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2차 답사인 ‘삼청동천 물길 따라 걷는 경복궁 동쪽 길’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지난 5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에서 두 번째 ‘물길답사’가 시작됐다. 이번 물길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란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문화지평은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5대 물길에 대한 답사와 함께 3D, 동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답사 대상은 백운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 청계천을 이루는 5개 지류 발원지부터 청계천 합수 지점까지다. 이번 답사는 5개 지류 중 두 번째 코스인 삼청동천 물길이다.

삼청동천 발원지와 물길 흐름

▲ 삼청동천은 삼청동천은 백악 동편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로 경복궁의 동측을 지나 교보문고와 동아일보 뒷길로 해서 청계천 본류로 합류한다. 삼청동천 발원지인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앞에서 출발 전 단체사진.

삼청동천의 근원은 백운동천과 동일하게 북쪽 주산인 백악에 있다. 삼청동천은 백악 동편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로 경복궁의 동측을 지나 교보문고와 동아일보 뒷길로 해서 청계천 본류로 합류한다. 이 물줄기는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인 중학 앞을 지나기 때문에 중학천이라고도 불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서울의 주산인 북악과 부 주산이 되는 응봉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인 삼청동천은 촛대바위 부근 삼청동문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른다. 이는 백악의 서쪽 창의문 고개 백운동에서 발원해 경복궁 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중부학당 앞에서 합류해 흐르다가 혜정교를 지나 서린동에서 청계천 본류로 합류한다.

삼청동천은 조선시대에 그려진 고지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청계천의 상류 물줄기다. 1750년대 제작된 도성도에서도 경복궁 동측을 흐르는 물줄기로 표현되어 있다. 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6월 8일의 기록을 보면 대부 홍연이 소격전 동리 시냇가에서 돌을 지고 오다가 백은 1정을 얻었는데 원나라 돈이라서 정부에 바치니 그 값에 준해 상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소격전 옆으로 시냇물이 흘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답사팀은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에서 만나 물줄기 상류를 보기 위해 공원 후문으로 이동했다. 아직은 물길이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상류 발원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삼청공원은 백악산(북악산) 동남쪽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졌다. 그래서 지명이 깊은 골짜기 안에 도교의 삼청전(三淸殿)인 소격전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삼청공원은 1934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에 첫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

당시 삼청공원은 140개의 계획공원 가운데 가장 먼저 도시공원으로 지정됐다. 처음 면적은 43만2000㎡이었으나 본격적으로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된 1984년엔 37만2418㎡으로 줄었다. 공원주변에는 수 백 년 묵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궁궐 주변에 소나무를 주로 심었기 때문이다. 솔숲 위로는 산벚나무, 아래로는 진달래와 철쭉이 많이 자라 봄이면 화려한 꽃의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삼청터널이 뚫리면서 공원도 훼손됐다. 삼청터널은 종로구 삼청동과 성북구 성북동을 잇는 터널로 삼청공원 밑으로 뚫려 있다.

삼청공원은 서울 살이 반백년 동안 두 번째 방문이다. 올 설날 때 첫 발을 디뎠으니 여전히 처음이나 다름없다. 공원 후문 쪽에는 영무정이란 정자가 있고 ‘영무정의 사계절’이란 글을 새긴 비석이 있다. 영무정 앞 계곡에서는 예전에 남성들이 모여 노천 냉수욕을 즐겼다고 한다. 영무정 앞을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면 삼청동천이 발원한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인근에는 1974년 한국일보가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세운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 이 씨의 백로가가 새겨져 있는 시조비가 있다. 한글서예 대가 일중 김충현의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다만 시비가 주변 경관 어울리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알 수가 없어 생뚱맞았다.

삼청동천이 흘렀던 물길은 현재는 복개돼 삼청로로 변했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물길답지 않게 가파르다. 옛날에도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감사원 뒷길로 해서 삼청동길로 접어들면 삼청동청사 쪽에서 흘러 내려온 물길과 만난다. 가수 전인권 씨가 사는 쪽 계곡에서 주택가를 관통해 흘러내려온다.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측에 집들이 마치 수상가옥처럼 들어선 동네다. 온전히 옛 물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비라도 온 다음날이면 물소리가 제법 용맹하다.

합수지점에서 몇 발짝 더 내려가면 ‘지청천장군집터’라는 표석을 만날 수 있다. 지 장군은 삼청동 30번지(현재 30-1번지)에서 태어나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투사다.

