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3차 답사인 ‘흥덕동천 물길 따라 걷는 동궁 동쪽 길’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지난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정문에서 세 번째 ‘물길답사’가 시작됐다. 이곳은 혜화역에서 흥덕동천에 합류되는 동반수와 서반수가 만나는 곳이다. 이번 물길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란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문화지평은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5대 물길 답사와 함께 3D, 동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답사 대상은 백운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 청계천을 이루는 5개 지류 발원지부터 청계천 합수 지점까지다. 이번 답사는 5개 지류 중 세 번째 코스인 흥덕동천 물길이다.

흥덕동천 발원지와 물길 흐름

▲ 흥덕동천의 물길 흐름. 성균관을 감싸고 흘러나오는 동반수, 서반수가 성균관 앞에서 합쳐지고 이는 다시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흥덕동천 본류와 합수돼 청계천으로 흐른다.[그래픽=서울역사박물관]

홍덕동천은 서울의 북동부를 흐르는 하천이다. 북에는 백악, 동으로는 응봉과 낙산, 남으로는 청계천이 위치한다. 흥덕동천 물길은 서울국제고 운동장과 서울과학고 북측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서울과학고 운동장에서 합쳐져 흘러내린다. 흥덕동천은 현재의 혜화로터리 부근에서 성균관 동쪽의 동반수와 성균관 서쪽의 서반수와 합쳐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흥덕동천 물줄기의 근원은 백악산의 동쪽에 위치한 응봉이다.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산줄기인 한북정맥은 북한산까지 내려오다가 한양의 주산 백악을 만들고 백악은 응봉으로 이어지면서 좌청룡 우백호인 낙산과 인왕 갈라진다. 문화지평이 1, 2차 답사를 했던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의 발원지는 백악인데 비해 흥덕동천은 응봉이 발원지다.

흥덕동천은 흥덕동수 또는 성균관 흥덕동수라고도 불렸다. 이는 발원지가 과거 흥덕동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흥덕동 동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다. 김태휘 해설사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상왕이 됐을 때도 이곳 연희방 동부에 궁전을 짓고 살았다”며 “1407년(태종7) 이곳에 있던 태조의 궁전을 사찰로 바꾸고 이름을 흥덕사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태종실록 권13(태종7년 1월24일 기록)에 따르면 주지는 설오 스님을 삼았고 토지 250결과 노비 50명을 하사했다. 흥덕사는 태조의 명복을 기원하는 참경법석과 백일재를 거행했고 기신제(忌晨祭)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불교의식을 거행한 당대의 대찰이었다. 흥덕사 터를 가기 전에 답사는 성균관대 정문에서 시작했다. 흥덕동천 발원지인 서울과학고 쪽에서 시작하면 동반수와 서반수 발원지와 합수지점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사팀은 성균관대 정문에서 모여 성균관 문묘를 둘러보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성균관대 앞은 동반수가 흐르던 물길이고 향석교 건너편은 성균관 노비들이 몰려 살았던 반촌이란 ‘특수한’ 공간이다. 한편 김 해설사는 성균관 문묘 전문 해설사다. 학문과 제례의 공간에 대한 해설도 좋지만 그의 특기인 수목생태에 대한 해박한 설명이 좌중을 압도한다. 그의 해설을 따라 흥덕동천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긴 여정’이란 표현은 그가 이날 장장 4시간 가까운 해설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흥덕동천의 다리들

▲ 옛 지도 위에 흥덕동천에 놓였던 다리 위치 표시한 것이다.[출처=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흥덕동천은 긴 물길 때문에 10개의 다리가 놓였다. 향교(香橋)는 현재 명륜동교회 근처에 놓였던 다리다. 조선시대 한양의 경치 좋은 명승 10곳인 경도십영(京都十詠) 중 한 곳인 흥덕동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동반수를 건너기 위해 놓인 다리고 꽃과 연꽃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관기교는 현재 명륜동2가 180번지에 있던 다리이다. 옛 대명거리 초입 있던 다리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자주 성균관에 행차해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곤 했다. 이때 임금이 타고 오는 수레가 창경궁 북쪽의 월근문(月觀門) 쪽에서 명륜동 쪽으로 박석고개를 넘어온다. 어가 행렬이 박석고개에 이르면 이 다리에서 행렬의 제일 앞에 선 용기(旗)를 바라다보고 임금 행차를 알았다고 해서 ‘임금 깃발을 바라볼 수 있는 다리’ 라는 의미로 관기교라 했다.

