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10월 유신’의 영어표기를 어떻게 하느냐

1970년 1월 자유당이 신민당에 합당되고 또 신민당이 한국독립당에 흡수됐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그리고 1972년 제8대 대통령선거 등 두 번의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무엇보다 정국을 강타한 것은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의 공포(72년 12월)였다. 유신헌법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국내 야당 정치인의 반발도 거셌지만 외국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 조율은 김윤호 장군이 담당했다. 청와대 해외정보담당 비서관으로서 주로 대미창구를 맡았던 것이다.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 초안이 작성되자 외무부에서는 미국측에 내용을 설명하면서 ‘유신’을 영어로 'Renovation'(혁신, 쇄신)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김 장군은 며칠 뒤 주한 미대사관으로부터 뜻밖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유신을 ‘Renovation'으로 표기했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왕정복구를 의미하느냐고 물어왔다.

미대사관측 관계자는 또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Renovation'의 예는 일본의 메이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심하던 김 장군은 곧 관계자들한테 연락하여 회의를 주재했다. 최광수(崔侊洙)외교연구원 상임연구원, 유혁인(柳赫仁)정무비서관, 김성진(金聖鎭)청와대 대변인 등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외무부에서 표기한 Renovation은 적당치가 않다는 게 김 장군의 의견이었다. 회의탁자에 백과사전이 놓여 있었는데 참석자들은 서로 사전을 뒤져가며 적당한 말이 없을까 하고 고심했다.

잠시 후 김 장군이 중국의 ‘맹자’에 나오는 글귀 하나를 인용했다. 김 장군은 한학자였던 부친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을 익힌 바가 있어 당시 군내부에서는 중국 고전에 정통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김 장군은 칠판에다 하얀 백묵을 잡고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이라는 글귀를 큼지막하게 쓴 다음 뜻을 풀이했다.

“중국의 주나라가 오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유신에 있다. 여기에서 유신이란 메이지유신처럼 왕정복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새로운 활력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신이란 영문표기를 다시 고려해야 한다.”

주미공사를 지낸 김성진 대변인도 김 장군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결과 영문표기를 다시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외부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해보자는 사항도 첨부됐다. 며칠 뒤 외무부에서 연락이 왔다. 유신의 영문표기를 Renovation이 아닌 Revitalization(새로운 힘, 경제활성화)으로 수정했다는 것이다. 김 장군은 보충설명을 곁들여 이같은 내용을 미대사관측에 전달했다.

김 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후락 중정부장이 10월 유신을 주창할 때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관련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면서 “그 때 나의 느낌으로는 10월유신에 대한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 부족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코리아게이트 6년 전에 감지

김 장군은 이밖에 청와대 근무시절을 떠올리면서 “1976년 10월에 터진 박동선 사건은 이보다 6년 전에 청와대에서 감지하고 있었다.”고 처음 밝혔다. 김 장군은 또 “그러나 이는 청와대가 관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박동선의 로비활동을 미리 포착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대신 정일권 총리, 김형욱 중정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등은 직간접적으로 한두 차례 박동선과 접촉한 것으로 획인됐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사회를 온통 떠들썩하게 했던 ‘박동선 사건’은 어떻게 해서 드러나게 됐을까. 1975년 말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미 공법(公法)480호 계획에 대한 기획기사를 취재하다가 우연히 한국의 박동선이 쌀과 관계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은 취재를 통해 박의 미국인 친구 명단을 입수했고 그럴수록 로비의혹은 짙어만 갔다. 약 1년여에 걸친 자료수집 끝에 이들은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에 제1보를 내보내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후 제2, 제3보가 터져나왔고 의회까지 연루돼 파장은 더욱 커졌다.

박동선씨의 행적도 속속 드러났다. 경기중학을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간 박씨는 1967년부터 미국 쌀시장에 나타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해너와 사귀면서 캘리포니아산 쌀을 한국에 중개하는 브로커 역할을 하는 한편, 루이지애나 쌀의 수입도 중개했다. 그는 거액의 커미션을 받아 호화생활을 해나갔다. 심지어는 워싱턴에 30만달러짜리 호화주택을 구입하고 미 의원들과 파티도 즐겼다. 더욱이 캘리포니아와 루이지애나 등은 계속되는 풍년으로 쌀이 창고에 쌓였고 이곳 출신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당선하려면 어떻게든 쌀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박씨와의 만남이 필요했다. 8년에 걸친 그의 비밀스런 행적을 두 기자가 끈질긴 추적 끝에 폭로함으로써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 바로 ‘박동선 사건’이다.

▲ 사진=ktv 화면 캡처

“박 대통령이 쌀 장사한다” 소문

청와대가 박동선씨의 심상치 않은 행적을 처음 포착한 것은 1970년 11월쯤이라고 김 장군은 말했다. 11월 어느 날 김 장군은 이날도 청와대에서 평상시처럼 해외관련 정보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황급히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갔다. 박 대통령심기가 불편한 듯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김 장군을 보자 박 대통령은 대뜸 “박동선이라는 사람 아시오?”하는 것이다. 김 장군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며 “각하, 금시초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지금 당장 누군지 알아보시오. 내가 그놈 때문에 쌀장사한다는 얘길 듣고 있소. 대통령이 쌀장사나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엄명을 받고 물러나온 김 장군은 곧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이름 박동선, 1935년 평양출생. 부친은 석유상을 한 경력 있음. 경기중학을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병력기피 혐의를 받고 있으며 조지타운대학 중퇴. 국내인사들과는 직,간접으로 한두 차례 만났음. 박씨는 현재 미국에서 쌀장사 브로커로 거액의 커미션을 받고 있음.

김 장군은 이틀 후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브리핑자료를 만들어 박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미국의 쌀은 박동선이라는 중개상이 없이도 얼마든지 순조롭게 수입이 가능하다. 둘째 박동선은 단지 커미션을 챙기기 위한 과정에서 미국 쌀생산지의 일부 정치인들과도 가깝게 지내고 있다. 셋째 박동선은 또 그네들에게 박 대통령의 친척으로 비쳐지고 있는데다 특히 한국의 정부요인들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는 행세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발생의 여지가 충분히 있으므로 쌀수입은 미국 농무부와 현지 한국대사관을 통해 직거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박 대통령은 김 장군의 보고를 받은 뒤 확인경로를 물었다. 김 장군은 평소 알고 지내던 CIA등 미정보기관의 관계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배석해 있던 김정렴(金正㾾)비서실장을 불러 “이거 사기군들이 끼었잖아. 당장 그런 짓 못하도록 하시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로 인해 박동선은 2년동안 주춤하다가 다시 활동을 재개해 결국 1976년 사건화가 됐다고 김 장군은 회고했다.

이로 인해 미국 농무부는 박동선을 세일즈 에이전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한국정부에 통보해왔고 미국의 쌀수출 전문회사인 코넬사는 새로운 에이전트로 ‘대한농산’이라는 기업을 택했다. 그러나 1972년 5월부터 3년동안 60만달러 이상을 대한농산의 구좌에 지불했는데 이 돈을 찾아간 이는 다름 아닌 박동선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결국 ‘박동선사건’은 85만 달러의 선거헌금과 선물을 32명의 전현직 의원들에게 제공했다는 박씨의 증언을 토대로 1978년 10월16일 미국 하원윤리위원회가 조사결과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2년의 세월을 끌던 박동선사건은 마무리됐다. 미국의 해너 전 하원의원은 실형선고를 받고 7명이 징계를 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사건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확대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가 미국정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운데 유신체제에 대한 미국 조야의 불만이 팽배해 있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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