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이 지난 3일 개봉된 이후 매일 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추석연휴 흥행시즌을 독주하고 있다. 이전의 1위 ‘킹스맨: 골든 서클’을 3위로 끌어내렸고 2위 ‘범죄도시’보다 2배 이상 앞선 성적이다.

화제작인 만큼 부정적인 반응도 당연히 존재한다. 중간에 잠깐 액션신이 등장할 뿐 긴장을 느낄 만한 서스펜스나 반전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우리 국민이 잘 아는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김훈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새로울 게 없다. 러닝타임은 140분에 가깝다. 지루하다고 느낄 관객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불면증에 좋은 수면제’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다수는 왜 이 영화가 그토록 관객들을 끌어들이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반응이다. 생존이란 생명체의 본능과 더불어 생물 중 유일하게 철학을 고뇌하는 인류로서의 참다운 삶의 좌표에 대한 질문이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당시의 외교적 상황이나 조정 내의 분란과 갈등 등이 현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기시감을 준다는 반응이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이미 인조(박해일)는 9년 전 정묘호란을 겪었다. 국가의 존속과 국민의 생존을 위해 국력을 튼튼하게 다지든가, 그럴 만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울 처지가 못 됐다면 현명한 외교적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만약 병자호란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자체가 지도자로서의 무능이고 직무유기다. 나름대로 임진왜란의 위기를 이겨낸 광해를 몰아낸 서인들의 쿠데타의 의해 옹립된 왕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의 기둥줄거리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이에 맞서 척화론을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첨예한 대결을 통한 명분과 생존의 우위를 다투는 논쟁이다. 굴욕의 삶은 이미 삶이 아니라는 명예로운 죽음과 죽음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 일단 살아서 뒷일을 도모하자는 현실적 선택의 기로다.

광해는 재임기간 만주의 신흥세력인 후금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절묘한 중립외교를 펼침으로써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그가 폐위되자 후금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추종세력들이 후금에게 조선에 출정할 구실을 줬다. 인조를 앞세운 서인들은 명을 떠받들고 청을 오랑캐라 업신여기는 ‘친명배청’의 기득권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당리당략적으로 ‘진보’와 ‘보수’라 규정짓고 벌이는 당파싸움은 이렇게 국익과 국민에게 모두 해롭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그게 정묘호란의 배경이다. 물론 인조는 서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여기서부터 그의 정치적 함량과 깜냥이 부족한 정체성이 드러난다. 정묘호란을 겪은 다음에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됐을 텐데 그는 여전히 왕으로서의 정치력이 부족하고 나약했으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당시 조약을 통해 그와 서인들은 오랑캐를 ‘형님’으로 모시게 된 게 치욕스러웠고, 청은 조선이 명과 적대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조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청은 조공문제로 계속 시비를 걸었고, 그게 빌미가 돼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미 명은 명이 다해 기울어가는 나라였지만 인조와 서인들은 국제정세파악에 취약했거나, 자아도취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상헌의 명분론과 명길의 생존론 중 그 어느 것도 완벽하게 옳을 수도, 모든 백성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양자 중 하나의 최악의 선택을 해야 하는 벼랑 끝의 현실이 오도록 방치한 인조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이기적이고 나태했으며 정치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따름이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상헌과 명길의 양대 기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은 영의정(송영창)과 병조판서, 산성 안의 대장장이 서날쇠(고수)와 그의 동생 칠복(이다윗), 장군 이시백(박희순), 그리고 인조다. 상헌과 명길은 이념의 라이벌이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정치적 신념을 인정해준다. 방법이 다를 뿐 궁극적인 목표는 민초들의 생존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과 병판의 입장은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당파적이며 기회주의적이다. 조선의 왕보다 더 명의 황제를 섬겨온 그들로서는 청에 무릎을 꿇는 건 종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허수아비 인조를 부추겨 명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 상황은 풍전등화다. 명을 버리고 청에 붙을지, 아니면 명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지 주판알을 튕겨보는 중인데 영 계산이 안 선다. 그래서 상헌에게 붙었다, 명길에게 붙었다 우왕좌왕한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정묘호란 때 아내와 딸을 잃은 날쇠는 “명을 섬기든, 청을 섬기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능한 정권을 비판하고, 칠복은 귀천을 따져온 양반 중에서도 고위계층인 조정의 대신들이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반상 가릴 것 없이 국난타계에 동참하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자가당착에 대해 피를 토한다. 심지어 한 백성은 “한양에서 끝장을 볼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지랄들이야”라고 대놓고 조정을 조롱한다. 인조는 그런 욕을 먹어도 싼,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임금으로 그려진다.

영상 등은 “이쪽이냐, 저쪽이냐”고 편 가르기에 몰두하지만 시백은 “난 아무 쪽도 아니고 다만 무관일 뿐”이라며 묵묵히 적을 무찌르는 전투에만 몰두한다. 이런 설정이 관객들에게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고, 역사의 아픔이 현재의 고민과 갈등에 다름없음을 새삼스레 일깨워줌으로써 더욱 전율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누구에겐 수면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수에겐 최루제로 다가와 눈물샘을 자극하더니 어느덧 ‘정치의 주도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통찰의 묘약으로 작용한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우리 국민은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제 한목숨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은 수많은 애국자들을 보면서 자유와 민주가 뭔지 깨우치는 듯했지만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정권의 데마고기와 스케이프 고트에 길들여지면서 그 깨달음을 잊고 어느새 노예근성이란 망령을 되살려내는 오류를 범했다.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인 국정농단 관련사건 등을 조작이라며 ‘대통령님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증거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소수의 ‘귀족’이 쥐락펴락하는 무생물이 아니라 국민들이 제 손으로 뽑은 정치가들로 하여금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게끔 심부름을 시키면서 발전적으로 진행되는 유기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바로 그걸 의미한다. 영화는 교묘하게 상헌의 입을 통해서 그런 주장을 펼친다. 그는 ‘백성이 직접 뽑은 왕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세상’을 꿈꾼다.

메시지가 올바른 정치를 실현함으로써 복지국가 자주국방 등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철학은 삶과 죽음의 가치관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죽어간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언젠간 죽게 돼있다.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무장인 이순신조차 병자호란 전의 임진왜란을 통해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한다면 산다’는 철학을 설파한 바 있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왕족과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과 죽음의 가치관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팩트지만 절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미래와 연관이 없을 수 없다. 선진국이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 석학들로 하여금 고대사와 문명의 미스터리 연구에 매진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인류의 기원과 문명과 역사에 대한 완벽한 통찰을 통해 시대마다 바뀌는 철학을 완성하고, 가장 합당한 이데올로기를 적용한 유토피아를 세우기 위함이다.

결국 에피스테메의 철학이다. 상헌과 명길의 논쟁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이 과연 명예로운 죽음이냐, 굴욕적이더라도 생존하느냐 중에 어느 것인가’라는 고대의 에피스테메(제대로 이데아를 파악하는 인식)를 묻는가 하면, 현대의 정치가에게 올바른 외교를 깨우쳐주는 근대의 정치적 에피스테메(특정 시기의 담론 체계)를 가르친다.

이 영화는 철저한 상업적 논법에서 어긋나기에 지루하다. 역사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모두 해피엔딩이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155억 원이란 적지 않은 제작비는 액션 몹신에도 투입됐지만 철저한 고증이란 데 더 많이 쏟았다. 역사를 흥미로만 읽지 말고 통증으로 경험함으로써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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