사낙교는 대명거리 중간에, 광례교는 흥덕동천과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다. 광례교는 수선전도에 광교로 표시돼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다리를 중심으로 동쪽 부근에 현방(오늘날의 푸줏간)이 있었다. 토교는 혜화동로터리 우리은행 뒤편에 있던 다리다. 하천 양쪽 기슭에 나무를 걸쳐 놓고 그 위에 흙을 깔아 덮어서 토교 또는 흙다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성 안에 놓여 있던 다리가 대부분 토교였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자주 쓸려 내려가자 점차 석교(돌다리)로 바뀌게 됐다.

응란교는 서울대 의대 앞에 있던 다리다. 조선시대엔 영조의 아들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추념하기 위해 세웠던 경모궁 앞쪽에 놓여 있던 것이다. 장경교는 흥덕동천의 대표적인 다리다. 연건동 128번지 동쪽과 이화동 171번지 서쪽 사이에 있던 다리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필요한 관곽(棺鄕)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장생전(長生殿) 앞에 있어서 장생전교 또는 장경교라고 불렀다. 줄여서 장교라고도 했다.

신석교는 효제동 108번지와 충신동 104번지 사이에 있던 다리다. 새로 놓은 다리라는 뜻에서 새다리 혹은 신교라고 했다. 처음엔 토교였지만 조선 후기 돌다리로 새로 만들면서 신석교로 붙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길이 종로통으로 빠지기 직전에도 다리가 하나 있었다고 수선전도 등에 표시는 있지만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흥덕동천의 마지막 다리 초교는 종로 5가와 6가를 잇는 다리다. 성 밖에서 동대문을 거쳐 도성에 들어와 종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초교란 이름을 달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대문 쪽에 있는 다리라서 동교, 대동여지도에는 연지동 동쪽의 다리라는 의미에서 연지동동교라고 기록돼 있다.

흥덕동천 주변 공간

▲ 흥덕동천 주변에는 성균관을 비롯한 역사적 공간이 많다.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찍은 답사팀 단체 사진.

답사 출발지 성균관을 빼놓을 수 없다. 김 해설사는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유교적 지식인이 주축이 된 새로운 지배계층은 유교를 국가의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천명하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생활양식까지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며 “그들은 수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최고 교육기관을 두고, 모든 고을에 ‘항교’라는 지역 학교를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정문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것이 탕평비각과 하마비다.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영조 18년(1742)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글을 비로 만들어 1칸 규모의 비각 안에 두었다.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도 한다. 비각 옆의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란 글이 각자 돼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라’란 뜻이다. 문묘 정문인 신삼문은 늘 굳게 닫혀 있지만 제례가 있는 날은 열린다.

건물 우측에는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하연대가 있다. 하연대 옆으로는 동삼문이 있는데 이 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다. 요즘도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 일반 관람객은 동삼문 위쪽에 대문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유교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이념이 되면서 이를 위한 유교건축이 발달했다. 크게 나누어 제사를 지내기 위한 ‘예제건축’과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학건축’이 있다. 사직단과 종묘, 성균관, 향교, 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향교와 서원은 공부하는 곳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또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한옥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유교건축은 성리학의 미학 즉 절제와 명분에 따라 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장식을 줄여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어졌다.

성균관 문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성전을 만난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대성전 내부는 오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해동(우리나라) 18현 등 성리학의 선성선현(先聖先賢) 3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선왕(공자의 존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을 오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최치원, 정몽주, 송시열, 설총, 안유(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 내로라하는 거물급 학자들이 봉안돼 있다.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봄, 가을에 한 번씩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통틀어 문묘라고 하는 데, 이는 제례 공간이다.

문묘와 짝을 이룬 공간이 명륜당이다. 이와 함께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 서재 등 해설을 들으며 성균관 내부를 돌아보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김 해설사가 아주 촘촘하게 성균관의 역사와 건물, 건축에 대해 설명한 자리였다.

설명은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양현고(養賢庫)를 지나면서 이어졌고 답사팀은 흥덕사 터로 향했다. 양현고는 성균관 옆에 있고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곳이어서 호조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임금이 내린 성균관 학전 1000결과 소유 토지의 수입, 노비 400명의 신공, 그 외 어세 등이 수입원이었다. 현방을 하는 반인들의 벌금도 수입원이었다. 그 수입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식량·물품을 공급했다.