삼청동천의 다리들

▲ 혜정교 표지석 앞에서 답사팀이 전상봉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삼청동천은 지금의 광화문우체국을 지나 청계천 상류인 백운동에서 내려오는 백운동천과 만나 청계천 본류를 형성해 동쪽으로 흘러간다. 이 물길에 놓여 있던 다리는 모두 6개였다. 제일 상류의 북창교는 삼청동 40번지에 있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무기를 보관하고 관리하던 군기시의 화약창고인 북창이 위치해 있었고 그 앞에 다리가 있어서 북창교라 불렀다. 주로 군인들이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원서교는 지금의 종로구 화동 64번지 부근에 놓였던 다리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화초와 과수나무의 재배 및 화분 제조를 맡아 담당하던 기관인 장원서가 있던 곳이다. 장생전교는 지금의 종로구 소격동 73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로 조선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도상(圖像)을 모아 보관하고 있던 관청인 장생선이 있었다.

십자각교는 종로구 사간동 76번지 옛 한국일보사 쪽에 있는 동십자각 옆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정문인 광화문 동쪽과 서쪽에 각각 왕궁을 지키는 망루의 역할을 하는 각을 지었다. 이때 동쪽에 세운 것을 동십자각, 서쪽에 세운 것을 서십자각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서십자각은 훼철돼 사라지고 동십자각만 남았다.

중학교는 종로구 중학동 88·91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양반과 서얼 등이 입학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관으로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4부학당, 즉 동학·서학·남학·중학이 있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중학 앞에 있던 다리이다. 이 일대를 지금도 중학동이라 부르는 이유다.

혜정교는 종로1가 89번지 현 광화문우체국 북쪽에 있던 다리다. 교보문고 앞에 표지석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을 어긴 지를 이 다리에 설치했던 기름솥에 삶아 죽여 여러 사람에게 징계가 되도록 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 다리가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는 태종 10년 (1410)인데 당시는 토교였으나 태종 12년 종묘동구 서쪽 방면의 개천에 대한 석축작업을 하면서 돌다리로 바꾸었다. 다른 말로 혜교라고도 한다.

삼청동천 공간 이야기

▲ 북촌한옥마을에서 내려다본 삼청동 한옥. 1930년도에 지어진 20평 안팎의 중정이 있는 도심 한옥형태가 잘 드러나 있다. 아래는 양반들이 몰려 살았다는 볕이 잘 드는 높은 곳에 위치한 북촌한옥마을.

삼청동천이 흐르는 경복궁의 동측 마을은 북촌 지역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다. 북쪽 백악 산줄기와 응봉 산줄기가 만나 현재 감사원 앞 삼거리 언덕을 형성한 북고남저의 지세에 따라 작은 구릉 사이에 삼청동천, 안국동천, 제생동천, 북영천 등 작은 계류가 발달했다. 백악에서 청계천까지 지형이 점점 낮아져 자연히 계곡을 따라 물길이 흐르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주된 물길이 지금은 삼청동로 복개됐다.

이러한 지형의 영향을 받아 각 동네는 물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는 갯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높은 지형을 이루는 능선과 물줄기는 각 행정구역 경계의 기준이 됐다. 지금은 물길이 복개되고 능선 부분은 주거지로 변화되어 물길과 능선 구분이 흐릿해졌지만 방위적 위치적 요소는 여전히 동네 이름으로 남아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곳이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라고 한다. 북촌은 바로 이 두 궁궐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 될 뿐 아니라 남쪽으로 남산을 비롯한 좋은 경관이 펼쳐진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인기가 높았다. 궁궐이 가까운 탓에 재동 일대는 팔도 각지에서 올라온 양반들의 주택들과 육조 관아에 근무하던 관리들, 그리고 이들에 딸린 하인들이 살던 작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이 지역은 소위 말하는 양반들 동네인 북촌한옥마을 일대로 불린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가회동과 삼청동을 비롯해 계동, 재동, 화동, 소격동, 사간동, 안국동, 원서동 등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북촌’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이기 때문이다. 옛 부터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시대 삼청동천 주변은 신분에 따라 주거지가 나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노론들이 살았으며, 종각 이남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이 살았다’고 적었다. 조선시대에 계층별 거주 지역이 달랐던 이유는 풍수지리적 측면에 따른 선택도 있지만 사실상 한양(서울)이 계획도시였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조선 왕조는 도성 건설공사를 추진하면서 도성 내 대로와 중로를 다 닦기도 전에 개경에 살던 고관대작을 이주시키면서 택지를 나눠줬다. 택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풍수지리적인 조건과 궁궐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을 감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복궁 동쪽 마을인 북촌 지역에 몰려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남촌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 위를 선호했다. 조선시대 주거지에는 골목길 양편에 하수로가 존재했다. 골목길 하수로는 하천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하천의 중심 기능은 처음부터 하수도일 수밖에 없었다. 즉 북촌의 중심부를 흐르는 삼청동천도 오물을 옮기는 하수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수가 흐르는 하천 주변은 열악한 주거지였다. 그래서 양반 대신 노비를 포함한 하층민들이 주로 몰려 살았다. 북촌 마을 높은 지대는 양반들의 대형 필지가 있지만 물길 옆에는 작은 필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촌에 아직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조선시대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급격히 인구가 유입되자 부족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하여 한옥들은 조각조각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지어진 20평 안팎의 도심 한옥군들은 중정을 갖는 전통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을 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삼청동천 길 가에는 화기도감 터, 삼청동문 바위 각자, 소격서 터, 종친부, 경복궁 건춘문, 동십자각, 사복시 터, 중학천, 혜정교 터 등 조선시대 유적이 표석이나 실제 모습으로 많이 남아 있다. 건춘문은 종신(宗臣) 즉 왕족의 친척과 궁 안에서 일하는 상궁들만 드나들던 문이었다. 종부시와 종친부가 건춘문 쪽에 위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건춘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동십자각이 맞닿아 있었지만 일제시기에 잘려나가 현재는 동십자각만 도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 길을 지나다가 꼭 한번 보길 권한다.

