하다고 변경해 공표한 뒤 18일 그 대답을 공식화했다. 사회적으로 짜장면의 사용이 당연시됐기 때문에 혼용을 가능하게 한 것과 너무를 착각한 듯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아니 모인다’는 속담에서 보듯 너무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수백 년 이상 써온 순우리말 뜻의 왜곡을 바로잡기는커녕 공식화했다. 자장면은 1880년대 인천항 개항과 함께 들어온 새 메뉴다. 춘장을 기름에 볶아 면 위에 얹어 먹는다는 조어 작장면(炸醬麵)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의식엔 권위주의가 강했다. 노무현의 됨됨이와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건 어쩌면 그의 탈권위주의가 기득권자는 물론 그들을 섬기는 ‘노예’들에게 매우 불편, 불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의성을 ‘좌빨’이라고 지적한 누리꾼은 그의 친구 개념이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미국식인 건 알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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