조선의 치외법권 지대 반촌

흥덕사 터, 송시열 집터로 가는 길은 옛 반촌 지역을 우측에 두고 접하면서 올라간다. 반촌은 지금의 명륜동2‧3가, 그리고 4가 일부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 동북부 지역은 민가가 거의 없었는데 유독 성균관 주변 반촌은 북적였다고 한다.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반인(泮人)이라고 하는 데 원래 개성 사람들이다.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고려 학자 안향이 국학을 세우면서 노비 100명을 헌납했고 이들이 성균관 공노비로 이어진 것이다. 반인과 반촌은 성균관의 별칭인 반궁(泮宮)에서 분화된 이름이다. 반인들의 임무는 문묘 수호와 유생 공궤다. 성균관의 제례를 지원하고 유생들 뒷바라지가 주요 사역이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개경에 있다가 조선 건국 이후 1397년 한양 숭교방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때 노비들도 따라 내려와 반촌을 이룬 것이다. 반촌은 반인들이 거주 공간이자 성균관 유생들이 밖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명거리는 지금의 혜화역 4번 출구에서부터 성균관대 정문에 이르는 길은 그때도 잘 발달된 상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반촌에서는 유생들이 바둑과 같은 여가생활을 즐겼고 지방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이들의 임시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반인은 노비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이란 특수 공간의 노비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다. 조선시대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는 우금(牛禁) 정책이 있었다. 성균관에서 올리는 제사와 유생들 식사를 위해 소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성균관 내에 도사(屠肆)를 설치해 반인이 그 일을 담당하게 했다.

반인들은 당시 성균관 노역에 집중해야 했기에 농업, 수공업 등과 같은 생계유지형 일을 별도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정은 그들에게 남은 소고기와 부산물을 내다 팔아 이윤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다른 노비들과 마찬가지로 신공(身貢)을 바치는 역을 수행하는 노비지만 반인들에게만 주어진 경제적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성균관과의 ‘경제공동체’ 개념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7세기 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균관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인 학전(學田)의 상당 부분을 다른 권력기관에 빼앗기게 된다. 주요 재원이던 학전 수입이 줄어들게 되면서 성균관은 이를 반인들로부터 충당하게 된다.

18세가 도사가 현방(懸房‧다림방‧지금의 정육점)으로 변하면서 반인들은 한양 내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가진다. 이는 노비들 생계유지와 성균관 공역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최대 23개까지 운영됐던 현방은 공물을 쌀로 통일시킨 대동법이 가져온 교환경제체제와 맞물려 호황을 누리게 된다. 교환경제는 시장을 만들었고 양반이 아닌 계층에서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부자가 된 중인층이 양반 문화를 흉내 내며 소고기 수요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은 소고기 판매 독점권을 주되 수익 일부를 성균관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명분은 우금정책 위반이다. 소 도살은 위법이기 때문에 사헌부·형조·한성부 등 세 사법기관에 벌금인 속전(贖錢)을 내게 했다. 속전은 성균관 운영 이외도 사법기관 소속 하위 공무원 월급과 경상 잡비로 쓰였다.

하루에 도살할 수 있는 소는 한 마리였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인계층이 늘면서 소고기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게 되자 소고기 값은 뛰었을 것이고 지방과 소가죽 등 부산물은 우방전(牛肪廛)과 창전(昌廛)에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인들의 금고도 채워져 갔다.

반인과 성균관의 상호보완관계는 현방 운영을 통한 경제공동체 운명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권력 울타리 안에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성균관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은 유생들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 지필묵 등이 모두 무료였기 때문이다.

현방 운영 수입 중 성균관 재정으로 충당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반인 몫이 됐다. 반인들이 현방마다 4명씩 전문 도살업자인 거모장(去毛匠)을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모장은 ‘반인의 노예’라고 불릴 정도로 반인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다. 이는 노비인 반인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반증이다.

1894년 개화파에 의한 갑오개혁은 이들 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부터 12월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이 만들어졌고 공사노비(公私奴婢) 폐지도 그중 하나다. 돈은 있었지만 신분 한계 때문에 사회적으로 움츠려 있었던 이들은 국립 최고 교육기관에서 사역했던 관계로 후대 교육에 눈을 떴다. 반인들이 세운 학교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흥덕사 터와 우암 송시열 집터 이야기로 이어간다.

흥덕동천 변의 필지 변화

▲ 흥덕사가 있던 자리를 표시한 흥덕사 터 표지석 앞에서 김태휘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팀.