삼청동천은 중학천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중부학당, 즉 중학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중학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편 중학동 88번지 일대에 있었다. 서울시는 2009년 중학천 복원 공사를 추진했다. 도심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하고 광화문광장에서 피맛골과 인사동을 연결하는 문화관광벨트로 조성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삼청동천은 바위각자 ‘박물관’

▲ 삼청동천 물길과 지류 구간엔 유난히 바위 각자가 많다.

삼청동천 구간은 ‘삼청동문’·‘안득불애’·‘사병’·‘강청대’ 등이 있고 지류인 옥호동천 구간은 ‘옥호간’·‘일관석’ 등 바위글씨가 있다. 운룡동천 구간은 ‘고회암’·‘기천석 강일암 서월당’·‘기천석 장희영’·‘운룡대’·‘운룡정’·‘ 운룡천’ 등 바위글씨가 있다. 월암동천 구간은 ‘영월암’·‘월암동’ 등이 있고, 청린동천 구간은 ‘청린동천’·‘동벽산정고 천청석기신’ 등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청동문(三淸洞門)’은 삼청동천(三淸洞天)의 다른 이름이다. ‘동문’은 승경지의 입구이고 ‘동천’은 절승지를 의미한다. 흔히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려한 골짜기로 ‘동천(洞天)’, ‘동천(洞川)’, ‘동문(洞門)’이라고 했다.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자연부락을 마을 동(洞)이라 불렀다. 동천에 하늘 천(天)을 쓰이는 것은 수려한 골짜기에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들도 이곳에 내려와 노닌 무릉도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삼청동문(三淸洞門)’은 삼청동 63-37번지에 있는 바위글씨로 백악산 남동쪽 기슭에서 경복궁의 한쪽 면을 휘감아 내려오는 삼청동천 구간 마을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바위 각자는 삼청들목의 대문 구실을 했다.

‘강청대(康淸臺)’·‘사병(似屛)’·‘안득불애(安得不愛)’는 삼청동 총리공관 내 암벽에 새겨진 바위글씨이다. 총리공관은 선조 중엽 왕자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화궁 터다. 고종황제가 매부, 즉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사위 이윤용(이완용의 형)에게 이 터를 하사했다.

이윤용은 다시 휘문의숙 설립자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에게 매각했다. 민규식은 이를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팔았고 1945년 광복 전까지 경성전기 관사로 사용했다. 광복 후 이곳은 국가에 귀속되면서 한국전력에서 인수했다가 1948년부터 1961년 5월까진 국회의장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이후론 총리공관이 됐다.

한편 백운동천 물길 주변에는 번사창, 지청천장군 생가터, 이준구 가옥, 백인제 가옥, 종친부, 규장각 터, 사간원 터, 동십자각, 의정부 터, 육조거리 등의 역사자원이 있다.

삼청동천 물길 답사코스

삼청공원-지청천 장군 집터-화기도감터-국무총리공관-삼청동문 각자-소격서터-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종친부(경근당, 옥첩당)-건춘문-동십자각-광화문시민열린마당-사복시터-중학천(복원 흔적)-혜정교터-염상섭 동상-청계천 합수

■ 일시 : 2021. 5. 15(토) 10:30~13:00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해설 :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지천연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북촌가꾸기 기본계획(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1)
-송지선(2006), 청계천 상류지천 유역의 역사탐방로 계획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이상희(2015), 북촌지역 바위글씨에서 나타난 생태 문화적 의미연구, 상명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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