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언제부턴가 여름 극장가엔 한국 공포영화가 자취를 감췄다. 꾸준히 가성비 높은 저예산 공포물을 만드는 할리우드와 다른 이유는 영화보다 더 무서운 범죄와 정치가 횡행한 탓일지도 모른다. ‘장산범’(허정 감독, NEW 배급)은 ‘월하의 공동묘지’ ‘구미호’ ‘여고괴담’ 등 전형적인 한국형 공포영화에 목말랐던 관객들에게 굉장히 반가울 정통 호러물이다.

장산은 부산 해운대의 산이고, 범은 포유류 식육목 고양잇과 동물이다. 호랑이란 표현은 ‘범+이리+이’라는 일제의 잔재로 알려진다. 장산범은 장산에 사는 범인데 세상을 떠난, 사랑했거나 믿었던 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산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전설의 악귀를 의미한다.

깊은 밤 불륜의 커플이 승용차를 몰고 장산의 외진 도로를 달리다 개를 치어 죽인다. 개의 사체를 트렁크에 싣는데 거기엔 남자의 아내가 잡혀있다. 남자는 산속의 폐쇄된 동굴에 아내와 개를 유기한다. 그런데 동굴을 막은 벽돌 사이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분명히 죽음을 확인했는데.

▲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 순자(허진), 남편 민호(박혁권), 초등학생 딸 준희와 사는 희연(염정아)은 자신의 정신병 치료를 위해 장산의 한 애완견 펜션으로 이주한다. 순자는 먼저 떠난 언니의 환청을 듣고, 민호와 희연은 5년 전 실종된 첫아들 준서에 대한 그리움과 그를 잃어버린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희연은 집 앞에서 서성대는 어린 남매를 발견한다. 그들은 잃어버린 애완견 또띠를 찾는 중이다. 남동생은 또띠의 짖는 소리를 들었다며 누나를 재촉하고 희연과 민호는 그들을 돕기 위해 동굴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의 시신과 또띠의 사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 과정에서 희연은 준희 또래쯤 되는 신원미상의 소녀(신린아)를 발견한다.

그러나 소녀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 그날 밤 펜션의 문을 두드리고, 남다른 모성애를 느낀 희연은 그녀를 집에서 보호하기로 한다. 말이 없던 소녀는 준희의 밝은 목소리를 듣더니 말문이 트이고, 자신의 이름이 준희라며 희연을 엄마라, 민호를 아빠라 각각 부르며 가족을 따른다. 그런데 어느새 소녀는 준서의 목소리마저 흉내 낸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민호는 희연에게 경찰에 소녀를 넘기라고 재촉하지만 희연은 막무가내로 소녀를 감싼다.

▲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여자시신 유기사건을 조사 중인 경찰은 동굴 주변에서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펜션 주변에 서성대던 눈먼 무녀는 희연에게 “동굴이 열렸어. 소리가 다시 들려.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한다. 발작이 시작된 순자는 방안의 거울을 청테이프로 막으며 왠지 모를 공포감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소녀를 죽이겠다며 식칼을 휘두른다.

민호는 순자를 다시 요양원에 보내자며 짐을 싸고, 희연은 준서를 찾을 유일한 희망인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다며 맞선다. 5년 전 희연은 바쁘다는 핑계로 준서를 순자에게 맡겼으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녀는 준서를 금세 잃어버렸다. 심한 정신병에 시달리던 희연은 급기야 읍내에서 준서를 보는가 하면 소녀를 준서라 부르는 등 심각한 상태로 치닫는다.

영화는 동영상을 보며 즐기는 콘텐츠라 사운드의 중요성을 적지 않은 관객들이 간과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대놓고 청각을 앞세운 공포물임을 강조한다. 장산범이 어떻게 사람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불행 혹은 죽음으로 내모는지 오컬트 토템 등의 장르에 수사물과 스릴러의 장치를 내세워 보여주고 들려준다.

▲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모든 영화에서 사운드는 중요하다. 최근 ‘덩케르크’가 이를 잘 입증한다. 무성 공포영화는 팥소 없는 찐빵일 것이다. 영화는 장산범이란 민담 속 귀신에서 출발해 전래동화 ‘해님달님’을 빌리고, 그리스 신화의 님프 세이렌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일반 영화보다 5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시녹음작업을 통한 음향효과에 치중하는 가운데 비주얼에 있어서도 극한의 공포를 주기 위한 장치를 곳곳에 포진했다. 컴컴하고 깊은 동굴이라는 공간이 주는 두려움은 마치 관객이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던지는 메시지는 겉으론 가족 간의 사랑이지만 사실 그 중심은 믿음에 있다. 가장 믿었던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어야 하지만 장산범은 그걸 이용한다. 신뢰가 불행과 죽음을 야기한다면 사람들은 고통과 역경을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주저앉아 종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믿음만큼 영화가 역점을 두는 지점은 바로 약속이다. 희연은 준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준서는 엄마를 믿었으나 그 신뢰는 이별로 이어졌다. 정체불명의 소녀는 어쩌면 또 다른 준서일지도 모른다. 폭력과 고문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약속 혹은 믿음이 무너진 그녀가 희연과 민호 앞에 나타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감독은 이 믿음이란 키워드를 통해 죄책감과 이기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지은 죄에 괴로워하는 사람조차도 결국 최후의 순간엔 아전인수의 이기주의를 선택하게 돼있다는 점을 비꼰다. 비주얼 자체만으로도 호러 퀸인 염정아는 이견이 파고들 틈새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펼침으로써 만만치 않은 박혁권의 열연을 무색하게 만든다.

▲ 영화 <장산범> 스틸 이미지

뭣보다 놀라운 건 신린아의 존재감이다. 만 8살을 갓 넘긴 소녀가 그토록 신비로운 캐릭터를 깔끔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에선 염정아와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다. 30여 년의 나이차를 뛰어넘는 두 여자의 조화와 대립의 구도는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단,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교과서적인 기승전결은 사운드 호러라는 거창한 구호에 비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플롯은 문제가 없지만 펼쳐놓은 보따리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는 데에도 빈 공간이 듬성듬성 보이는 스토리 이음새도 옥에 티.

그럼에도 여름의 단골메뉴인 냉면이 사라진 듯했던 한국영화계에 오랜만에 등장하는 정통 호러물이란 점에선 꽤 많은 관객이 반가워할 듯하다. ‘몸비시즌’의 텐트 폴 영화에 피로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손뼉을 치며 환영할 만하다. 한국적 정서에 충만한 영화인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니까. 100분. 15살 이상. 8월 17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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