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군함도’(류승완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가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만큼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왜 이 영화에 그토록 관객이 몰리면서도 비난이 거세지는지에 대해 오피니언 리더는 물론 대중도 한걸음 물러서 숲을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결론은 류 감독이나 CJ엔터테인먼트에 손가락질하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이 영화 자체가 폄훼되거나 하시마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널리 알리려 했던 본질이 논란 뒤에 가려져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영화대로 그 기능을 하고, 역사는 역사대로 꼭 바로세우기와 결자해지가 돼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영화의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시작되자마자 스크린을 독식하다시피 한 대기업의 횡포 의심과 류 감독의 역사왜곡 여부다. 스크린 독과점은 류 감독을 비롯해 주연배우들과는 무관하다. 이 사안은 재벌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투자 배급 극장운영을 한꺼번에 함으로써 생긴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국민들에겐 모든 자유가 보장돼야 하고 그에 따라 극장상영용으로 제작돼 개봉된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독과점에 대한 비난은 이 권리를 빼앗음과 동시에 작은(다양성) 영화 및 그 관계자들의 존재에 큰 위협을 가한다는 데 근거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될 경우 결국 대형 배급사가 돈을 대는 상업적 의도가 충만한 영화들만 넘쳐나게 됨으로써 문화발전이 가로막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다. 중소기업을 살리겠다고 재벌의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제한할 근거는 없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3대 멀티플렉스가 문화사업을 하는 기업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이윤창출과 동시에 문화발전에도 기여할 자세를 갖추고 실천하는 사명감이 관건이다.

역사왜곡에 대해서만큼은 류 감독이 겸허하게 고개를 조아릴 필요는 있다. 우연히 군함도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영화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군함도라는 역사적 아픔을 많은 국민들에게 일깨움으로써 친일을 청산하고 역사의 아픔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군함도’를 기획한 그의 의도는 화면 곳곳에서 충분히 드러나는 건 사실이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그러나 관객은 군함도 안에서 조선인들이 술과 담배와 간식 등을 즐기는 픽션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당시 절대 있을 수 없었던 일이고, 오히려 정반대로 짐승만도 못한 핍박과 학대를 받았으며 파리 목숨과 다름없는 멸시를 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일치단결해 탈출을 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시퀀스는 관객을 하나의 액션활극이라는 영화적 설정에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역사의 상처를 간과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기에 비난이 쇄도하는 것이다.

물론 감독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아무리 철저하게 고증을 하더라도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기 힘들다. 류 감독은 하시마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단순한 목적이 아니라 잘 안 알려진 하시마의 아픔을 통해 역사의식을 재무장하고 일본의 올바른 역사청산의 노력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게다가 220억 원이나 썼으니 흥행을 무시하고 역사재현에만 집중하는 건 무리였다. 만약 류 감독이 이준익 감독의 ‘박열’처럼 찍겠다고 했으면 CJ가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섰을까?

영화인들은 ‘영화적 상상력’이란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모든 영화가 여기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원작이 있더라도 글을 동영상으로 확대제작하자면 당연히 엄청난 상상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류 감독의 해명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갖추긴 하지만 문제는 대중은 영화인이 아니라 관객이란 차이점에 있다. 류 감독이 간과한 점이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하지만 친일이라거나 욱일기를 반으로 자르는 장면 등이 ‘국뽕’이라는 지적은 분명히 밖에서 숲을 바라볼 필요성을 야기한다. 일본군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지도층이나, 자신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 동료를 핍박하는 노동자를 설정한 건 친일적 의도가 아니다. 그런 친일파는 분명히 존재했었고, 지금도 남아있다. 그건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를 단죄하자는 감독의 강력한 의지의 알레고리다. 우리 관객들의 해석력이 그 정도 메타포도 눈치채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당시 일본군기였던 욱일기는 현재 일본 내에서도 의식이 깬 지식인들은 물론 대다수가 금기시하는 그릇된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나치가 독일의 금기어이듯. 그걸 반으로 자르는 장면은 오히려 일본군을 죽이는 시퀀스보다 점잖다.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가족들을 죽인 일본군에 대한 저항과 복수의 상징적 의미인데 그게 ‘국뽕’이라면 아직도 나치의 부활을 우려하고 견제하는 유럽인들의 수준은 극우익의 ‘국뽕’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오히려 이 시퀀스는 이준익 감독의 ‘박열’과 비교되는 게 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만 곧 천황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는 명령서를 보내자 그걸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니들이 뭔데 내 생명을 갖고 노냐”고 분노한다. 자신의 의도가 지극히 정의롭고, 의지가 그 뭣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박열이나, 힘으로 일본군을 못 이기니 군기라도 갈라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강옥(황정민)이나 그 정신만큼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강옥은 탈출에 사다리를 이용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 물론 감독의 의도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위안부 말년(이정현)이 갑자기 명사수가 되는가 하면 무시하며 갈등하던 종로깡패 칠성(소지섭)과 서로 갑자기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는 시퀀스는 류 감독의 영화치곤 어이가 없다. 후반부의 반전을 제외하곤 전체 스토리가 예측이 뻔한 상업영화의 클리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하면 캐릭터가 산만한 점 등도 감독이 겸허하게 뒤돌아볼 줄 아는 게 바람직하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영화에 대한 최종판단은 평론가도 감독도 관계자도 아닌, 관객의 몫이다. 다수의 관객이 ‘이렇다’고 하면 이런 거고, ‘저렇다’고 하면 저런 거다. CJ의 독과점, 류 감독의 억지 설정, 일부 배우의 변함없는 연기 등에 대한 지적은 분명히 근거가 존재한다. 당사자들이 겸손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영화 자체의 존재가치마저 퇴색해선 곤란하다. 왜냐면 아무리 영화 한 편의 총책임자가 감독일지라도 오롯이 감독 한 명의 소유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을 놓고 ‘내 영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100명이 넘는다. ‘군함도’의 경우 류 감독이 특별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100명에 가까운 보조출연자와 제작에 참여한 그만큼의 스태프는 감독이나 투자배급사 못지않은 ‘주인’이다. 일부의 실수 혹은 잘못으로 인해 심하게 고생하면서 영화의 완성에 큰 힘을 보탠 그들의 피와 땀마저 폄훼되거나 아예 평가조차 받지 못한다면 영화라는 문화의 발전은 더뎌지거나 답보상태에 머물 위험성이 높아진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군함도’는 분명히 우리 국민이 그동안 잘 알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소재를 채택함으로써 역사의식에 공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영화라는 점 하나는 분명하다. MBC ‘무한도전’이 시청자들에게 군함도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단초 역시 분명히 이 영화가 제공했다. 논란의 근거는 어쩌면 멀티캐스팅과 더불어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높아진 류 감독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인지도 모른다.

다수의 의식이 깬 관객들은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놓고 고민하지 않고 ‘둘 다 보겠다’고 다짐하는 의사를 온라인을 통해 적극 올리고 있는 중이다. 역사는 시공간으로는 과거지만 정치와 철학에 있어선 현재의 교과서이자 미래의 거울이다.

류 감독이 욕을 먹을지언정 ‘군함도’까지 싸잡아 매도돼선 안 되고,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경쟁이 아니라 동반해야 하는 이유다. CJ나 쇼박스(‘택시운전사’ 배급) 등 대기업이 돈을 벌건 말건 영화가 국민 정서에 봉사하고 역사에 공헌하는 게 더 크고 중요한 일이니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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