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김종필(JP)을 향한 칼날 ‘국민복지회사건’

▲ 사진=ktv 화면 캡처

5.16거사 당시 혁명공약 작성 등 2인자로 출발한 김종필(JP)은 1968년 ‘국민복지회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축출당한다. 국민복지회란 어떤 단체일까. 정식 명칭은 ‘한국국민복지연구회’이다. ‘복지회’는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JP를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JP계가 만든 모임이다. 회장에 김용태(金龍泰), 부회장 최영두(崔永斗), 사무총장 송상남(宋相南) 등이며, 시도책임자는 이원만, 예춘호, 신윤창, 이승춘, 오원선, 박종태 등으로 구성됐다. 대통령선거 3년을 앞둔 1968년 5월 복지회의 김용태 회장 명의로 취지서가 배포된다. 내용은 이러했다.

“위대한 사회건설이 꿈일 수 만은 없다. 이제는 악이 구축되고 정의가 승리하며 법이 시행되는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 민족의 오늘과 내일은 젊은 지도층의 어깨에 달려있다...”

여당내 야당격인 이 조직, 그러니까 반JP계는 삼선개헌을 저지하고 JP를 후계자로 옹립하려한다는 것이 청와대에 보고됐다. 박 대통령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박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조사를 지시하며 JP계의 ‘불충을 엄단’하도록 일렀다. 안 그래도 호시탐탐 노리던 차에 잘 됐다 싶은 김 중정부장은 김용태, 최영두 등을 연행했다. 그리하여 김 중정부장은 이 조직이 JP의 대통령 옹립과 관련한 정치조직이며, ‘시국판단서’라는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보고했다. ‘시국판단서’에는 “1967년의 선거부정은 박 대통령의 책임이며, 더 이상 정치에 야심을 갖지 못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1971년 선거에 있어서 우리들의 대안은 오직 JP 당의장이다. 71년을 ‘김종필의 해’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68년 5월24일 민주공화당은 긴급 당기위원회를 소집,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 등을 해당행위자로 제명하고, 다음날 의원총회에서도 제명을 결의했다. 5월30일 민주공화당 의장 JP는 모든 공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탈당계를 제출했다. JP는 6월5일 당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6월7일에는 의원직을 상실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 사진=ktv 화면 캡처

JP는 자신의 증언록에서 “당시 견제세력인 6인방(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 이후락, 김형욱)의 행보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나 자신에게도 염증이 났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구사한 6인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박 대통령까지 솔직히 싫어졌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이 불거진 직후 박 대통령과 독대한 JP는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라고 대들었다. 이를 두고 JP는 “지독한 견제와 감시에 시달려왔던 내가 참다 참다 토해낸 한 마디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JP는 박 대통령에게 이집트 혁명 뒤 1인자 ‘나기브’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 얘기를 꺼냈다. 이집트의 군인이자 정치가, 혁명위원회 의장인 나기브는 1948년 팔레스티나 전쟁에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장병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은 후, 1952년 나세르 등과 부패한 정계에 대하여 군부 쿠데타를 감행, 국왕 파루크를 축출했다. 그 후 수상에 취임, 육해상을 겸무하고, 1953년 신헌법 반포와 동시에 이집트 초대 대통령에 취임, 수상을 겸했다. 그러나 독재 체제로 국민의 불만을 사고 군부와도 충돌, 나세르에 의해 1954년 실각되었다.