홍덕동천 일대는 청계천 이북, 경성 중심부의 동측으로 조선시대부터 주거지가 밀집되지 않았다.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하어의궁, 경모궁 같은 대규모 시설이 입지 한 곳이었다. 따라서 근대 초기 이 지역의 지목은 대부분 밭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홍덕동천 인근은 일본 관련 시설의 유입, 도로와 전차 노선의 확장, 복개 등 물리적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이 일대는 학교 및 종교 시설이 우선적으로 들어섰다.

1917년과 1927년 제작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따르면 1917년 흥덕동천 일대의 지목은 성균관‧반촌지역‧창경궁·종묘‧종로4,5,6가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밭으로 확인된다. 홍덕동천 일대에서 대표적으로 지목이 변화가 일어난 경우는 승일동 2번지는 국유 사찰이었던 흥덕사가 있던 자리다. 이 자리는 연산군 때 폐사된 후 1883년 북묘가 들어오게 된다. 1910년쯤 북묘가 헐린 후 빈터로 남아있던 곳에 중앙학림이 이전해 개교하게 되면서 대지로 변했다,

중앙학림은 동국대의 전신이다. 불교계는 1906년 5월 한성 동대문 밖 원흥사(현재의 창신초 자리)에서 불교전문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1910년 4월 불교사범학교로 개편되고 1914년 7월 다시 불교고등강숙으로 개칭됐다. 1915년에 들어 중앙학림이란 이름을 달았고 북묘 터로 이전하게 된다.

1922년 9월 대부분의 학생이 3·1운동에 참가한 여파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교됐다. 같은 해 12월 전국 불교사찰의 출자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설립됐고 1928년 3월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개교했다.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됐고 1940년 재단법인을 조계학원으로 개칭했다. 같은 해 6월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불교과 외에 흥아과(興亞科)를 신설했으나 1944년 5월 일제에 의하여 다시 강제 폐교됐다.

1945년 9월 다시 개교해 이듬해 9월 동국대학으로 개편했다. 남산에 터를 잡은 것은 평양에 있던 숭의여대가 신사참배로 폐교를 당한 후 남산에 자리 잡은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알려졌다. 항일 운동을 한 개신교와 불교계 학교에서 각각 일제의 흔적이 많았던 남산의 적산에 학교 자리를 잡은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남산으로는 1947년 9월에 이전했다.

흥덕사는 명륜동1가 산 1번지에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흥덕동이라고 불렀다. 지적원도에 따르면 숭1동 2번지(현 종로구 명륜동1가 2-1번지 일대)로 지목은 社(廟(묘) 사당)로 북묘 터와 중복된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성균관 뒷산에 관성묘를 세우고 북묘라고 불렀다. 중국 촉나라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송시열의 집터를 특정할 수 있는 증주벽립 각자와 공업전습소, 서울사대부속초교 교문, 경성제대 본부로 세워졌던 예술인의 집.

흥덕사가 폐사되고 북묘가 들어서기 전에는 우암 송시열의 집터로 추정된다. 빌라촌 관리실 옆에는 보일 듯 말 듯 ‘尤庵舊基’(우암구기)라는 비석이 서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집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각자가 나온다. 증·주는 각각 공자의 제자 증자와 송나라 유학자 주희를 뜻한다. 이들은 자기 처신과 학문에 있어서 올바른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독선적이고 강한 성품 때문에 여러 번 정치적 곤경을 겪었다. 그 역시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증주벽립’이란 각자를 남긴 것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 생으로 만년에는 괴산에 머물렀다.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서울 숭교방 흥덕동에 거처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때문에 그가 살던 동네를 송동(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뿐만 아니라 그의 집터 규모를 짐작케 하는 단서다.

‘증주벽립’ 외에도 근처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과 ’詠磐‘(영반, 올라앉아 시를 읊는 바위)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두루 남아 있다. 우암의 집터에서 내려와 본격적으로 흥덕동천 물길을 걸었다. 종로구는 보도블록에 ‘흥덕동천’ 각자를 해 놓은 것을 띄엄띄엄 박아 놨다. 이곳이 물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가잔 의미로 여겨져 보기 좋았다.

물길을 조금 내려오면 혜화초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반촌에 거주하던 반인들이 돈을 모아 세운 학교인 숭정의숙이 모태다. 못 배워서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노비 출신 부모 세대가 무학의 한을 후세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소고기 판매상들이 모인 조합에서 1909년 설립 준비를 시작해 지금의 명륜동2가, 당시 사현동에 건물을 빌려 학교를 세우고 이듬해 개교했다. 도살하는 소 한 마리 당 10전 씩, 설렁탕 집에서 매일 5전 씩 기부해 재원을 만들었다. 여러 차례 개명을 한 끝에 지금의 혜화초등학교로 자리 잡았다.

