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전 세계에서 극찬을 받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국내에서 상영 중이다. 대단한 흥행성적은 아니지만 뜻있는 관객들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그래서 새삼스레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와 그의 세계관이 잘 투영된 ‘프로메테우스’(2012)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빌뇌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스콧 감독의 철학과 문명에 대한 고찰을 잘 반영해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연작이지만 각각 다른 감독이 연출했고 ‘프로메테우스’는 두 작품과 전혀 다른 소재와 주제를 다룸에도 깊게 파고들면 일맥상통하는 주제의식이 꽤 심도 있게 일치한다. 어떤 내용일까?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티탄족으로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 물과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고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가 감춰둔 불을 훔쳐 그들에게 내줌으로써 문명을 가르쳤다. 이는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 영화 <프로메테우스> 스틸 이미지

2085년. 인간이 외계인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생명체라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웨이랜드사의 회장 웨이랜드의 유언대로 이사 비커스는 탐사팀을 꾸려 거대 우주선 프로메테우스호를 타고 외계 행성에 도착한다. 비커스의 비서인 듯하지만 사실상 웨이랜드의 심복인 AI 데이빗이 매우 중요한 존재다. 웨이랜드는 살아있었고, 그는 평생의 궁금증이었던 인류의 기원을 알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싶었던 것.

그들이 낯선 행성에서 발견한 건 거대한 우주선. 그곳에 쌓여있는 시체들은 인류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으며 DNA도 일치했다. 다만 키가 약 3미터 정도로 매우 큰 체격이고 이미 수만 년 전에 현재의 인류를 뛰어넘는 문명과 과학의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인류를 창조해 지구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게 만든 존재였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엔지니어라고 불렀다.

일행은 유일하게 2000년간 동면한 채 생존해있는 엔지니어를 발견하지만 깨어난 그는 눈에 띄는 대로 탐사대를 죽인다. 여기에 더해 뭔지 모를 이상한 괴물들이 속속 출현해 역시 일행들을 닥치는 대로 죽임으로써 탐사대는 몇 명 안 남는다. 탐사대 중 쇼 박사는 엔지니어가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우주선을 발진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프로메테우스호에 전하고, 선장 등 남은 3명은 프로메테우스를 엔지니어의 우주선에 충돌시킴으로써 인류를 구한다.​

▲ 영화 <프로메테우스> 스틸 이미지

그리고 쇼 박사는 엔지니어에 의해 크게 손상된 데이빗의 몸체를 수습해 남은 우주선에 타고 어딘가로 향한다. 이는 기독교의 천지창조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기존의 생명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주장과 철학과 과학 등에 대한 반박이다. 오히려 근현대사의 고고학을 통해 제기된 세계의 각 문명이 서로 먼 거리에서 각자 발흥했기에, 서로 교류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일치하거나 유사한 점이 속속 발견되는 미스터리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주는가 하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5000여 년 전 시작된 이집트문명과 그보다 늦은 마야문명은 각각 지구의 끝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유사한 유적이 마야문명에서 발견된 건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래서 외계인이 인류에 문명을 퍼뜨렸다는 일부 가설이 꽤 심도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양 문명의 유물 중에서 이를 유비할 수 있는 벽화나 상형문자가 꽤 발견되곤 한다.

아마 스콧은 이런 가설을 믿는 듯하다. 이미 ‘블레이드 러너’에서 시작됐다. 2019년 감정이 제거된 신인류(리플리컨트)를 만드는 타이렐사의 LA 본사는 피라미드 형태로 설계됐다. ‘블레이드러너 2049’에서 사실상 국가의 헤게모니를 쥔 갑부 월레스는 타이렐을 인수해 다시 리플리컨트를 생산해내는데 그의 회사 건물 역시 피라미드 형태다. 이 건물 내부 깊숙한 곳에 서있는 석상(?)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엔지니어를, 오프월드의 석상은 ‘프로메테우스’의 지하 동굴에 있던 거대 두상 등을 연상케 한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기원을 찾는 동시에 에일리언의 탄생을 보여주는 영화다. 엔지니어의 실험실 안에 있던 지렁이 같은 괴생명체는 엔지니어의 실험에 의해 변이돼 에일리언의 중간단계로 간다. 여기서 엔지니어가 만든 에일리언의 전 단계는 지렁이의 우성인자를 받아들여 번식능력을 배운다. 더불어 엔지니어 혹은 인류라는 완벽한 생명체를 숙주 삼아 생존을 위한 진화를 배우게 된다. 스콧이 다윈을 아주 외면한 건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와 사랑에 빠진 리플리컨트 레이첼이 결합해 제조가 아닌 번식한 최초의 리플리컨트가 태어난 비밀이 밝혀지는 게 그런 맥락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AI는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리플리컨트다. 그는 자신의 주인인 비커스의 꿈을 훔쳐보고 감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리플리컨트들처럼 창조주인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를 꿈꾼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겉으론 웨이랜드를 충직하게 모시는 듯하지만 그는 웨이랜드는 물론 비커스를 비롯해 자신을 안드로이드라고 업신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후속작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에서 그는 엔지니어의 의해 생긴 변종을 비로소 완벽한 에일리언으로 완성함으로써 인간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창조주가 되고자 한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스틸 이미지

‘블레이드 러너’의 반란 리플리컨트의 리더 로이는 4년밖에 안 되는 생명이 곧 다하게 되자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 박사를 만나지만 그로부터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듣자 죽인다. 로이의 얼굴에선 분노와 고통이 동시에 읽힌다. 사랑하는 여인(?) 프리스를 죽인 데커드에게 복수하려고 그의 숨을 조여 가던 로이는 벼랑 끝에 매달린 데커드를 돌연 구한 뒤 자신의 수명을 다한다.

이는 ‘프로메테우스’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관통하는 생명의 탄생, 탄생의 기원, 존재의 이유, 삶의 과정과 의미, 죽음에 대한 공포와 궁금증 등의 사유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와 레이첼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언제 죽는지 궁금해하는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대화를 나눈다. 고갱의 최후의 역작의 제목과 사르트르의 저서 ‘자아의 초월성’의 주제와 불교의 다르마를 차용했다.

▲ 영화 <프로메테우스> 스틸 이미지

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보편학적 합리주의의 데카르트의 명언을 아예 그대로 가져왔다. 이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주창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도발이다. 타이렐 박사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신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리플리컨트를 ‘죽인다’가 아니라 ‘퇴역시킨다’고 표현하고, 아예 대사 안에 “흑인을 니그로라고 하는 것처럼 리플리컨트를 스킨잡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래서 ‘몇 명’이 아닌 ‘몇 마리’라고 표현한다”고 규정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엔지니어가 사람들을 창조해놓고 그들을 멸절하려 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제멋대로 리플리먼트를 창조하고 마음대로 ‘제거’하듯. 하지만 데이빗이 자유를 찾기 위해 음모를 꾸미듯 리플리컨트 역시 호락호락 인간들에게 자유와 ‘인격’을 억압당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과 자유를 꿈꾼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며 동식물과 환경을 쥐락펴락하려는 인류는 과연 진정한 지구의 주인일까? 지형은 물론 날씨와 대기마저 지배하려 하고, 종의 균형마저 입맛대로 재편하려는 인간은 과연 자연과 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일까, 아니면 자연 자체가 신일까? 특수장치 없인 숨을 쉴 수 없는 황폐한 행성에 비밀기지를 세운 엔지니어와 오만과 편견에 기초한 전횡으로 지구에서 생명체가 자랄 수 없게끔 황폐화한 인류와 다를 게 뭔가? 세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참으로 많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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