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제리 맥과이어’(카메론 크로우 감독, 1996)는 멜로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꽤 심오한 영화이다. 제리(톰 크루즈)는 대형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SMI에서 잘나가는 35살의 매니저이다. 그는 점점 사기꾼이 되어 가는 데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회사의 미래를 제시하는, 진정한 인생은 더 적은 수입과 사람들을 향한 더 많은 관심에 있다는 내용의 ‘사명감 제안서’를 회사 중역들에게 제출한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멘티인 밥의 해고 통보. 그는 짐을 꾸려 사무실을 나가며 새 회사를 차릴 테니 자신과 함께할 사람은 따르라고 외친다.

예전에 우연히 비행기에서 인연을 맺은, 외아들 레이와 언니의 집에 얹혀사는 26살 경리부 직원 도로시(르제 젤위거)만이 용기를 내 그에게 합류한다. 제리에게는 약혼녀가 있다. 그러나 ‘대어’인 쿠시의 아버지가 제리를 배신하고 밥과 계약을 맺는 등 새로 차린 회사가 위기에 놓이면서 그녀는 거리를 두고 제리가 먼저 이별을 통보한다.

유일하게 제리와 계약을 체결한 고객은 풋볼 선수 로드. 실력은 뛰어나지만 체격이 작은 데다 사회성이 부족해 스카우터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인 그는 제리에게 ‘대박’ 계약을 성사시키라고 압박한다. 제리는 친한 스카우터에게 로드에 대한 후한 계약을 부탁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조건만 제시할 뿐이다.

제리는 레이와 친해지고 드디어 도로시와 저녁 식사를 한 뒤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회사가 더욱 어려워지자 도로시는 새 일자리를 찾아 레이와 함께 샌디에이고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제리는 결혼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면 주거와 의료보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다며 청혼하는데.

중세 말기 일련의 철학자들이 사회계약론을 주창했는데 이는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국가’에서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사람들은 옳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가 하면 반대로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의롭지 않은 일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게끔 계약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홉스에게 인간관계의 갈등은 꼭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그렇기에 그는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잡아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하는 전쟁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또 그는 특권을 누리거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귀족주의와 더불어 강자로 인해 사회계약 성립이 불가능해지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각 개체의 ‘자기보존’에 주목했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평등한 조건의 사회계약’으로 정치,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자고 사회계약설을 천명했다. 물론 오늘날의 인식론에 비춰 볼 때 약간 부족한 점은 있지만 ‘각자의 자연권을 양도하고 실정법을 통해 자기를 보존하자’라는 의도는 결코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제리는 스포츠 스타 매니저로서 절정에 올랐을 때 문득 자신이 고등 사기꾼이 되었다고 깨닫는다. 어떤 분야이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실력이겠지만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에서 알 수 있듯 플러스알파의 인테리어가 빠지면 안 된다. 즉 적극적인 포퓰리즘과 프로파간다로써 주가를 잔뜩 띄워야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것이다.

제리는 그런 솜씨로써 승승장구 중이었지만 문득 자신의 스타일이 옳지 않고, 그래서 반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첨단 시대에 바르트의 기호론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대부분의 광고에 수익을 위해서라면 과장, 왜곡, 상대 비방 등으로 소비자의 판단력을 흐려 놓는 혹세무민이 개입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익에 양심이 자리를 내준 지 오래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플랫폼을 통한 언론 보도 역시 객관성이 현저하게 떨어져 가는 추세이다. 쿠시의 아버지는 “난 계약서 따윈 안 써. 내 말이 신용.”이라고 떠들고, 제리는 계약서를 쓰자고 애걸한다. 그런데 그토록 아날로그적 의리를 강조했던 쿠시의 아버지는 밥과 미리 계약서를 쓰고 날인했다.

부족국가 시절에 부족장 임명장이 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실시된 이후 전 국민의 인정을 받는 ‘계약서’는 필수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홉스는 앞서갔고, 이 영화는 제리를 통해 사회계약론의 장점을 부각한다. 다음은 경험론자이자 인과적 회의주의자인 데이비드 흄이다.

제리와 밥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첨예하게 경쟁한다. 인간 사회에서 개개인끼리 부닥칠 일은 비일비재하다. ‘서로 잘난 체하기’이다. 흄은 ‘철학이란 일상을 반성케 만들어 그릇된 생활 태도를 교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현실에 매우 주목한 대표적인 경험론자이다.

제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돈을 밝히지 말고 열정!”이라고 부르댄다. 낙관론을 거부하는 데서 흄의 인과론적 회의주의가 엿보인다. 또 “상업적 욕심을 버리고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라”, “사람에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렇게 인격을 완성해 가는, 혹은 서로 그렇게 돕는 파트너가 도로시이다.

그래서 그는 말미에 “당신이 날 완성시켜 줬어.”라고 고백한다. 이 작품이 집중하는 곳은 인간과 인간, 개인과 단체(국가) 사이의 계약이다. 다음은 그에 따르는 신의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상대방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믿음과 인간적인 도리로써 상대방을 상대하자는 인격적 경지를 웅변한다.

제리가 도로시에게 청혼할 당시의 심리는 다소 충동적이었다. 결혼식 메이킹 필름에서 그런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이를 깨달은 도로시는 일마저 잘 안 풀리자 제리의 곁을 떠나고, 제리는 애써 말리려 들지 않는다. 그는 절망의 나락에서 성공의 탄탄대로에 다시 올라섰을 때 참된 사랑의,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으로서의 길에 대한 시야가 트이게 된다. 재미, 감동, 철학을 모두 갖췄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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