한편 소를 자유롭게 도살할 수 있었던 반인들이 모여 산 반촌에는 소고기는 물론 소 부산물이 풍부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소뼈인 사골일 테고 이를 이용한 음식점이 주변에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숭정의숙을 지으면서 설렁탕집에서 매일 5전씩 기부를 받은 것을 보면 이들 반인들이 현방 이외에 소 부산물을 이용해 식당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선지 지금도 혜화동, 명륜동 일대에는 소뼈를 우려 만든 사골 칼국수 식당이 많다.

답사팀은 물길 주변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인 한무숙문학관, 문화이용원, 혜화동주민센터, 동양서림, 학림다방 등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이 때문에 이번 답사 시간이 4시간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한편 대학로를 따라 곧게 내려오던 물길은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가 있는 이화사거리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부설여중 앞에서 좌측으로 살짝 꺾어져 흐른다.

서울사대부속초는 고풍스러운 교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래 탑골공원 정문 기둥이었다. 탑골공원은 원각사란 절이 있던 자리에 1897년 탑과 대문을 세우고 파고다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기둥은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가 서울대 법대 교문기둥으로 기증했다.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1975년 법대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남기고 간 것을 부속초등학교가 사용한 것이다.

서울사대부속초 인근에 서울보증보험 본사 빌딩이 있다. 이 자리는 미션스쿨인 정신여고가 있던 곳이다. 서울보증보험 빌딩 옆 고풍스러운 건축물인 대호빌딩이 옛 정신여고 세브란스관이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미 북장로교회가 1886년 정동여학당을 지금의 덕수궁 석조전 자리에 세웠다. 1895년 연지동으로 옮긴 후 연동여학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사참배거부와 한글말살정책에 항거하다 1945년 3월 폐교됐다.

1947년 졸업생 김필례가 교장이 돼 학교를 다시 열고 1978년 지금의 잠실로 이전했다. 정신여고는 애국부인회를 주도해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거 배출한 민족학교다. 교훈이 굳건한 믿음, 고결한 인격, 희생적 봉사다. 애국부인회를 주도했던 4회 졸업생 김마리아 선생 흉상이 서울보증보험 빌딩 뒤편에 있다.

물길은 의외의 길로 흐른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다녔던 발아래로 저 멀리 응봉에서 샘솟아 흐른 흥덕동천이 흐를 줄이야. 물길은 종로5가와 6가 경계로 빠져 청계천 버들다리 아래로 합수돼 명을 다한다. 버들다리는 일명 전태일 다리라고도 한다. 청계천 피복노동자였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평화시장 앞에서 몸을 불살랐던 희생을 추념하기 위해서 병행해 쓰기로 했다.

정확히 3시간 50분에 걸쳐 진행된 답사가 마무리됐다. 흥덕동천은 경성제국대 시절 대학 앞을 흐른다고 해서 대학천이라고도 불렀다. 물길 끝에 대학천책도매상가의 외벽에 ‘대학천상가’란 간판이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이번 답사를 진행한 김 해설사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조경생태 분야에 뛰어난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이며, 조선 왕릉과 골목길 해설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해 표석시리즈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를 공저로 출간했습니다. 올해는 표석시리즈 네 번째인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를 출간했다.

▲ 전태일 다리 위에서 답사를 마무리하는 흥덕동천 물길 답사팀.

백운동천 물길 답사코스
성균관대 정문-성균관 문묘-양현고 터-흥덕사 터-우암 송시열 집터-흥덕동천 발원지-혜화초등학교-한무숙집(문학관)-문화이용원-혜화동주민센터-동양서림-여운형 서거지-혜화동로터리 우리은행-혜화문과 혜화동성당‧동성중고-학림다방-아르코미술관-김옥상 동상-공업전습소-서울사대부속초-김옥상 서거지-전태일 다리-청계천 합수

■ 일시 : 2021. 6. 19(토) 10:30~14:20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
■ 해설 :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

<참고문헌>
-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지천연구(2020)
- 서울역사편찬원, 쉽게 읽는 서울史 현대편2(2021)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2000)
- 정인하(2000), 김수근 건축론 -한국건축의 새로운 이념형, 시공문화사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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