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국내에선 소수 마니아에게만 주목받지만 세계 유력 영화제에서 인정받는다는 일부 감독은 이창동 감독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최신작 ‘버닝’을 통해 이 감독은 ‘이봐, 유럽의 예술적 영화의 수준에 우리네 정서를 불어넣은 게 이런 거야’라고 호통을 치는 듯하다. 게다가 이 감독은 매우 젊어졌다.

종수(유아인)는 파주에 홀로 산다. 소를 키우는 아버지는 공무원 폭행 및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고 군 복무도 마쳤지만 소설을 쓴답시고 유통회사 ‘알바생’을 전전하고 있다.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한 동네에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 저녁에 술을 마신다.

상점 홍보 도우미로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해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간다며 돌아올 때까지 자기가 사는 원룸에 수시로 들러 고양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한다. 원룸에 데려간 해미는 종수가 어렸을 때 자신이 못생겼다고 놀렸다고 회상하며 그를 유혹하고 종수는 꿈같은 사랑을 나눈다.

보일이라 불리는 고양이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밥과 물이 없어지고 배설물이 있는 걸로 봐 존재는 하는 듯하다. 해미의 귀국 전화를 받고 공항에 간 종수는 그녀로부터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오빠’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는다. 서울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고 포르셰를 모는 벤은 특별한 직업이 없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벤과 해미는 수시로 종수를 불러내고 심지어 벤의 집으로 초대까지 한다. 어느 날은 갑자기 종수의 파주 집으로 들이닥쳐 대마초를 함께 피운다. 그 후 갑자기 해미가 사라진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종수는 벤의 주위를 맴돌며 해미의 흔적을 발견하려 애쓰지만 좀체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큰 충격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거나 ‘이게 뭐지?’라고 선택에 후회를 할 것이다. 마치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이 박수갈채를 받거나 구토를 유발한 것과 유사한. 취향의 차이겠지만 전자라면 예술영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관객이 분명하다.

아직 시작도 못한 소설을 쓰는 게 희망인 종수는 그냥 경제상황이 안 좋은 ‘리틀 헝거’고, “몸 쓰는 게 좋다"라며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 해미는 영혼이 배고픈 ‘그레이트 헝거’다. “(하는 일 없이) 그냥 논다"라는 벤은 여자들 앞에서 하품을 멈추지 않는 ‘슈퍼 리치’지만 그 역시 ‘그레이트 헝거’다.

“아프리카 여행을 한다"라는 해미에게 종수는 “왜 하필 아프리카냐?”라고 묻는다. 이때만 해도 그는 단순하거나 무지했다. “눈물 흘린 적 없다"라는 벤과 일맥상통했다. 남매를 버리고 가출한 엄마, 중동에서 번 떼돈을 축산업으로 날린 뒤 분노조절장애로 말썽만 부리는 아버지, 암울한 현실에 분노했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그런데 해미를 사랑하고부터 변한다. 택배회사 면접 때 남들은 다 면접관의 ‘갑질’에 복종하느라 바쁜데 그는 과감하게 반발해 이탈한다. 분노를 억누르고 무력감에 휩싸여있던 그는 점점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물론 그건 ‘금수저’ 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위축감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벤은 2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다. 범죄행위지만 그는 “대한민국 경찰은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라고 비웃는다. 종수는 엄마 가출 후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엄마 옷을 태운 게 죄의식의 전부다. 벤의 지포로 비닐하우스에 불을 붙였다 당황해 금세 끄는 일탈을 계기로 능동적으로 변한다.

‘4차원’ 같은 해미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났고, 억눌린 채 성장했으며, 현재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게 없는 데다 더 이상 바라볼 희망이 없기에 영혼이라도 자유롭게 훨훨 날려 보내자는, 초월했거나 자포자기로 ‘정신줄’을 놓은 현실의 젊은이다. 화면에 종종 등장하는 철새 떼는 그런 해미를 암시한다.

“어느 작가를 좋아하느냐"라는 벤의 질문에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를 거론한다. 포크너는 19~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연대기적 소설들에 미국 남부 상류사회의 부도덕한 인물들을 내세워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고발했다. 포크너 작품의 주인공 같은 벤이 그의 소설을 읽는 건 또 다른 포크너적 아이러니다.

▲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그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내 맘대로 만들 수 있고, 그런 제물을 내 취향대로 만들어 먹으니까”라고 말한다. 해미의 실종에 안절부절못하는 종수에게 그는 “넌 너무 진지해. 페이스를 느껴”라고 조언한다. 세상은 종수에게 두렵고, 해미에게 포기하게 만들지만, 벤에겐 놀이공간일 따름이다.

종수네 집은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북측의 대남선전방송으로 소란스럽지만 벤은 앞마당에서 석양 아래 와인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우면서 “여기 좋네”라고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서민의 지겨운 일상은 부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자 한 번쯤 경험함직한 ‘사서 고생’인 셈이다.

벤은 ‘동시존재’를 강조한다. ‘너네나 우리는 원래 그런 운명이니 그냥 참고 살아’라는 얘기다. 그는 그걸 밸런스라고 말한다. 그가 사는 빌라는 고급 외제차로 북적이는 널찍한 공간이지만 해미의 원룸은 북향이라 하루에 딱 한 번 잠깐 햇빛이 스쳐 지나가는 소외된 달동네다. 불합리한 현실의 동시존재다.

팬터마임을 배운다는 해미에게 종수는 배우가 꿈이냐고 묻고, 해미는 “배우는 아무나 되니?”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낸다. 그래서 종수의 결론은 “항상 문제는 있고,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철학의 향연! 이 감독은 물론 유아인의 필모그래피 중 단연 선두가 될 듯하다. 147분. 청소년 불가.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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