JP 모든 공직에서 사퇴

▲ 사진=ktv 화면 캡처

이 무렵인 1968년 5월 이건영 장군은 드디어 야전 사단장을 맡았다. 무장탈영병이 수류탄을 던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김종수(金鍾洙 육사3기) 6사단장이 “내가 책임지겠다.”며 사단장 보직을 내놓았고 이건영 장군이 그 후임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상부로부터 한통의 긴급전문을 받았다. 6사단 지역에 박 대통령이 방문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6군단사령부만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나 얼마 전 탈영사건을 거론하면서 부대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일정을 급히 변경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3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장군은 서둘러 부대장병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도착했다. 박종규 경호실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이 수행했다. 박 대통령은 적의 동태와 부대관리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했다. 휴전선 최전방 초소까지 다가가 직접 북한군의 움직임 등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또 전방초소 중대장을 불러 “뭐 어려운 게 없느냐.”고 물었다. 바짝 긴장한 중대장은 “없습니다.”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대대장한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대장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자꾸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 장군이 나서서 “각하, 사병들의 배가 조금 고픈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말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후락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황급히 다가가더니 귀엣말로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무슨 내용일까. 이 날 저녁에야 뉴스를 통해 내막을 알았지만 JP 공화당의장이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는 내용을 이후락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당시 JP와 김형욱 중정부장은 서로 심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1968년 1.21 무장공비 서울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JP진영은 김 중정부장을 목표로 안보책임자 인책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김 중정부장은 즉각 JP를 당의장에서 밀어내는 역습작전으로 맞섰다. 김 중정부장은 공화당내 중진의원들을 남산으로 불러다가 JP를 밀어내는데 협조하라고 종용하곤 했다. 그러던 중 1968년 5월 ‘국민복지회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복지회는 공화당의 산업화 정책에 따라 도시는 발전하고 있으나 농촌지역은 뒤지고 있으므로 농촌근대화 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농어민 생활향상을 위한 순수 단체’라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김용태 공화당의원이 회장직을 순순히 수락했다. 그러나 이 무렵 “당내에 복지회라는 반국가단체가 조직돼 대통령 각하를 비방하고 있으니 고발한다.”는 내용의 제보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접수됐다. 유승원(柳承源) 민정수석은 이를 박 대통령한테 즉각 보고했고 박 대통령은 김형욱 중정부장을 불러 조사를 지시하면서 JP계열의 ‘불충’을 엄단하도록 일렀다.

JP가 떠나던 날과 박정희

▲ 사진=ktv 화면 캡처

김 중정부장으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관련자들을 정보부로 모두 연행해 가혹한 심문을 벌였다. 털끝 하나라도 건져낼 생각이었다. 결국 복지회사건은 3선개헌을 반대하고 JP를 차기 대통령후보로 옹립하려는 음모라고 김 중정부장은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진노했다. 그래서 1968년 5월25일 김용태 의원 등 전현직 국회의원들은 복지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명됐다.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5일 뒤 JP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당의장은 물론 의원직과 당적까지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박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미리 짐작했을까. 군단사령부만 방문하기로 했던 박 대통령은 당초의 계획을 돌려 최전방 지역인 6사단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대통령은 JP의 공직사퇴 소식을 이후락 실장한테 부대에서 보고를 받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서둘러 청와대로 돌아가 사태수습을 논의할 수도 있었으나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 장군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사단장, 저쪽 활개지로 적의 전차가 쳐들어오면 무슨 수로 막겠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 장군은 “예, 1차적으로 대전차 지뢰로 진격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박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전방부대를 시찰하고 청와대로 돌아갔다. 아마도 이 날 박 대통령과 JP는 서로가 착찹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JP와 함께 혁명공약을 만드는 등 영원한 혁명동지인 박 대통령도 그러했을 것이고 JP 역시 그런 저런 생각에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JP는 혁명의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만들었으니 정계를 떠나 돌아서는 마음이 오죽이나 했을까.

어쨌든 JP는 ‘복지회사건’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인과 함께 부산 해운대로 갔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극동호텔에서 혼자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박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서 당황했던지 자꾸 사람을 보내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옆에 있을 때는 권력을 노린다고 의심하더니 없어지자 붙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계를 떠난 지 2년이 넘었을 때 사람들은 잊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청구동 자택에는 많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왔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은 권력꽤나 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데 반해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는 것이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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