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bs 화면 캡처

5공화국 개국공신들 대통령 친인척문제 단호하게 처리해야

일이 이쯤되자 유 부장으로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적절한 시기에 이러한 사태를 미리 막지 못한 죄책감이 강하게 엄습해왔던 것이다. 며칠을 고심하던 유 부장은 전 대통령에게 진언하기로 하고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우선 안기부내 고위 당국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이와 관련 당시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권력비호설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친인척 문제에 대해 과감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게 당시 유 부장의 생각이었다.”면서 “영부인 문제까지 거론되기 때문에 유 부장은 사표까지 함께 낸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전한다.

유 부장이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내민 정보보고서 형식의 건의문 내용은 이순자 여사를 비롯해 친인척들의 공사(公私)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이같은 유 부장의 진언은 처음에는 수용되는 듯했지만 이틀 뒤 김상구(金相球) 평통사무차장이 지방의회 참석 중 급거 상경,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고 이규동(李圭東) 대한농인회 회장도 동생이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며 물러났다.

며칠 뒤인 5월22일. 효자동 안가에서는 5공 실세들의 극비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유 부장을 비롯, 노태우 내무장관, 황영시 육참총장, 차규헌 2군사령관, 정호용 3군사령관, 백운택 군단장, 박준병 보안사령관, 안무혁 국세청장, 허화평 정무수석, 허삼수 사정수석 등 그야말로 5공의 개국공신들이 다 모였다. 이 날의 모임은 전 대통령도 모를 만큼 은밀히 이루어졌으며 장영자 부부사건의 후유증을 조속히 치유하고 대국민 분위기쇄신을 위한 묘책을 강구해보자는 차원에서 허화평, 허삼수가 모임을 주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회의는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의 구속에 대한 여론의 반응, 이철희씨의 행태, 장영자씨의 사기수법 등이 집중 거론됐다. 2시간 가량 진행된 회합에서 얻어진 결론은 대통령의 친인척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대외활동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이같은 결론을 누가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전 대통령 성격을 잘 아는 이들이었기에 집단으로 보고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유 선배님이 하시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당시 유 부장은 군의 선배로서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유 부장은 “나는 안기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돼 있소. 그 일로 각하와는 식사도 했고 얘기도 끝냈소. 그런 내가 올라가서 건의하겠소? 딴 방법을 찾아봅시다.”라는 뜻밖의 대답을 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시사했다. 그래서 다음 선임인 황영시와 차규헌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그러나 현역군인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노태우 장관이 총대를 메게 됐다. 이튿날 노 장관은 청와대에 가서 이같은 모임의 결론을 ‘각하를 모시는 동지들의 뜻’이라는 식의 서면보고를 했다.

결국 이철희 장영자 사건으로 유 부장은 그해 6월2일 만 23개월만에 안기부장 자리를 노신영씨에게 물려주고 안기부 청사를 떠났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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