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포스터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9일 시작된 KBS2 새 수목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은 정말 이상한 드라마다. 편집과 진행은 스피디하다가도 어느새 축축 늘어지고 화면 역시 재빠르게 전개되다가도 하품을 유발할 만큼 느릿느릿해진다. 드론 촬영, 분할편집, 대칭적 미장센 등 다양한 테크네가 발휘되지만 스토리는 진부하다.

주인공은 28살 죽마고우 봉필(김재중) 강수진(유이) 윤진숙(정혜성) 조석태(바로)다. 필과 석태는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고, 진취적인 이념의 진숙은 일찍부터 이동 과일주스점을 차리고 개업한 ‘사장님’이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수진은 동네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필은 한 병원에서 태어나 옆 침대에서 함께 자란 수진을 초등 3년 때부터 짝사랑해왔다. 그러나 육상선수도 못 됐고, 대학진학도 포기한 채 말만 고시준비생이지 백수인 자신의 처지 탓에 사랑한단 말 한 마디조차 못하고 오늘에 이른 숙맥. 그런데 수진이 일주일 뒤 결혼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상대는 3살 연상의 동네 약국의 약사 재훈. 키도 훤칠한 데다 돈도 잘 번다고 한다.

▲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스틸 이미지

수진의 집에 함이 들어오던 날 이상한 작은 불빛들이 서울상공에 뜬다. 그 중 하나는 필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다가 사라져 동네 공원 뒤 맨홀 뚜껑 속으로 사라진다. 필은 술에 취한 채 수진 집 앞 골목의 함진아비를 상대로 시비를 건다. 다음날 수진도 그녀의 예비신랑도 연락이 두절되자 필은 그들이 결혼 전 미리 초야를 치른다는 상상에 몸서리치며 동네 모텔을 뒤진다.

우여곡절 끝에 수진과 마주한 필은 드디어 속마음을 고백을 하려하지만 ‘사랑해’의 ‘ㅅ’자조차 입에서 떨어지지 않고, 갑자기 요의를 느껴 수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공원 뒤로 달려간다. 한참을 기다려도 필이 나타나지 않자 그를 찾아간 수진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신경질적으로 뜯긴 그녀의 청첩장만 발견한다.

필은 바로 그 장소의 맨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타임슬립해 고교생 때로 되돌아간다. 서울상공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빛은 바로 아주 작은 존재의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었다. 우주선은 맨홀로 들어갔고, 그 맨홀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필이 타임슬립할 수 있었던 것. 이제 고교생이 된 필은 수진의 결혼을 저지할 시간을 10년을 벌게 됨으로써 한시름 덜게 됐다.

▲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스틸 이미지

모든 소재와 설정이 구태의연하고 천편일률적이라는 출발점부터 지루하다. 외계인의 초능력에 의해 타임슬립한다는 기획은 진부하다. 앞으로 그 초능력이 어떤 용도로 어느 지점에 쓰일지의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기존 작품의 레퍼런스는 예상이 그리 어렵지 않다.

다음으로 아쉬운 건 눈에 익은 캐릭터와 그들의 배치도다. 이웃한 죽마고우로서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설정은 ‘철수와 순이’ ‘갑돌이와 갑순이’다. 한쪽은 중상류층이고 나머진 중하류층이란 설정 역시 기시감을 준다. 두 주인공의 주변인물도 고만고만하다. 동기동창인 진숙과 석태는 요즘 젊은이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출산해내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은 창조물이다. 주변인물인 정애(그들의 동기동창), 정애의 동거남이자 필의 선배인 달수, 그의 친구인 구길 등은 모두 천편일률적인 만화 속 캐릭터.

수진의 친구이자 필의 앙숙인 정애는 예쁜 척하지만 초등3년 때 교실에서 ‘큰’ 실례를 한 적이 있는 ‘진상’ 캐릭터. 달수는 영화에 뜻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네에서 만화와 영상물 대여점을 한다. 당구장을 운영하는 구길은 전형적인 ‘단무지’형.

