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밤빛’(김무영 감독)은 상업적 구문론에 익숙한 관객에겐 대단히 불친절하거나 불편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깊이를 즐기고자 하는 관객에겐 짙은 여운이 뼛속까지 파고들 독립영화다. 오래전 아내와 헤어진 희태(송재룡)는 병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자 모든 인연을 털고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캔다.

어느 날 여름방학을 맞은 중학생 아들 민상(지대한)이 찾아오자 건조한 반복이 일상이던 그의 삶의 틈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진다. 민상이 있다고 그의 생활 패턴이 달라질 것은 없지만 평소대로 산에 오르고 계곡물에 세면을 하는 데 민상이 동행함으로써 뭔가 활력이 솟는다. 그렇게 꿈 같은 2박 3일이 지나간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개성은 대사가 절제됐고, 모든 게 느리며, 자연이 주연배우고 배우가 미장센이라는 점이다. 거의 모든 컷에서 카메라는 정지돼있고, 희태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식이다. 이는 희태가 스스로 세상과 유리한 채 고립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슬로 모션 버전 같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산의 겨울과 여름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가득 품는다. 도시에서 사람들이 온갖 사건과 사고를 만나고, 숱한 권모술수와 이전투구로 심각한 희로애락을 겪더라도 그들은 이 드넓은 우주의 먼지 한 점과 같은 존재일 뿐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웅비하게 신의 섭리를 묵묵히 수행한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희태와 민상은 첫 대면 때 아무 말도 안 한다. 희태는 민상이 태어나기 전 혹은 민상이 아버지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어릴 때 아내와 헤어졌다. 민상은 어렴풋이 희태가 아버지인 줄 알지만 아저씨라 부르고, 희태는 애써 아버지라고 정정하려 들지 않는다. 서로 인지하는데 호칭이 뭐가 중요할까?

희태와 민상은 전기도 안 들어오고 휴대전화도 불통인 산에서 내려와 희태의 건강원으로 간다. 민상의 휴대전화를 충전하고 약초도 팔 겸. 약속한 손님이 찾아와 희태에게 “그런데 저 소년은 누굽니까”라고 묻자 희태는 대답도 없이 서둘러 약초 상자를 차에 실어주겠다며 손님을 데리고 나간다.

산에서 희태는 민상에게 영지버섯 따는 걸 한번 해보라고 한다. 마지못해 해보던 민상은 끝내 포기한다. 희태가 억지로 그걸 시킨 건 진짜 그런 걸 가르치거나 혹은 민상에게 일을 시키려던 게 아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확실하니 아버지의 삶을, 그림자를 아들의 기억 속에 심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 만물은 발현해 현존하다가 소멸하기 마련이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가르치는 바람에 인간의 오만함이 2500년간 지속돼왔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웬만큼 경험이 쌓이면 깨닫게 된다. 오죽하면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상정했을까? 신들의 머리에 여러 동물을 설정한 1~2만 년 전의 이집트인들은 그나마 낫다.

희태에겐 무미건조함이 강하다. 그는 초월했을 수도 체념했을 수도 있는데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걸 보면 초극과 무관심을 깨닫거나 익힌 듯하다. 인트로에서 누나는 그에게 가게 보증금이라도 빼서 치료비를 마련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민상에게 산에 떠도는 약초꾼의 전설을 들려준다.

아들이 죽을병에 걸리자 약초꾼은 온 산을 뒤진 끝에 절벽에 매달린 명약을 발견해 죽음을 무릅쓰고 채취하려다 결국 발을 헛디뎌 죽고, 얼마 뒤 아들도 죽는다. 아들을 살리지 못한 한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한 채 귀신이 돼 산을 떠돌며 만나는 사람을 저승길의 동행으로 삼는다는 슬프고도 오싹한 얘기.

그 약초꾼은 바로 자신이다. 산속의 명약을 캐서 판매하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한다. 그는 희망을 포기한 게 아니라 희망 고문을 피한 것이다. 병을 고쳐 더 살아봐야 더 나아질 삶이 아니란 걸 알기에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민상의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왜 헤어졌어요?”라고 묻자 “내일 몇 시 차로 가니?”라고 엉뚱한 대답 아닌 질문으로 무마한다. 희태는 장 자크 루소다. 그는 훌륭한 교육의 명저 ‘에밀’을 출판했지만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보낸 모순의 아버지다. 그래서 ‘가난도 체면도 자식을 키우고 교육하는 일로부터 면제시켜줄 수 없다’고 참회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은 건전하고 선량하지만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다’며 자연회귀를 주장했다.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지만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각종 이기심과 시기심 등이 증대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게 됐다는 것.

감독은 아내에게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무시당한 희태를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비교적 덤덤하게 그린다. 겨울에 시작해 여름을 거쳐 겨울에 끝나는 그림은 그런 먹먹함이다. 이 영화는 여백과 고요의 미학이다. 특히 눈 속의 자작나무 신은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시퀀스를 연상케 할 만큼 감격적이다.

방 안의 별 스티커를 보고 왜 붙였냐는 민상의 질문에 희태는 공포를 피하기 위함이라고 답한다. 약초꾼 귀신이 두려웠을까? 산의 적막이 무서웠을까? 아니다. 고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게 겁났던 것이다. 별은 밤빛이다. 그의 위안이고 유일한 친구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먼저 짜장면을 먹은 민상은 약국에 간다. 민상을 버스에 태우며 희태는 엄마에게 전하라고 편지를 건넨다. 그러자 민상은 가방에서 기침약을 꺼내준다. 엄마가 데리러 오냐고 묻자 “올 때 혼자 왔으니 갈 때도 혼자”라고 답한다. 아들은 산에서 아버지의,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깨달았다.

한밤에 깬 희태는 조심스레 민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마나 만지고 싶었던 내 자식인가? 희태가 키우는 개가 새끼를 낳고 민상은 “별 진짜 많네”라고 새삼스레 놀란다. 행성은 생성되고 먼지가 될 것이다. 우주는 그렇게 반복된다. 한밤에 희태가 산 정상에 오르고 훗날 그 자리에 민상이 서듯. 3월 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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