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독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독전’(이해영 감독)은 이 감독의 기존 작품이나 상업적 공식에 충실한 케이퍼 무비, 혹은 ‘메멘토’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같은 굉장히 유니크한 작품과의 차별화가 돋보인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결론은 유추가 가능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여운이 길 수밖에 없다.

서울지방경찰청 마약팀장 원호는 정체불명의 아시아 마약계 거물 이 선생을 잡기 위해 미성년자 수정을 프락치로 투입한다. 그러나 금세 연락이 끊긴 수정은 피투성이로 발견돼 결국 숨을 거둔다. 상사에게서 이 건에서 손을 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지만 극도의 집착을 보이는 그는 명령조차 거부한다.

연옥페인트 회장 연옥은 사실 이 선생의 투자자다. 회의 때문에 인천의 허름한 마약 제조공장을 찾은 그녀는 눈앞에서 공장이 폭파되는 걸 목격하고 이 선생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직감해 원호에게 자수하며 이 선생 검거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해장국을 먹던 그녀는 숨을 거둔다.

폭파된 공장에서 28살의 락(류준열)과 셰퍼드 한 마리가 생존한 채 발견된다. 개는 공장 옆 비닐하우스에 살며 조직의 잔심부름을 해온 락의 반려견이었고, 이 사고로 락은 어머니를 잃었다. 원호는 충격에 마음을 닫은 락을 어머니의 원수인 이 선생을 함께 잡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 영화 <독전> 스틸 이미지

이 선생의 연락책인 락은 중국 최고의 마약 유통업자 하림(김주혁)과 조직의 상무 선창(박해준)을 만나게 하는 걸 주선하게 돼있다고 제보한다. 원호는 하림에게는 선창으로, 선창에게는 하림으로 각각 위장해 만난다. 양측의 거래를 성사시켜 계약 체결 때 이 선생이 직접 나타나게 하려는 작전이다.

거래가 진행되기로 약속되고 하림은 락에게 원료를 넘겨 가공을 의뢰한다. 인천공장을 잃은 락은 자신만 아는 염전에 재료를 넘긴다. 이곳은 농아 남매가 운영하는 비밀스러운 장소다. 농아는 유일하게 락하고만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원호는 지근거리에서 이들을 감시한다.

그런데 염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고급 차량 서너 대가 갑자기 들이닥친다. 선창을 비롯해 건장한 보디가드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락도 본 적 없던 브라이언(차승원)이란 사람이 내린다. 과연 이 선생의 정체는 무엇이며 브라이언과 하림은 또 어떤 인물일까?

영화가 중심을 잡은 지점은 술과 마약의 경계 혹은 정체성이다. 술과 담배는 합법적이면서도 낭만과 사치의 정점에 있었고, 생활의 한 축이기도 했다. 이에 반해 마약은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유혹 혹은 일탈이었지만 범죄였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결국 그 차이는 그렇게 크다고 보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 영화 <독전> 스틸 이미지

원호가 법을 수호하고 범죄에 극도의 혐오감을 지닌 형사라면 브라이언은 마약 조직의 수뇌다. 그런데 브라이언은 믿음을 설파하고, 원호는 동료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범죄조직의 막내인 락을 믿으며, 신념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안달을 한다.

요즘 영화의 트렌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아예 무너진 것이다. 원호가 이 선생을 잡고자 하는 행위 자체는 선이다. 그러나 그 이유와 수단은 결코 선하다고 보기 쉽지 않다. 마약에 빠진 미성년자를 ‘빨대’로 이용해 결국 그녀를 희생시키는가 하면 잡아넣어야 할 락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브라이언은 독실한 신자로서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고, 현재 선교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그는 틈만 나면 믿음을 설파하고, 다혈질인 선창과 달리 존댓말을 상용하며 매우 깔끔한 매너를 보인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뒤엔 잔인함과 비열함이 숨어있다. 원호와 브라이언 모두 표리부동하다.

오히려 선창과 락이 초지일관이다. 선창은 락을 무시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지만 그를 해고하라는 브라이언에게 매를 맞아가면서까지 지켜주려 애쓴다. 락은 어머니를 죽인 이 선생에 대한 분노로 원호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다. 그리고 그는 농아 남매를 한 식구처럼 돌본다.

▲ 영화 <독전> 스틸 이미지

화두는 인식론이다. 원호와 브라이언의 신념 혹은 집착은 도그마적 사변이다. 주관의 형식에 의해 통일된 현상계(칸트)에 다름없다. 선창과 락의 갈등은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다. 그런데 절대 선창에게 해코지하려 하지 않고, 원호도 도우려는 락은 경험론적(선창)이기보다는 이성론적이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의 북유럽으로 추정되는 동토의 눈길을 주행하는 원호의 공허함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많은 단상을 유도한다.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이유로 왔고, 왜 사는 것이며, 갈 걸 굳이 왜 왔는지. 어느 게 선한 거고, 악한 것인지. 그리고 행복은 뭔지’라는 생각과 갈등이 그의 표정에서 읽힌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그 캐릭터들의 파격만으로도 숨 쉴 틈이 없는데 괄목상대한 감독의 연출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달파란의 음악과 스태프의 미장센에 가슴이 벅찰 노릇이다. 조진웅에 놀라고, 김주혁 박해준 차승원에 기겁하며, 류준열에 멍해진다. 123분. 15살 이상. 5월 2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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