▲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스틸 이미지

게다가 각 캐릭터는 시대에 뒤떨어져있다. 필은 그 나이에 부모에게 담뱃값을 구걸하고, 그게 안 먹히자 거리의 꽁초를 주워 피운다. 가장 ‘절친’인 석태는 왠지 번번이 필에게 주눅 들어 있고, ‘여자사람친구’인 진숙은 필과 수진 모두에게 조언하는 중간관리자다.

수진의 캐릭터가 애매모호하다. 건망증이 심하고, 뭘 하든 ‘마이너스손’이라는 설정은 외모와 정반대라 나름의 독립성을 갖지만 기껏 재현과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한 후 재현과 필 사이에서 확실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다만 필이 확실한 자기색깔을 가졌다는 점에선 설득력을 어느 정도 갖추지만 문제는 짝사랑이란 설정에 있다.

요즘 도시의 28살이면 이미 독립했거나 최소한 자신의 노선을 정했고,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을 나이다. 수진과 재현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초야를 치르려면 일주일밖에 안 남았네”라며 전전긍긍하는 필에게 진숙이 “그게 아닐 수도 있지”라고 응수하자 발광하는 필을 바라보면 도대체 요즘 또래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게다가 이 시퀀스는 여자의 혼전 순결을 강요하던 구시대의 남성들의 불평등한 성의 의식을 소환하는 듯한 불쾌감마저 던진다. 요즘 젊은이들이 함 들이기 문화를 알기나 할까?

▲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스틸 이미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짝사랑하면서도 지금까지 10여 년 간 고백 한 번 못한 필 같은 남자가 현실에 있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있다면, 수진처럼 이미 커리어작가로서 사회적으로 독립한 매력덩어리 여자가 거들떠보기나 할까? 지금으로 치면 중-고생이었을 이몽룡과 성춘향도 그러진 않았다.

주, 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극의 한가운데로 파고듦으로써 시청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는 점은 스토리를 보완하더라도 내내 논란의 꼬리표를 달 것이다. 필의 캐릭터는 확고부동하지만 김재중의 연기는 붕붕 떠다닌다. 작정한 듯 망가진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행동은 과한데 깊이가 부족하다. 그런 산만한 캐릭터가 진짜 존재할지,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친구를 주변에 둘 수 있을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이유다. 그래서 김재중의 연기는 영혼은 안 보이는 대신 억지만 풍성하다.

유이 역시 감정의 주변을 겉도는 연기는 ‘전우치’에서 크게 발전된 바가 안 보인다.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거나 눈동자를 부각하는 시도는 좋았지만 디테일을 발전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두 사람의 대사실력 역시 갈 길이 요원하다.

▲ kbs2 드라마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 스틸 이미지

그래서인지 오히려 정혜성과 바로가 자연스럽다. 그나마 봐줄 만한 배우는 필의 부모인 봉달(주진모)과 윤끝순(김혜옥)이다. 수진과 재훈이 벌써 잠자리를 할 것이란 착각에 빠져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필이 달과 끝순도 본체만체한 체 지나치자 달이 “저 녀석이 애미 애비도 몰라본다”고 혀를 차자 “냅둬요. 그러려니 하고, 우리끼리 잘 사는 방법이나 찾아봅시다”라고 끝순이 시니컬하게 달래는 시퀀스는 1회에서 가장 웃겼고, 그나마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메시지를 던져줬다.

분명 ‘맨홀’은 10~30대를 겨냥한 트렌디드라마다. 하지만 MBC 최민수 주연의 ‘죽어야 사는 남자’(11.2%, 이하 닐슨코리아 집계) SBS 여진구 주연의 ‘다시 만난 세계’(6.5%)에 한참 뒤진 3.1%의 참담한 시청률로 시작한 걸 보면 트렌드와 거리가 있는 듯하다. ‘네가 나 두고 딴 놈이랑 무사히 결혼할 수 있을 거 같아?’라는 시대착오적 카피가 이 드라마의 아이덴티티를 웅변해주는 듯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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