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포스터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4일 시작된 KBS2 금토드라마 ‘최강배달꾼’은 경쟁작 JTBC ‘품위 있는 그녀’에 비해 시청률이 아쉽긴 하지만 점차 시청자가 느는 가운데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작품이란 호평 속에서 특히 음식배달부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주인공은 중국집 팔팔수타의 배달부 25살 동갑내기 최강수(고강표)와 이단아(채수빈), 재벌기업 오성그룹의 27살 둘째 아들 오진규(김선호), 음식프랜차이즈 정가네 대표인 어머니 정혜란(김혜리)의 무남독녀 여고생 이지윤(고원희)이다.​

무대는 소상인들이 꾸려가는 먹자골목. 그러나 대규모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혜란이 정가네란 브랜드를 앞세워 상권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가운데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생계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스틸 이미지

강수는 선주인 아버지를 둔 덕에 어촌에서 별로 어렵지 않게 살았다.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던 때 엄마가 전 재산을 챙겨 도망간 탓에 가세가 기울어졌고, 아버지는 폐인이 된 채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교 졸업 후 5년간 한 집에서 2달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철칙 아래 짜장면 배달을 하며 살아왔다.​

그가 새로 정착한 짜장면집은 팔팔수타. 전직 조폭이었음직한 동수(조희봉)가 셰프 겸 사장이고 동네 저축은행장 종현의 전처인 순애(이민영)가 카운터를 맡고 있는데 정작 실세는 강수와 악연으로 만난 배달부 단아였다. 그녀는 손님 응대와 배달 등에서 압도적인 실력과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동수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강수가 또 악연으로 만난 이가 진규다. 아버지는 형만 끔찍이 아끼며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고 ‘회장수업’을 시키는 중이지만 진규는 대놓고 홀대한다. 이에 비뚤어진 진규는 형으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용돈으로 구입한 슈퍼카를 질주하며 일탈을 즐긴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단아의 도움으로 살아난 뒤 그녀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스틸 이미지

강수는 그릇을 수거하던 중 몰래 남은 음식을 집어먹는 가출소녀 지윤을 발견하곤 가게로 데려와 짜장면을 만들어준다. 이유 없는 반항기와 더불어 남다른 자립심을 지닌 그녀는 어머니에 반발해 집을 나온 것. 그렇게 강수의 도움으로 자립의 발판을 마련한 뒤 커피숍 아르바이트 등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외형상으론 상당히 진부한 설정이다. 저마다 남다른 사연을 간직한 10~20대의 청춘들이 얽히고설켜 삶을 고뇌하고 미래를 고민한다는 내용은 수많은 트렌디드라마 속에서 ‘사골국물’이 돼온 구성이다. 네 주인공이 연민과 연정으로 복잡하게 뒤얽힐 것이란 추측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그런 구도는 시작됐다. 강수와 단아는 악연이 우정으로,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중이다.

당연히 강수와 진규는 앙숙으로 시작하지만 우정이 싹틀 조짐도 보여준다. 그런데 오만하고 방자했던 진규는 자살실패를 계기로 ‘천민’ 계급인 단아에게 사랑을 느낀다. 강수와 진규는 원수와 동지 사이를 오갈 것이다. 지윤은 ‘아저씨’ 강수에게서 첫사랑의 조짐을 느끼지만 양가 부모의 밀약에 의해 진규와 정략적 연인이 된다.

▲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포스터

이렇게 평면적인 플롯 안에 그러나 매우 입체적인 디테일이 설계돼있다. 정가네가 동네 상권을 장악해가자 동수는 강수의 신선한 아이디어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극 중엔 배달부들의 순수한 우정도 양념으로 가미된다. 앞으로 강수와 단아가 앞장서 재벌의 물량공세에 맞선 소상인들의 반격을 주도할 것이다.​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스카이에 밀리는 판국에 나 같은 고졸 따위가”라고 자조하며 미국 이민을 꿈꾸는 단아의 인생관 속에는 ‘헬조선’이라며 자포자기한 N포세대의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녀의 배달 에피소드를 통해 이 사회가 여자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편견과 왜곡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왜 그녀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정가네의 융단폭격은 마치 먹자골목의 상권을 백종원 브랜드 및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셰프들의 가게가 장악하는 데 방송이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자아비판하는 듯하다. 이 드라마가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프로파간다에 앞장서는 건 아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진규와 지윤의 일탈이 대표적이다.

▲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포스터

진규는 왕위계승대결에서 낙오된 왕자다. 역사를 보면 왕세자가 결정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권력주변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게 예의이자 살길이었다. 반대세력의 역모의지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왕권계승서열에 가까운 왕족을 멀리 유배를 보내거나 아예 죽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 밑으로 민 뒤 살아오는 놈만 키우는 습성이 있다. 진규가 그랬다. 그의 자살시도는 그런 의미다.​

그런 진규의 생명을 단아가 구해주고, 지금까지 사람에게서 사람냄새를 못 맡고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진규가 단아를 사랑하게 되는 건 단순한 청춘물의 플롯이 아니다. 세상은 경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화합과 이해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인간관계와 삶의 값어치는 돈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강하게 설파하는 것이다.​

많은 시퀀스와 대사의 디테일, 그리고 대부분의 인물들은 웃긴다. 조폭 같은 동수는 그러나 일개 경리직원에 불과한 순애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다. 순애는 섹시한 캐릭터지만 굉장히 시니컬하면서도 인터넷 유머에 집착하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동네 배달부들의 대장인 백공기(김기두)는 쿵푸의 고수지만 어울리지 않게 철학적인 언행을 보이는 가운데 단아를 짝사랑했다가 요즘엔 그녀의 섹시한 룸메이트 최연지(남지현)에게 푹 빠지는 자가당착의 태도를 보인다.​

▲ kbs2 드라마 <최강 배달꾼> 스틸 이미지

그러나 결코 웃기는 기능만 하진 않는다. 앞으로 강수의 친모가 강수의 최대의 적이 돼 눈앞에 나타날 예측은 어렵지 않다. 에필로그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적 장치로 작용하는 강점을 보인다. 웃으면서 즐기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묘한 드라마다. 나이를 묻는 강수에게 지윤은 스물셋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강수는 “스물셋이면 가출이 아니라 독립할 나이”라고 말한다.

​고교생 강수는 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잘 가, 사느라고 고생했어”. 대한민국은 ‘흙수저’에게 사는 게 고생인 나라다. 권력이 인권을 지배했고, 이념이 이성을 억제했으며, 전통이 현실의 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온고지신에 대한 이율배반 자가당착 아전인수... 어쩌면 그게 개선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일 수도 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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