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운명적 사랑’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면 mbti 유형에서 f(감성형)일 가능성이 높고, 유치하다 생각하면 t(사고형)일 가능성이 높다. ‘운명’과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배제한다면, 각자가 두 단어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천당과 지옥만큼 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적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 정도로 ‘운명’과 ‘사랑’ 이 두 단어의 조합은 파괴적이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사용되고도 앞으로 또 사용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운명적 사랑’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면, 운명적 사랑의 기대치를 너무나 높고 고결하게 잡은 탓이라고 하겠다. 웰메이드 멜로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선남선녀의 운명적 만남과, 좌충우돌을 겪고 단단해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거나, 그것까지는 아니라도 서로의 인생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을 운명적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쯤에서 단어정의를 다시 해봐야 하겠다. 명리적 관점에서 본 ‘운명적’이라 함은 ‘이성이나 감정이 아닌 오행의 작용력으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어떤 힘’이다. 순애보나 멜로보다는 오히려 지긋지긋하게 질긴 인연에 가깝다. 좋아 죽는 운명적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필자가 본 대부분의 운명적 사랑은 죽일수도 버릴수도 없는 망할놈의 사랑이었다.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 최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운명적 사랑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배울점이 많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가치있는 것이다. 보완의 과정이 협치에 의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전쟁을 불사하듯 아귀다툼을 거치면서 서로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보완방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사랑이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그 모습을 변화시킨다. 결코 인간의 마음으로는 사랑의 실체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결국 변화하는 오행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변화무쌍한 사랑의 본질도 이해할 수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사랑의 종류도 다양하다. 진짜 사랑이냐 가짜 사랑이냐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진짜라고 느끼면 진짜인 것이다. 이 세상에 백 퍼센트 객관성을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랑이 변하는 것에 너무 민감하지도 말아야 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그것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그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심장은 뇌보다 영리하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은 뇌보다는 심장과 친하다. 우리의 모든 세포속에 녹아있는 오행의 기운을 무의식이라고 환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결국 뇌가 아닌 심장의 소리를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끌리는지 물어봤자 심장은 말이 없다. 그저 요동칠 뿐. 그러니 왜 내가 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지긋지긋한 사랑을 하는지 묻지말고 그저 사랑하라. 

▲ 오경아 비엘티 아케아 대표

[오경아 대표]
건국대 철학과 졸업
전 수능영어강사(번역가)
현 비엘티 아케아 대표
현 교환일기 대표
현 세렌 사주명리 연구소 학술부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