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안시성>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안시성’(김광식 감독)의 순수 제작비 185억 원은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135분이란 다소 부담스러운 러닝 타임은 상업적인 색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떠오를 즈음 벌써 끝났냐는 아쉬움이 들 정도. 판타지를 제거한 현사실적 ‘반지의 제왕’과 철학을 덜어낸 ‘트로이’의 종합이라면 과찬일까?

당 태종 리시민(박성웅)은 아버지를 도와 당을 건국한 뒤 2대 왕에 올라 서, 남, 북을 평정했지만 동쪽의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해 체면이 구겨진 상황. 신라의 고구려가 침공하지 말도록 겁박해달라는 부탁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망신만 당하자 명분과 실리를 모두 노려 643년 출정한다.

고구려 실권자 대막리지 연개소문(유오성)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바지 왕’으로 앉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터. 리는 이를 진군의 구실로 삼은 것. 지금의 랴오닝성 하이청 남동쪽의 잉청쯔에 위치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조인성)은 연개소문을 거역해 ‘반역자’로 낙인찍힌 인물.

리가 20만 대군으로 안시성 북쪽을 차례로 무너뜨리자 개소문은 평양성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 안시성 진군을 막기 위해 15만 대군을 보내지만 참패한다. 개소문은 부하들을 잃은 태학도 수장 사물(남주혁)에게 안시성은 포기할 생각이니 그리로 가서 만춘을 암살하라고 명령한다.

만춘은 개소문의 자객을 숱하게 물리친 경험으로 사물의 정체를 간파하지만 호위무사 추수지(배성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최측근으로 받아들인다. 안시성의 군사는 5000명. 그러나 만춘은 군대가 아닌 민간인을 위해 끝까지 성을 지켜야 한다며 철두철미하게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 영화 <안시성> 스틸 이미지

과정과 결과는 역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기에 감독은 서사보단 무기가 단순하기에 치밀할 수밖에 없는 전략과 ‘기 싸움’ 등 전투신에 중점을 둔다. 기존 한국 사극 전쟁물에서 볼 수 없었던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스케일의 전투가 치밀한 전술의 두뇌싸움과 함께 장대하게 펼쳐진다.

이런 화려한 액션을 위해 한국 사극으론 드물게 스카이워커, 드론, 로봇암, 팬텀, 러시아암 등의 첨단 장비로 구현한 전방위를 휘감는 역동적이고 휘황찬란한 앵글이 시종일관 눈을 호강시켜준다. CG가 아닌 세트로 세운 안시성과 토산은 혀를 내두를 정도. 피라미드의 형상을 빌린 토산은 인상 깊다.

만춘의 장수 풍(박병은)과 활보(오대환)는 코미디 담당이다. 시종일관 쌍욕을 달고 죽일 듯이 싸우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한 우정이 남다르기 때문. 진하다 못해 찐득찐득한 전우애로 똘똘 뭉친 이들은 끊임없는 전투로 인해 객석에 긴장감과 피로감이 일렁일 때마다 사람 냄새로 그걸 풀어줄 것이다.

여러 전술 중 하나로 등장하는 교란작전은 ‘트로이’의 목마를 떠올리게 한다. 만춘은 전투와 전술에서 거의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는데 어차피 그는 야사의 인물이고, ‘안시성’은 영화다. 다만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명군으로 기록된 리를 매우 평면적으로 설정해 박성웅이란 배우를 낭비한 건 아쉽다.

▲ 영화 <안시성> 스틸 이미지

만춘의 인물 됨됨이에 목적의식이 흔들리는 사물이 친척 할아버지에게 그에 대해 묻자 “모든 성민은 안시성 그 자체로 생각한다”고 답한다. 만춘은 군림하지 않고 성민과 함께 노동하고 군대와 함께 전투하며 모두와 함께 먹고 입는다. 오히려 자신이 먹을 걸 나눠줄 정도다. 아파도 제가 먼저 아프다.

그는 서양에서 말하는 극복인(위버멘시)이다. 인간을 초월한 인간. 정의와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인간. 그래서 그의 목적인은 “내 소중한 걸 빼앗으려 할 때 목숨 걸고 싸운다”이고 “누구를 따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주로서 성을 지킬 뿐”이다. 그의 전 약혼녀 신녀(정은채)는 신탁을 의미한다.

건국왕 주몽은 고구려의 혼이자 신적인 존재. 신녀는 주몽의 활과 화살을 세민에게 빼앗겼다 만춘에게 되돌려주는 역할을 한다. 활이 워낙 크고 강인해 주몽 이후 이 활로 화살을 날리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누가 주몽의 현신이 될지가 관건이다. 공교롭게도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이다. ‘국가 혹은 정의에 대해’라고도 불리는 이 저서를 곁눈질하면 ‘국가(통치자)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정의(定義)에 대한 질문에 ‘의사, 선장, 통치자’로 답한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 선장이 선원을 위해 일하듯 통치자는 국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신녀의 “고구려 신이 우릴 버렸다”라는 신탁에 만춘은 “안시성은 지지 않는다”는 존재론으로 유물론의 물리법칙에 맞서고, “꿈에 죽은 군사들을 봤다”는 만춘의 경험론에 사물은 “죽은 자를 보지 말고 산 자를 봐달라”는 존엄성으로 대립한다. “그저 한 명의 고구려인 만춘일 뿐”이라는 존재자 규정은 멋지다.

▲ 영화 <안시성> 스틸 이미지

전사한 두 연인의 시신을 무덤에 묻지 않고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건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윤회사상이자 토테미즘이다. 만춘의 동생 백하(설현)의 돌발행동은 다소 억지스럽지만 그녀와 파소(엄태구)가 전쟁 중에 연애하는 걸 걱정하는 만춘에게 “그건 우리가 떠안을 문제”라는 책임론은 묵직하다.

심장박동의 폭발을 유도할 듯한 드럼과 대규모 주술 장면을 연상케 하는 장대한 코러스 등의 음향효과도 훌륭하다. 당분간 이런 상업적 대서사시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 하나가 탄생했다. 단 조인성의 목소리 톤, 설현과 남주혁의 연기력, 고증 등은 숙제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 해도 신라만 부각될 뿐 가야, 백제,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교실과 도서관이 아닌 가판대에서 더 많이 취급되는 건 우리 역사의 추한 이면이란 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꽤 중요하다. 전해지는 중국 역사서와 그걸 따르는 ‘삼국사기’는 과연 금과옥조일까?

기록에서 리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양국의 역사는 그걸 긍정적으로 해석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쟁의 신’이었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패전한 고구려를 후에 누군가 이긴다면 자신의 기록에 오점 하나가 더해질까 두려웠던 건 아닐까? 12살 이상. 9월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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