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쓰백>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미쓰백’(이지원 감독)에서 아버지와 계모에게 죽을 위험에 처한 소녀 지은 역으로 데뷔한 김시아가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이집트에서 개최된 제3회 샤름 엘 셰이크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SAFF)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가버나움’(나딘 라바키 감독)은 13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클럽 버닝썬을 계기로 승리를 비롯해 정준영까지 유명 연예인을 둘러싼 추잡한 범죄 혹은 의혹이 장마철 하수구처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혼탁한 현실에서 국지적 사회를 넘어선 인류애적 메시지를 담은 독립영화와 그 주인공이라 돋보인다. 아직 세상에 희망은 있다는 메타 신탁 같은 소식이다.

‘미쓰백’은 자신을 지키려다 전과자가 된 상아가 우연히 만난 자신과 닮은 소녀 지은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쓰며 기득권, 혹은 기성의 편견과 다툰다는 게 기둥 줄거리다. 아버지의 왠지 모를 분노와 계모의 폭력에 방치된 나약한 지은은 최근 뉴스에서 충분히 접한 아동 학대의 피해자와 다름없다.

‘가버나움’은 레바논의 빈민 가정에서 태어나 출생 신고조차 돼있지 않은 12살 소년 자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에 대한 고발이 뼈대를 이룬다. 자인은 부모가 초경을 한 동생을 집주인 아들에게 팔다시피 시집을 보내고, 이내 동생이 죽자 남편을 칼로 찌른 죄로 구속된다.

▲ 영화 <미쓰백> 스틸 이미지

그러나 자인은 당당하게 부모를 고소하려 한다. “나를 태어나게 한 죄”가 혐의다. 세상 모든 동물은 번식을 하고, 태어난 새끼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양육한다. 그러나 자인의 부모는 본능 혹은 습관으로 관계를 맺고 아이가 태어나면 노동력을 착취하는 등 돈벌이에 앞장세운다.

2016년 우리나라 전국 총 53개의 학대피해아동쉼터가 보호한 아동 수는 전해보다 24.1%가 증가한 1030명이다. 쉼터가 53개다. 접수된 아동 학대 신고 2만 587건 중 10.6%의 신고자는 가족이 아닌 제3자였다. 접수 안 된 건수가 더 있을 것이고, 가해자는 가족일 가능성이 꽤 높다는 반증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율과 출산율은 심각한 상황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과잉 인구 증가로 인한 환경 파괴로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다면 이젠 인구 감소로 인한 멸종을 우려하는 이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고, 대신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현실적이다.

국가는 이를 장려할 순 있지만 강제할 순 없다. 문제는 개개인의 결혼의 의미, 출산의 책임감과 양육의 능력에 대한 의식이다. 그걸 해야 하는 이유와 했을 경우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인식이다. 정준영의 ‘동영상’ 사건은 성교육의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매우 쓰라린 경종이다.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미쓰백’의 일곤은 20살 때의 충동적인 성관계로 지은을 낳은 뒤 ‘육아 독박’을 쓴 피해 의식으로 지은에 대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한다. 게다가 현재 천박한 인격의 미경과 동거 중이다. 미경은 지은을 군더더기 취급을 한다. 일곤은 자기감정에 미경의 인격을 더해 지은을 제 삶의 걸림돌로 보고 학대한다.

자식이 자신의 성욕만도 못한가? 동물의 발정기가 합리적으로 보인다. 구속된 자인을 찾은 부모는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주신다”며 매우 밝은 표정으로 임신 소식을 알린다. 자식이 실수로 깨뜨리면 다시 사면 그만인 계란인가? 이런 천인공노할 부모들이 있을까? 최소한 우리 뉴스를 보면 있다.

지하철엔 ‘노약자석’과 더불어 ‘임산부 배려석’이 있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보다 노인이 더 많다는 게 의아할 따름이다. 그들은 모두 자식을 낳고 손자, 손녀를 봤을 것이다. 자신의 딸과 며느리 생각은 안 할까? 과연 우리나라와 인류의 미래를 그들이 책임질까, 아이들이 맡을까?

어른은 자식 번식 행위를 했다는 ‘몸을 얽었다(섞었다)’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남자는 결혼으로 상투를 틀어야 어른 대접을 받은 풍속도 있었다. 사회에서 어른으로 인정을 받으면 그 ‘값’을 하는 게 마땅하다. 성행위는 충동으로 시작되지만 결과는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특히 자식은.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그건 우리가 동물이기에 그렇고, 인간이기에 더욱 그렇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란 발상은 자연법에 위배되지만 인간이 이성으로 동물과 구분되는 건 확실하다. 최소한 동물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동물만큼은 자식에게 애틋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무리를 이룬 동물 대부분은 남의 새끼도 돌본다.

‘미쓰백’의 상아는 자신조차도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지고지순한 한 남자의 구애마저 무시하며 희망을 포기했지만 지은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기로 마음을 바꾼다. 그건 박애정신을 넘어선 자아의 발견이다. 지은은 곧 자신이고, 세상에 만연한 ‘미쓰백’이었기 때문이다.

자인은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미혼모 라힐을 만나 서로의 버팀목이 돼 함께 산다. 어느 날 라힐이 당국에 검거되고, 그런 사연을 모르는 자인은 그녀의 1살 아들 요나스를 돌보며 꿋꿋이 살아간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암사자가 집단에서 이탈한 새끼 누를 잡아먹기는커녕 돌봐주는 장면을 찍었다.

라틴에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가 있다. 이기심이란 본능은 어느 동물이나 있다. 하지만 유전주의든 후천주의든, 혈연의 족벌주의든 호혜적 이타주의든 사람은 신화, 종교, 예술을 만든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최소한 아이는 지키는 게 ‘사람어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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